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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25화 (126/310)

125화. 오크로드의 권능 (3)

“허억! 허억! 허억!”

요의림 교두는 바닥을 벌벌 기며 몸을 일으켰다.

폭식이 휩쓸고 간 기의 허(虛) 때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풀려 버린 팔 다리로 인해 한참이나 몸을 떨었다.

“좀 괜찮으시오?”

타닥. 탁.

쓰러진 홍매학관의 교두들을 일으키는 이들. 목소리가 낯익었다.

고개를 천천히 든 그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천극태와 지민. 관도 수비대의 지점에 파견 나갔던 홍매학관의 최고수 중 두 명이 눈앞에 와 있던 것이다.

“가… 감사하오.”

요의림은 천군만마를, 아니,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딱했으면, 그대로 산 채로 잡아먹힐 뻔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분명 목숨을 잃었을 터.

“저, 음. 이분들은?”

그래서 두 사람 옆의 다른 무인을 발견하는 게 늦었다. 분명히 낯선, 하지만 기세로 보아 천극태 못지않은 고수였다.

그런 사람이 둘이나 된다.

“본관에 지원 오신 천무학관의 교두들이오. 제운비와 뇌천벽.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 게요.”

“아!”

요의림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옴을 느꼈다.

검왕 제운비.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화경의 고수.

그리고 뇌천벽 역시 같은 화경의 고수다.

머리가 제 기능을 하게 되자 그는 즉각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처억.

“바. 반갑소이다! 높으신 이름은 진작부터 들었소! 천무학관이 홍매학관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으니 훗날 반드시…….”

“쉬이.”

스윽. 까닥.

열렬하게 감사를 표하는 요의림에게, 제운비가 손가락을 까닥하며 말을 끊었다.

“인사는 나중에 나눕시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처억.

그리고 검을 들어 쿠아토를 가리켰다.

“헉! 네. 네!”

요의림은 그제야 몸을 가누지 못한 교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지금은, 이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아니었다.

* * *

“제법. 재밌는 녀석들이 왔군.”

쿠우우우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쿠아토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폭식, 무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검기조차 맞아도 흡수해 버리는, 리치왕의 축복을 받은 몸이다.

하지만 그 축복도 교두들의 맹공에는 어찌할 수 없었다.

검강이 날아들 때 화급히 땅을 파먹으며 피해 내긴 했지만, 몸 여기저기서 제법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특히 다리 사이로 흐르는, 녹색 피는 유독 시선이 가게 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는 되어야 할 만하지.”

긴장을 잔뜩 했지만, 동시에 쿠아토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스며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화경의 고수 셋, 거기에 고서클의 마법사까지.

이런 자들을 상대로 자칫 방심하다간, 목이 날아갈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짜릿한 것 아닌가.

오크. 투지를 근본으로 삼는 일족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싸움을 갈망하는 피가 흐르는 존재였다.

‘마나트는 아직인가…….’

파팟.

쿠아토는 연신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을 훑었다.

목숨을 건 싸움의 즐거움과는 별개로, 이번 작전은 엄연히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바로 오크들의 보물인 ‘넘치는 심장’.

한때 쿠아토가 자랑스레 걸고 다녔던 아티팩트. 무림인들의 협공을 받으며 잃어버렸던 그 아이템의 탈환.

그를 위해 쿠아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시선을 끌고 홍매학관에서 분탕질을 치는 사이, 마나트가 잠입해서 넘치는 심장을 회수, 이후에 합류한다.

그게 이번 작전의 요체였다.

펄쩍. 펄쩍. 투욱. 툭.

마나트가 완전히 이탈하기 전까지 쿠아토는 지속적으로 홍매학관에 피해를 입히며 시간과 시선을 끌어야 했다.

마나트는 여러 번 말했다. 목표를 탈취한다 해도 바로 빠져 버리면 인간들은 분명히 추격을 해 올 거라고.

그러니 쿠아토는 여기서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 했다. 인간들의 학관을 부수고 고수들을 죽이며, 홍매학관이 혼란을 수습하기도 힘들 정도로.

삐르르르--!

‘됐군.’

한참 펄쩍펄쩍 뛰던 쿠아토의 얼굴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친 마나트. 녀석이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피리 소리로.

