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27화 (128/310)

127화. 제거 (1)

상대의 도발에 마나트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허. 참.”

그러나 그는 곧 분노를 다스렸다. 치솟았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평소라면 저따위 말을 내뱉는 놈은, 대화고 뭐고 없이 곧장 머리통을 으깨 버렸을 터.

처억.

하지만 마나트는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 정체 모를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가 오크의 공격 본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녀석은 대체……?’

이놈은 뭔가 달랐다. 이제껏 만난 인간 무사들에게서 받은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전에 맞을 뻔한 검강 때문이 아니다.

마나트 역시 이제껏 화경의 고수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몇에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적도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을 알 수가 없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더라도, 얼마나 강한지, 혹은 어디가 강한지. 마나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놈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지, 혹은 대등한지, 아니면 약한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미지. 알 수 없다는 것.

지금 마나트의 심경은 눈을 가리고 좁은 담벼락을 걸어 지나는 것과 같았다. 떨어질 바닥이 1미터일 수도, 혹은 100미터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 최악을 상상하는 것이다.

으드득!

‘마나트. 뭘 두려워하느냐! 고작 하나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닫고 오크로드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든, 자신은 오크로드. 한 무리의 수장이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지면 지는 것이다.

강한 상대에게 패하여 죽는 것은 전사로서의 영광이 아니던가?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피에 흐르는, 근원적인 투지를 끌어올렸다.

“크르르륵!”

패애애액--!

마나트가 자세를 잡자마자 바로 날아드는 공격. 그런데 움직임이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사삭. 삭 사사삭!

거대한 바스타드. 한 손 반 검을 목검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공격은, 너무도 상식 밖의 속도로 찔러 들어왔고.

쉬익!

겨우 피한 찌르기가 베기로 돌변했다. 마나트는 반응할 새도 없이 허리를 베이고 말았다.

“큭!”

그리고 그건 시작이었다.

쉭! 쉬쉬쉬쉭! 쉬쉬쉬쉭!

한 번 상처를 입고 난 후엔, 상대가 정신을 차릴 새도 주지 않고, 무려 십여 번의 무차별 공격을 쏟아 낸 것이다.

“큭! 크윽!”

칙! 치익! 파삭!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차이.

마나트는 피하기는커녕, 막아 내는 데도 급급했다.

이리저리 베이고, 찔리는 걸 넘어, 종국엔.

퍼어억!

배를 걷어차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쿨럭! 쿨럭!”

“뭐야? 이놈. 약하잖아?”

마나트를 간단히 때려눕힌 천마는 의아해 했다.

딱히 내기를 많이 끌어내지도, 특별한 검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 풀기로 가볍게 드잡이를 벌였을 뿐인데 상대는 제대로 된 방어는커녕 피하기에 급급했고. 그러다 보니 마지막엔 그냥 발로 차 버렸다.

자꾸만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아서.

“이상하네… 내가 잘못봤나? 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마나트의 힘을 감지했을 때, 그는 아직 극마의 중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오거와 일대일 박투를 벌인 끝에 깨달음을 얻어 극마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말이 같은 극마이지, 지금 그는 탈마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즉, 지난번에 마나트를 멀리서 감지했을 때와 달리, 지금의 자신은 반응, 힘, 공격 속도가 예전보다 월등히 올라갔다.

당연히 전에 보았던 마나트가 더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노달, 이놈. 형편없는데?”

하지만 그걸 생각하지 못한 천마는 뒤돌아서서 노달을 불렀다.

“그래도…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노달이 손을 내저었다.

“방심은 무슨. 보아하니 아무 쓰잘데기 없는 녀석인 것 같은 데… 네가 잘못 안 거 아냐?”

“…….”

노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노달보다 마나트의 얼굴은 더 붉게 물들었다.

--크와아아아!

마나트는 가슴을 두드리며 흉성을 토해 냈다.

상대는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 성인도 아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놈에게 상대도 되지 못하고 두들겨 맞았다.

으드득!

