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다시 돌아가는 학관 (1)
어두운 밤.
천마는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시진째 가부좌를 튼 자세로 내공을 운기하며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5갑자. 이 정도면 탈마에 오르는 기본 조건으로는 충분해.’
네크로맨서였던 청명 진인과 카르삭, 그리고 오거를 때려잡으면서 내공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깨달음을 동반했을 때는 급격한 성장이 있었다.
그로 인해 탈마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 더 큰 깨달음이 필요하다. 극마와 탈마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
극마에 오르기만 해도 절대무학이라는 강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
그 외에도 천마군림보로 수많은 환영을 실체와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었고, 원한다면 하늘을 날 수 있는 허공비행도 가능했다.
누가 보아도, 이미 경천동지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탈마는 격이 다르다.
적을 상대할 때의 움직임이 빨라지거나, 힘이 더욱 강해지거나 하는 현상은 그다지 없다.
굳이 찾는다면 극강기 너머 신의 무학이라는 탈강기를 쓸 수 있다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의 우위가 절대적으로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바로 자연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된다는 것.
탈마가 되면 몸이 소유한 갑자의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원한다면 10갑자, 20갑자까지 불릴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내공과 더불어 한 가지 더 나아지는 것이, 바로 신체의 통제다.
몸 또한 자연의 일부이니, 그 몸을 완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호흡하는 흐름을 십 분지 일로 쪼갤 수 있고, 또한 본신의 능력을 몇 배나 더 강력하게 발휘할 수도 있다.
자연의 일부인 나를, 완전히 제어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스슥.
천마의 몸속에 마기와는 다른 기이한 기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 시진 정도 운기하면서 생겨난 현상.
이 기운은 기운이되,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게 모이기를 천마는 기다리고 있었다.
‘한바탕 붙어 볼까?’
페이탈리스트.
스스로를 세상 모든 그림자와 혼돈의 근원이라 말할 정도로 오만함을 드러낸 자.
놈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자신의 정신을 다른 이계로 이동시켰고, 거기서도 어둠의 힘으로 자신을 종속시키려고 했었다.
‘어차피 그놈은 극마의 수준일 터.’
천마는 냉정하게 능력을 분석했다.
페이탈리스트의 힘은 두렵고 공포적인 것에 있다.
어떤 영적인 대상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 자신을 따르게 만든다.
심리적인 거리와 사고의 경계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순수 그에게 내재된 힘만으로 귀속된 존재와 똑같은 상대를 창조하는 것.
이 정도면 단순히 영적인 힘이라 평가절하 할 수도 없다.
천마, 그 자신을 똑같은 형태로 구현해 낼 수 있다는 건, 마법이든 정령술이든 그 역시 극마에 속한다고 봐야 했다.
‘싸움은 될 것이다. 다만, 이번에도 밀리기라도 하면…….’
천마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극마의 벽에 다다른 천마는 예전과 달리 싸움은 비등할 것으로 예상되나, 그렇다고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의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이전과 달리 영혼이 분리되는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천마는 결국 다음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겨 두었다.
다만,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림자를 감지하는 능력이 대체 어떤 걸까?’
몬스터들과도 인연이 있어 보이는 이 녀석의 능력이 괜히 궁금해졌다.
그림자, 어둠을 감지하는 것.
그리고 광기를 불러일으켜, 정신을 뒤흔드는 것을 보면 보통의 정령과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만약의 가정이지만 녀석의 힘을 가질 수 있다면?
흑마법이나, 어둠의 마법에 종속된 모든 이들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마치 혈교의 주문처럼 누군가를 종속시키는 것이라면…….
터벅터벅.
때마침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마는 몸속 기운을 모두 거두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척 보기에도 연약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저기…….”
“소진이구만.”
천마가 담담히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모습이 소진에겐 매우 압도적으로 커 보였다.
그는 하루 종일 주눅 든 상태였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곳과 연이 닿은 자.
바로 눈앞에 선, 이한의 모습을 한 자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네가 아니었구나.”
소진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봤던 어색한 말투와 반응들.
그동안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던 능력.
결과적으로 겉모습만 이한일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뭐, 보다시피.”
천마는 소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소진이 용기 내어 물었다.
“이한은 어떻게 된 거야?”
“죽었어.”
“…아!”
소진의 눈이 커졌다.