“크---으르륵!”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는 화끈하게 한판 벌이며, 죽이고 먹고 부수기만 하면 된다. 쿠아토는 만면에 기쁨을 떠올리며, 그의 몸에 충만한 투기를 불러일으켰다.

쿠웅! 과아아악!

기괴하고 우렁찬 포효가 홍매학관 전역에 메아리쳤다.

* * *

파팟. 파파팟.

한편, 천마는 노달과 함께 홍매학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돈은 챙길 만큼 챙겼고, 천마는 천마대로 몇 가지 괜찮아 보이는 아이템들을 잔뜩 담았다.

아쉽게도 먼저 매령지관에 들른 놈이, 등급 높은 아이템은 죄다 박살 내서 선택의 폭이 많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워할 만한 빈집 털이였다.

“야, 노달. 안 무겁냐?”

“허억… 허억… 무, 무겁지만… 괜찮습니다!”

천마가 묻자 노달이 가쁜 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는 배낭에 금붙이며 마정석이며 보석이며 하는 것들을 잔뜩 채워 넣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온몸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채워, 무게가 백 킬로는 우습게 넘어갈 짐을 지고 달리고 있었다.

“흐… 흐흐… 으흐흐흐!”

그럼에도 노달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이거면 돈이 대체 얼마인가. 이 돈이면 천마신교가 얼마나 힘을 얻을 것인가.

천마신교에 입교한 이래, 단 하루도 돈 걱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화경의 고수가 체면도 없이 돈만 밝힌다고 욕을 먹은 건 옛날부터였다.

하나 노달은 수전노라 불리든 말든 상관없었다.

무인의 명예고 뭐고, 오로지 교단의 안위만 살피기에도 바빴으니까. 돈은 항상 부족했고, 먹여 살릴 교인들은 많았다.

그래서 성격이 꼬이고, 항상 예민하고 잔걱정이 많았었는데, 오늘의 한탕 덕분에 앞으로 10년은 돈 걱정 없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 래. 알았다. 고생해라.”

“……?”

그런데 참 얄궂게도, 갑자기 짜증이 툭 솟아올랐다.

사람이 힘들게 짐을 지고 가면, 좀 나눠 들어 주겠다는 빈말이라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그래서 천마를 보는 노달의 눈이 조금 사나워졌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지가 뛰어나도, 인성이 이래서야…….

우뚝!

“어이. 노달. 물러서라.”

“예? 왜…….”

“저기, 저놈 봐. 아까 본 그놈 맞지?”

짐짓 제발 저려서 부정하려는 노달. 그런 그에게 천마는 한쪽을 가리켰다.

돌과, 바위와, 협곡의 사이에 웅크린.

유달리 거대한 덩치의 오크 한 마리를, 노달 역시 뒤늦게 확인했다.

“제자님, 저 녀석은……?”

“그래, 오크로드다. 노달, 내가 궁금해서 묻는데 말이지.”

우드득. 뚜둑.

천마가 손목을 꺾으며 은밀하게 이동하는 오크, 넘치는 심장을 조심스레 품고 달리는 마나트를 보고 웃었다.

“저런 놈도 내단이 있는 거지?”

“…….”

씨이이이익!

대답을 듣기도 전에 천마의 온몸에서 살벌한 기세가 일어났다.

왜 녀석이 여기 홀로 떨어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저 녀석을 잡을 절호의 기회란 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 * *

“별 피해가 없어 보이는군. 어떤가?”

뇌천벽이 헐떡이며 제운비에게 물었다.

습격당한 남이현의 사후 처리를 하고 있던 관도 수비대. 거기 함께 있다 홍매학관이 기습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교두 네 명은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전력으로 검강을 두 번이나 뿜었다. 강철로 만든 인간이 아닌 이상,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아쉽지만 아무래도…….”

“…피륙에만 조금 생채기를 낸 정도예요.”

제운비가 말끝을 흐리고, 지민 교두, 홍매학관의 마법학 교두가 인상을 쓰며 뒷말을 이었다.

검강이라는 필살의 공격 다음에, 쿠아토가 제 발로 뛰어들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마법 함정을 깔았었다.

하지만 잠시 전격 마법으로 마비 정도만 시켰을 뿐, 뒤이어 날린 검강은 그저 땅만 가르고 말았다.