그건 그럴 수 있었다. 오크에게 싸움은 일상사. 패하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눈길, 자신을 하찮게 보고 가치 없는 상대로 여기는 눈길은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 해도, 전사는 자신에게 패한 전사에게 그런 눈길이나 취급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짓을 잘도 해 댔다. 자신보다 약하면 사정없이 비웃었고, 조롱하고, 모욕했다. 이것이 오크가 인간과 절대 교류할 수 없는 밑바탕이기도 했다.

‘힘을…….’

두근. 두근. 두근.

모욕을 당한 전사가 살심을 품었다. 분노가, 가득한 수치심이, 넘치는 심장을 빼앗겼던 그날을 떠올렸다.

주르륵.

온몸을 흐르는 피가 팔을 타고 손 안으로 흘렀다.

‘힘을……!’

그리고 그 피를 받아 마신 넘치는 심장. 오크들의 신물이 천천히 맥동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검어졌다, 밝아졌다 하며 넘치는 심장은 자신을 움켜쥔 자를 인지했다. 잠시 봉인 역할을 했던 인간의 두개골은 흔적도 없이 깨어졌다.

완전히 깨어난 오크의 신물은 누군가의 피와, 그 피의 주인이 가진 갈망, 분노, 투지를 고스란히 받아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힘을 원하는가?

영혼으로 이어진 목소리로.

“……!”

마나트는 눈을 부릅떴다.

두근. 두근. 두근.

오래되고 낮은 목소리. 그의 손 안에서 맥동하는 넘치는 심장.

그는 오크의 신물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 깨달았다.

‘…쿠아토시여.’

바로 귀속 의식, 혹은 주인 의식.

자신의 피를 통해 전사의 자질을, 투지를 인정받은 것.

실로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이 목소리에 ‘그렇다’고 답하면, 마나트는 힘과 권능을 얻게 된다.

물론 그것은 주인이신 쿠아토의 것을 훔치는 일이 될 터.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 죄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마나트는 자신의 피를 잔뜩 머금은 넘치는 심장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자신은 저 인간들에게 죽게 되고, 기껏 탈환한 오크들의 보물 역시 다시 빼앗기게 될 터.

“힘, 원한다.”

차라리 이곳에서 힘을 얻는 대가로 저 인간들을 죽이고, 나중에 쿠아토에게 배신의 대가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덜컥.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촤르르르륵! 솨아아아악-!

넘치는 심장. 태고의 오크의 보석을 고정하는 쇠사슬이, 녹을 벗겨 내고 줄이 길게 늘어났다.

그 쇠사슬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촉수처럼, 마나트의 목 주위를 두 번 세 번 감으면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크크크크크.

마나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상처도, 소모된 체력도, 삽시간에 회복되어 최상의 상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꿈틀! 꿈틀! 꿈틀!

그의 뇌리에 새겨진 힘. 넘치는 심장이 깨어나게 한 이능.

마나트 자신만의 이능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지는 깨닫는 순간 바로 알게 되었다.

마치 짐승이, 태어나는 순간 바로 숨 쉬는 법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인간, 정말 죽기를 바라는가?”

조금 전보다 한결 또렷한 발음으로, 그는 상대를 향해 투지를 드러냈다.

* * *

“이야. 이것 봐라?”

천마는 그의 변화를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다가 만난 놈을 상대로 싸워 볼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너무 약했다.

그래서 조금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일까 말까. 하고.

그런데 그냥 이대로 죽이기에 아깝다… 하고 쳐다보는 중에, 갑자기 놈이 혼자 펄떡대더니 눈이 뒤집혔다.

정확히는 기세가 변했다. 초조하고 뭔가 걱정 많던 녀석의 심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반드시 천마 자신을 이기고 죽여 버리겠다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뭐야? 숨겨 둔 패라도 있었어? 그럼 진작 꺼내지 그랬어. 사람 지루하게.”

그리고 이런 반전은, 천마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었다. 이제껏 약하게 빌빌대던 녀석이, 최후로 불꽃처럼 타오르며 뿜어내는 투지.

그것만은 오크에 대해, 천마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호감 같은 것이었다.

“…크큭, 그래. 그럼 보여 주마.”

순간, 마나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분명히 오크인데, 인간과는 근육도 표정도 다를 터인데, 지금 놈이 보이고 있는 것은 명백한 웃음이었다.