설마설마했던 짐작이 맞아 버린 것이다.
이한이 죽었다. 딱히 친분도 없고,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급생이 죽었다.
그 사실에 망연해 있던 소진은, 곧 의심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서. 설마…….”
“아니, 내가 아니라 다른 놈. 제 부모를 죽인 원수였지.”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소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나는 몸이 필요했고, 녀석은 복수가 필요했지. 그래서 우리의 거래는 성립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었으면 녀석은 죽었을 테니까.”
“…….”
소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이한, 아니, 천마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지금 눈앞의 이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뿐.
“그럼 넌 대체 누구야?”
그래서 물었다. 소진은 상단의 후계자였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소진은 이제까지의 이한에 대한 지식이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평소였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소진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한의 몸을 하고 있는 존재는, 오히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학관에서의 따돌림을 막아 주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강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누구냐라… 흠,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하나 뿐이겠군.”
천마는 소진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보았다.
“지금 이곳의 주인이야.”
“…….”
소진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
대격변의 날, 곤륜파와 함께 사라진 강호 최강의 무력 단체. 분명 역사 속에서 사라져 그 이름만 남은 잔당들이 남은 허접한 사교 무리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소문과 많이 다름을, 소진은 알고 있었다.
당장 지금 들른 이곳 지역은, 일개 사교의 비밀 분타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거목은, 둥치가 부러졌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부러진 상처에서 새 줄기가 돋아, 다시금 생을 얻어 더 크게 자라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본 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 소진, 룬스톤의 쓰임을 알아낸 게 너라면서?”
“…어, 그게… 우연히.”
어쩌다 보니 자신은, 그 거목의 새 줄기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설마하니 룬스톤이라니. 퀴퀴하게 썩어 가는 고서의 글 몇 줄이 이런데 쓰이다니.
삼음절맥의 초월적인 기억력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잊고도 남았을 터였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십니까?”
저도 모르게 소진은 말투를 높였다.
이한은, 아니, 천마는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쪽에 있는 배낭을 집어 들었다,
“어쩌긴 뭘 어째. 학관 가야지. 내일은 수업이잖아?”
“어…….”
이 정도의 단체의 수장이 굳이 학관에 갈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갸웃하는 소진에게.
“야, 그리고 말투가 그게 뭐냐. 이제까지처럼 편하게 해.”
툭툭. 천마가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우리 친우 아니었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작일(昨日: 전날)의 게이트 발견 보고입니다. 하남에서 상급 하나, 그리고 중급 여러 개가 파악되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으로 위치와 규모를 확인했습니다.”
한편, 천무학관 학부장실.
서류가 가득한 탁자 위에 교두 셋과 여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중원 전역에서 일어나는 신생 게이트와 던전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처리는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요?”
“인근의 천섬학관에서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우선은 상급 게이트의 위험 등급을 위력 정찰하고, 여의치 않으면 무림맹에서 병력 지원을 보낸다 합니다.”
“좋아요. 하북은 어떤가요?”
“중급 게이트를 발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파악 중에 있습니다.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서.”
“…하아.”
여인, 리그웨더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학관 연합이 출범한 이래, 중원은 분명 유례없이 강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적 역시 한때 꺾였던 기세를 회복하고, 점차로 영향력을 높여 가고 있었다.
이는 몬스터들이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을 가진 탓도 있겠지만, 대지를 통한 마력의 전달이 점차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하루하루, 144년이, 완전수의 제곱에 달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하나하나 해결하죠. 일단 처음 언급했던 호남 지역은…….”
“학과장님.”
끼익.
간단한 인기척도 없이 구용천이 문을 벌컥 열며 다가왔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그리고 그중 리그웨더의 질문이 가장 빨랐다.
“어떻게 되었나요?”
“제압은 했답니다. 다만 피해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교관 다섯, 조교 열일곱, 학관생의 사망자는 백을 넘고, 무엇보다 수석 교두 천극태가 사망했습니다.”
“이런.”
옆에 있던 교두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홍매학관 사건은 모두가 보고받은 상황이다.
갑자기 네임드 몬스터 쿠아토를 위시한 병력들이 대규모로 이동했고, 학관의 본진으로 침입했다고.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홍매학관의 공식 전력은, 화경의 교두가 무려 여섯. 그중 대마법사라 불리는 이들 역시 3명이나 되었다.
