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제거 (2)
생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건 본능이자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넘치는 심장이 자신에게서 각성시킨 이능, 미러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마나트는 얻게 되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번에 자신이 셋으로 늘어나며, 그 힘 자체가 세 배로 부여되는 것.
그리고 힘의 전체량은 불변한다.
적이 강대하여 자신 중 하나를 죽인다 해도, 남은 힘은 그대로.
오히려 소멸시킨 미러 이미지의 힘은, 남은 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개체가 더더욱 강해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필승(必勝).
미러 이미지 하나를 해치우고 방심하던 차에, 100의 힘을 내던 상대가 갑자기 150의 힘을 내며 둘이 동시에 공격해 온다.
원래라면 반드시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막혔다.
상대는 약간 당황한 정도로 그칠 뿐, 이내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충격적이었다.
더욱 강해진 자신의 힘에 맞추기라도 한 듯, 녀석의 힘도 정확하게 같이 올라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게 뭐 중요한가?”
스윽.
천마는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상대가 세 마리든, 두 마리든. 그런 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차피 마물이 여러 수단을 강구해 봤자, 예상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군.”
“취익!”
마나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마도 이번 교전이 마지막이라는 걸.
지글지글.
마나트의 눈빛이 변하자마자, 그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블러드러스트(Bloodlust).
체력과 마나가 급소진되는 대신, 힘과 민첩함이 몇 배나 올라가는 오크 전통의 기예.
그는 한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일격 필살을 준비했다. 그리고 부글부글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힘을, 이 와중에도 여유롭게 서 있는 천마를 향해 곧장 발출했다.
쇄애애애액!
창졸간, 육안으로는 쫓기 힘든 두 오크의 도끼 공격이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시잇!
한 지점을 너무도 빠르게 베어 버린 공격에 마나트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이겼…….”
스윽.
한데, 잠시간 승리의 기쁨을 맛보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손끝에 감각도 있었다.
그런데.
쓰러뜨리고 난 뒤에 상대가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이것은 천마군림보라는 것이다.”
아니, 하나가 아닌 다섯. 아니, 열 명.
자신이 펼쳤던 미러 이미지 숫자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불어난 인간의 모습.
“이, 이게…….”
그는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이자는 정말로 인간이 맞는가? 오크로드인 자신이 신물의 가호를 받아 끌어낸 이능을 이토록 쉽게 펼칠 수 있다니?
“어때? 네가 쓴 것보다 더 쓸 만해 보이는데?”
“이이익, 으아아악!”
싸움의 저울추는 단번에 기울었다.
솨솨솨솨솨!
한 명, 또 한 명. 시간 차로 달려드는 천마의 신형 앞에 그는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퍼걱!
너무도 허무하게 또 하나의 미러 이미지가 목이 날아갔고.
“크아아악!”
그로 인해 모든 힘을 전이받은 마나트가 강렬한 저항을 해 봤지만.
촤아아악!
너무도 허무하게 몸이 양단되었다.
‘저건……!’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노달은 경외감에 전율이 돋았다.
천마군림보.
본교에 절전되었던, 기록으로만 보아 왔던 최고의 경공술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순간에 하나에서 열이 넘게 불어난 천마 제자의 환영.극마에 이른 노달의 눈에 그것들은 결코 허상이 아닌 진체였다.
그러면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허상으로 바꿀 수 있는 무적의 경공술. 최고의 방패이자 최고의 칼인, 천마신교의 교주들에게만 전해지던 비전.
그 전설이 펼쳐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노달, 여기 좀 와 봐.”
투욱.
천마는 바닥에 떨어진 해골 달린 팬던트를 집어 들었다.
우우우웅!
분노한 듯, 혹은 원통해하는 듯, 기이한 흐름을 뿜어내는 진녹색의 보석.
잠시 주인으로 인정했던 마나트가 살해당하면서, 넘치는 심장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와 버렸다.
“아, 일단 챙기고… 빨리 가시지요.”
노달은 천마가 들어 보이는 아이템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챙겨 넣으라고 손짓했다.
척 봐도 뭔가 대단한 물건 같긴 했지만, 지금은 사실 한시가 급했다.