“폭식의 쿠아토. 위험 등급 14급… 하긴, 그리 쉬운 놈이었으면, 네임드 몬스터가 되지 못 했겠지.”

천극태는 그의 대도에 기운을 잔뜩 불어넣은 채, 언제든 출수를 할 준비를 했다. 쿠아토는 분명 제법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낭패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으니까.

펄쩍. 펄쩍.

“놈이……?”

“이동합니다. 따라붙읍시다.”

그러다가 갑자기 쿠아토 놈이 한쪽으로 몸을 날리며 뛰기 시작했다.

타다닥! 타닥!

교두 넷은 즉각 그 뒤를 따라붙었다. 십여 장을 그리 이동한 뒤 놈이 발을 멈추자, 네 사람은 즉각 진영을 흩뜨리지 않으며 놈을 경계했다.

“크르르르…….”

그러다가 또.

펄쩍! 펄쩍!

쿠아토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금 자리를 옮겼다. 놈을 따라잡으며 뇌천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 무슨 생각인 것 같소?”

권능의 유무를 떠나, 놈이 위험 등급 14급인 걸 떠나. 저 폭식은 대단히 기민한 놈이었다.

검강으로 견제해서 마법학과 교두 지민의 일렉트로닉 트랩으로 몰아가기.

작전은 제대로 먹혔다. 극강의 전격 마법을 맞고, 놈은 분명히 몸을 움직이지 못했을 상황에 몰렸다.

그런데 거기서 쿠아토는 땅바닥을 ‘먹어 치운다’는 기지를 발휘해, 뒤이은 필살의 검강을 피해 냈다.

이쯤 되면 이놈이 정말 오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모르겠어요.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당연히 있겠… 지금?”

제운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쿠아토의 반대쪽, 홍매학관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 못 들었소?”

“소리? 무슨 소리?”

“귀를 찌르는 듯 예리한… 아니오. 아무것도.”

제운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화경에서도 높은 경지인 그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지만, 그저 느낌일 뿐 정확히 어떤 건지 설명하기에는 애매했던 탓이다.

-크---으르륵!

무엇보다 쿠아토, 놈의 기세가 갑자기 일변한 탓이 더 컸다. 이제까지 뭔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폭식은, 갑자기 미친 듯이 기운을 뽑아내며 포효를 터뜨렸다.

과아아악!

“……!”

“……!”

끔찍한 소리가 홍매학관 전역에 널리 퍼졌다. 교두들은 바짝 긴장해서 힘을 쓸 준비를 했다.

쿵. 쿵쿵!

땅바닥을 찍으며 흉악한 살기를 눈으로 뿜어내고 있는 폭식. 그 상태로 놈은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저건 또 뭐 하는…….”

“집중 흩뜨리지 마시오. 돌격해 올 태세야.”

천극태가 눈살을 찌푸리자 제운비가 말을 끊었다.

다른 일행들은 몰랐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쿠아토의 전신이 도약하기 전의 호랑이처럼,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힘을 축척하고 있음을.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이는 순간, 놈은 바로 반응한다. 전신의 긴장을 잔뜩 끌어올려 서로의 틈을 노리는 차에.

삐이이익! 삐이이익!

홍매학관 여기저기서 요란한 호각 소리가 울렸다. 제운비는 시선을 쿠아토에게 둔 채, 짧게 물었다.

“저건 뭐요?”

“학관의 교두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거예요. 피해 상황과…….”

지민 교두가 일행에게 호각 소리의 의미를 설명하는 순간.

삐삐익! 삐삐익! 삐익! 삐익!

갑자기 호각 소리가 다급해지고,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걸 들은 지민과 천극태가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격해 오는 몬스터를요!”

“제기랄, 오거라고? 다 잡은 게 아니었나?”

분노와 초조함으로 신경질적이 된 천극태.

지금 여기서 쿠아토라는, 가장 위험한 놈을 붙잡고 있지만 오거만 해도 어지간한 교관들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이번 일로 학관이 입을 피해가 대체 얼마일까? 속이 바짝바짝 탄 그는 호각이 울리는 방향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고.

그르르륵!

“위험해!”

“온다!”

파---앗!

허점을 본 쿠아토가 화살처럼 달려들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슈----아아아악!

천극태를 향한 폭식의 어금니는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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