때문에 제아무리 쿠아토가 기습을 하더라도 충분히 섬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째서 그렇게 피해가 컸던 거죠?”
“그게…….”
구용천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기습도 기습이지만, 쿠아토는 오거들을 대량으로 풀어 학관생들을 먼저 노렸습니다. 그사이 교두들이 학관생들에게 몰렸고, 그는 또다시 흩어진 무인들을 노렸습니다.”
“흐음…….”
리그웨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쿠아토가 머리를 잘 썼던 모양이다. 교두들을 상대로 전면으로 싸운다면 패배할 거란 걸 알고, 단단한 방벽보다 여린 살을 노렸다.
그렇다면 이런 피해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왜 쿠아토가 학관에 직접 쳐들어간 걸까요?”
교두 한 명이 의아한 점을 지적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보통이 아니었다.
와이번과 함께 움직인 일천에 가까운 오크들과 트롤들의 저돌 맹진.
그 자체로도 굉장한 군세인데, 그걸 버림 패로 던져 주고, 홍매학관을 직접 쳐들어갔다니.
아무리 오크가 아군의 손실을 아끼지 않는 종족이라 해도 이는 지나칠 정도였다.
“혹시… 매령지관을 노렸나요?”
갑자기 리그웨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맞습니다. 놈들은 오거들을 풀어 본관의 방비를 흩뜨리고 교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 다음, 매령지관을 노렸습니다.”
그에 구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과, 매령지관이 돌파되고 홍매학관에서 연구 중이던 아이템 수십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리그웨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 일만큼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넘치는 심장. 오크들의 고유 아티팩트.
이는 그린스킨이 대대적인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 아닌가.
평시에는 오크들의 번식력을 강화시키고, 전시에는 그들의 힘을 증대시켜 전투력과 결속력까지 다진다.
“그래서 쿠아토는?”
“살아 나갔습니다. 안타깝게도.”
“…….”
최악이 상황이 일어났다.
그린스킨이 넘치는 심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앞으로 놈들이 실질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겠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 홍매학관 인근에서 마나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
걱정으로 잔뜩 굳어져 있던 리그웨더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오크로드 마나트. 쿠아토의 지낭으로, 단일 전투력은 그저 평범하지만 지략에 능한 부족장 하나가 전사했다는 것.
“그나마 홍매학관이 이름값을 하긴 했군요.”
“아닙니다. 홍매학관 교두들은 오히려 저희에게 물어 왔습니다. 자신들이 올린 전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네?”
안도하려는 순간, 또 한 번의 혼란이 몰려왔다.
홍매학관 인근에서 마나트가 전사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놈을 격살한 것은 홍매학관의 고수이지 않은가.
“당시 홍매학관은 가용 가능한 화경 고수 모두를 쿠아토와 놈의 친위 오거들에게 배당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천무학관이 제3의 고수를 따로 보낸 것이 아니냐고…….”
“…….”
구용천이 말을 마무리하고, 잠시 학부장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뇌천벽과 제운비 교두도 아는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홍매학관 교두들은 우리가 아니라고 하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고 오히려 격하게 의심해 올 정도입니다.”
“흠…….”
좌중에 복잡한 신음이 퍼졌다.
확실히 쿠아토와 오거 8마리라면, 홍매학관이 전력을 투입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마나트는 대체 누가 막았냐는 의문이 당연히 드는 법.
평범하다곤 알려졌지만, 그건 그가 권능을 펼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오크로드의 기본적인 권능, 그리고 쿠아토에게 권능을 전이받았다면 가히 초절정을 밟아 버리는 수준이라 짐작된다.
최소 화경 고수 두 명 이상이 달려들어야 제압 가능한 오크로드를, 어디서 나타난 누가 살해했을까?
벌떡.
“이번 일은 여러분이 직접 알아보세요. 저는 잠시 들러 봐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리그웨더는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한쪽에 걸쳐진 로브를 천천히 둘러썼다.
“어딜 가십니까?”
“섬서에 가려고요.”
“…거긴?”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직접 뵐 분이 있어요. 어쩌면, 점점 불리해지는 이 판도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인물이죠.”
“그게 무슨…….”
교두들은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말하지 않고 작게 미소 지으며, 간단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일순.
핏.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