몬스터의 침입으로 발칵 뒤집어진 홍매학관이 정신을 차리고 추적대를 보내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마를 보는 그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어렸다.
‘아직은 아니다.’
천마의 비전 제자. 이제 겨우 극마의 끝에 올라선 본 교 최고의 유망주.
그는 아직 성장세가 끝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더욱 아끼고 모셔야 한다.
이분이 이대로 성장한다면,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지금은 보고도 이를 갈며 물러서야 하는 쿠아토. 본 교의 숙적도 처치해 줄 수 있는 인물이기에.
‘천마시여… 부디 본 교에 가호를 내려 주소서…….’
노달이 속으로 그리 간절하게 기원하는 사이.
“우엣취! 푸엣취! 으아악! 왜 이렇게 간지러?!!!”
그 기도의 대상인 천마는 재채기를 하며 귀를 후벼 팠다.
* * *
“…이런.”
한편.
쿠아토를 상대하던 교두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분명 눈알이 터지고, 머리의 삼분지 일이 날아가는 상처를 입은 쿠아토. 명백히 치명상을 입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놈은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차라리 회복이 아닌 재생에 가까웠다.
“클클클클…….”
어느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크가 아니라 재생의 대명사인 트롤처럼.
“…제운비.”
“그래.”
뇌천벽의 말을 들은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공.
그것도 전력으로 맞부딪치자는 신호다.
쩌이이잉. 지이잉!
사전에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검강과 도강을 생성해 낸, 제운비와 뇌천벽.
“흥!”
그 모습에 쿠아토의 눈빛이 변했다.
상대의 공격 신호를 가만히 넋 놓고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바박. 바바바박. 바바바바박.
걸을 때마다 땅이 진동하는 듯한 충격을 보이며 움직이는 쿠아토.
놈의 두 눈이 일순간 사시처럼 벌어졌다.
좌우로 갈라진 뇌천벽과 제운비가 경공술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하앗!”
“하아앗”
쿠아토를 중심으로 좌우 공중으로 도약한, 두 교두는 한 지점에서 강기를 뿌렸다.
쐐애애액!
빠른 경공술에 이은, 기습적인 공격.
일견 쿠아토의 반응은 늦은 것처럼 보였으나.
쿠우우우웁.
하늘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욱!
쿠아토에게 쏟아지던 검강이, 갑자기 휘어졌다.
“…뭣?!”
뇌천벽은 경악했다.
검강.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파멸적인 힘. 그 최고의 공격이 쿠아토가 쏘아낸 폭식의 힘으로 인해 일그러진 것이다.
그로 인해 쿠아토를 스치지도 못하고 좌우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콰콰콰카콰콱!
“검강을? 마, 말도 안 되는…….”
당혹감과 놀라움. 짧은 순간 경악으로 굳어 버린 그 틈을 쿠아토는 놓치지 않았다.
스윽!
또 한 번의 도약. 거대한 체구가 무색하게도, 바람처럼 뇌천벽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놈이 아가리를 벌렸다.
쩌어억!
“이… 런……!”
뇌천벽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검강이 빗나가든 어쨌든,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로 멈칫하다니.
이건 곧장 죽음으로 직결될 만한 실태였다.
“쿠오오오오-.”
눈앞에서 폭식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일순간 찾아드는 마비, 그리고 거부할 수 없이 빨려드는 내기. 쿠아토의 어마어마한 흡입력에 뇌천벽의 몸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그런 그때.
“페럴라이즈(Paralyes)!”
바바박!
홍매학관의 마법학 교두, 지민이 쿠아토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퍼어억!
하지만 그건 삽시간에 깨졌다.
지금 급하게 펼쳐 낸 마비의 마법은 고작해야 5서클.
쿠아토의 마법 저항력이 지민 교두의 마법을 단번에 뿌리쳐 낸 것이다.
“이놈!”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이 뇌천벽을 구했다.
천무학관의 또 다른 교두. 제운비가 무리해서 연거푸 검강을 날린 것이다.
츠측.
쿠아토는 사라졌다.
이형환위를 연상케 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지면에 나타난 것이다.
“크으으으.”
철퍽. 철퍽.