스-스스스!

오크로드 마나트. 넘치는 심장이 잠재력을 깨우쳐 준 전사는, 주위에서 기운을 끌어들였다. 그 기운을 천천히 자신의 머릿속으로, 생명의 나무를 움직이는 뿌리로 인도했다.

퍼억!

“미러 이미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마나트가, 세 명으로 분리가 된 것이다.

“이거 뭐야?”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크 녀석이 뭔가 숨긴 힘을 쓸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고작해야 분신이라는 건 기대 이하였다.

허상 따위를 만들어 봐야 뭐, 해치우고 본체를 처죽이면 되는 일 아닌가.

파파팟.

덩치 큰 오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른손에 투박한 도끼를 쥔 채,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다.

그럼에도 그가, 빈 손에서 갑자기 마법으로 생성한 도끼를 꺼내 드는 순간 모든 게 급변했다.

그저 무기를 가지게 되는 것만으로, 이제껏 그가 보였던 움직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휘휘힉! 휘휘휙!

일순, 천마는 눈빛이 변했다.

‘신검합일? 아니, 신부합일?’

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오크로드 셋의 합.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건 훈련이나 진법이 아니라는 걸.

도끼 끝에 맺힌 건 분명 검기 이상의 힘이었다. 부기라 부를 만했다.

카캉!

“뭣?”

예상외로 묵직한 타격에, 천마는 당황했다.

계속해서 우습게 보고 있다 보니,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낭패를 당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카카캉! 캉! 카카카캉!

차례로 이어지는 맹렬한 공격.

마나트는 계속해서 달려들었고. 휘두르는 도끼질은 더욱 빨라졌다. 설상가상으로, 도끼질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더욱 수준 높은 연계 공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 봐라?”

처음에는 대충 끝내려던 천마의 얼굴에 놀람과 짜증이 피어올랐다.

상대를 경시하다가 한 대 처맞고 골로 가는 건, 이제껏 그가 상대한 유수한 강자들이 벌인 잘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천마 자신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상대가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강해졌다는 걸.

파파팟.

마나트는 연속 도끼질로 천마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일제히 공격하는 것보다, 다음 수를 계획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흥!”

그렇지만 천마는 한때 무신이라 불리웠던 자.

더 이상 경시하는 것을 그만두자, 곧 상대의 수준이 읽혔다. 이어지는 연속적인 도끼질에서 틈을 찾아, 곧장 반격을 가했다.

카캉! 솨각!

좌측에 있는 오크로드의 도끼질을 되돌려 치며 단칼에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남아 있던 오크로드에게, 연속으로 강한 찌르기 후의 베기를 날렸다.

콰앙!

“…어라?”

그런데.

“크르르르르!”

막혔다. 분명 좀 전의 힘과 속도가 10이었다면, 갑자기 남은 놈의 힘과 속도가 15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건 또 뭐야? 대체?”

콰캉! 콰캉! 콰캉!

다시 상대 수준을 재조정했다. 틀림없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놈의 기술은 전투 능력이 한 번에 세 배로 늘어나는 종류의 것 같았다.

쩌어어어엉!

내공끼리 격발하자, 천마는 결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이거 허상이 아니잖아?”

이제껏 셋 중 둘은 허상이라 예상했었다. 혈교에도 이런 속임수의 경공술이나, 대법은 있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겪어 보니 달랐다. 만들어진 분신들은, 모두 힘이 같았고 생김새는 물론이고 능력 또한 똑같았다.

그저 단순히 세 마리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본래 세 배의 힘을 불리고, 그것을 셋으로 배분하게 되는 것.

원래의 힘이 10이라면, 분신 둘이 나타나는 순간, 그 힘은 총합이 30이 된다.

그중 세 마리 중 한 마리를 처치하면, 남은 10의 힘이 남은 두 녀석에게로 전이된다.

달리 말해 하나하나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남은 놈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이런 종류의 무술이나 기예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이능. 혹은 권능.

애초에 무예나 마법과는 궤가 다른 독특한 힘이었다.

“네놈… 정말 인간이 맞느냐?”

한편 마나트 역시 놀라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