다만, 완벽하게 피해 내지 못했던 걸까.
놈의 어깨가 반절 정도 뜯겨 나가고 진한 피가 펑펑 흘러내렸다.
“신세를 졌다.”
“인사는 나중에 하지.”
짧게 대화를 나눈 뇌천벽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체력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애초에 뇌천벽은 제운비보다 내공이 부족했다.
그런데 방금 쿠아토의 폭식에 직격당했으니, 내력과 체력, 심지어 심력까지 어마어마하게 손실을 입은 것이다.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음…….”
제운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쿠아토처럼 이능이 있는 녀석과는 싸움을 길게 끌면 안 된다.
기회를 잡았을 때 바로 끝내지 않으면, 체력 면에서 밀리게 되어 있다.
보통 화경의 고수들이 당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강기라는 절대 무학을 쓸 수 있지만, 몬스터들의 기지나 권능으로 그걸 몇 번만 막게 되면.
나중에 먼저 체력이 한계를 드러내고, 그럼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
“지쳤나 보군.”
그리고 쿠아토는 그런 네임드 몬스터.
이런 때의 인간들의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파파팟.
회복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달려가는 쿠아토.
타닥!
이전처럼 뇌천벽과 제운비가 양쪽으로 갈라지자.
휙.
놈은 제운비를 바라보는 척하다가 즉각 몸을 돌렸다.
목표는 뇌천벽. 도강을 뽑아내다 비틀거리는 그를 노린 것이다.
“뇌천벽!”
제운비는 경악했다.
지금 상황은 천극태 때와 똑같았다. 상처 입고 약해진 자를 노리는 오크. 지독할 정도의 사냥 본능.
체장 5미터의 거대한 오크. 쿠아토가 아가리를 벌리고 덮쳐 오는 모습에, 뇌천벽의 몸이 경직되었다.
“으아아아!”
하지만 뇌천벽은 천극태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닌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쿠아토가 자신을 노릴 거라고 예상했다.
지이잉!
미리 전력을 다해 검에 불어넣은 도강을,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펼쳐 냈다.
차아아악!
“쿠오오오오!”
경직. 그리고 빨려드는 자신의 몸.
뇌천벽은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공격. 분명히 몸은 놈의 권능에 경직이 되었지만, 시퍼런 섬망을 품은 그의 칼날은 쿠아토의 입을 향하고 있었으니.
“하아압!”
쩌어어어엉!
네임드 몬스터의 이능과, 인간의 기예가 부딪혔다.
검강이 지닌 극한의 파괴력은, 쿠아토의 아가리에 쑤셔 박히며 혀를 찢고 뇌를 터뜨렸다.
쿠어어어어!
쿠아토가 비명을 지르며 몸이 무너졌다.
“커억…….”
하지만 뇌천벽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짧은 사이 쿠아토의 이빨이 그의 몸을 찢어발겼다. 다행히 심장 쪽까지 침투하지 않았지만, 중상에 해당하는 피해였다.
“죽---어라!”
바닥에 널브러진 쿠아토의 사체를 향해 제운비가 달려들었다. 이미 죽은 놈의 몸을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 할 셈이었다.
그런데.
번쩍.
뇌수가 터진 쿠아토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대로 입을 벌렸다.
쫘아아악!
“…억?”
분명 죽었다고 방심한 제운비의 몸이 경직되었고, 그대로 쿠아토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어 블래스트(Air blast)!”
그때 지민이 다시금 기지를 발휘했다.
압축된 공기 폭발. 그녀는 피부의 마법 저항을 모두 잃은 쿠아토의 상처에 정통으로 마법을 직격시켰다.
쩌어어엉!
쿠아토의 머리가 터져 나갔고, 다시금 자유를 찾은 제운비.
스겅! 스겅!
그가 검강을 다시 날렸고 뇌천벽이 동시에 도강을 날렸다. 파괴의 힘이 중첩되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우우우우…….
“…이런 미친.”
그리고 교두들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검강이 폭발한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뇌수가 터지고, 얼굴이 반쯤 반파되었음에도.
쿠아토는 땅을 파먹으며 다시금 이탈한 것이다.
그것도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