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다시 돌아가는 학관 (2)
소진은 그길로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아직 외인인 그에게, 천마신교의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룻밤이 지난 뒤, 거처로 돌아온 천마는 잠시 노달과 흑객을 불렀다.
아무래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으음…….”
노달은 의자에 앉아 뭔가를 집어 들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 6장으로 되어 있는 긴 원문.
그리고 그 밑에 적어 놓은 답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지를 보기 위해, 그는 매우 집중했다.
사박. 사박.
그렇게 한 장, 한 장씩 원문을 넘겨 가던 그는 어느새 마지막 장을 남겨 두었다.
이내 모든 답을 확인한 그는 다시 앞장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실수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놓친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는 것.
그는 이제껏 어떤 무공이든 연구든 이렇게 꼼꼼하고 세밀하게 접근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극마에 오르는 데에도 바로 그 점이 크게 작용했다.
“예상대로군요.”
그렇게 그는 천마가 건네준 문제집 분석을 마무리했다.
꽤나 제법이다.
별것 아닌 문제도 많지만, 제법 난해한 문제가 두세 개가 있었다.
꼭 이런 문제에는 소위 ‘함정’이라는 구간이 존재한다. 뭐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넘어지겠지만, 자신은 누군가.
이미 환갑을 넘게 살며 세상의 수많은 경험과 경륜이 있지 않은가.
“어떤가?”
천마의 질문에 노달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만점이지요?”
“…….”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천마는 그때의 반응처럼 침묵했고, 그를 빤히보던 노달의 표정은 점차 굳어졌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더니 그는 급히 문제지를 다시 펼치며 말했다.
“어제 잠을 좀 설쳤나… 놓친 문제가 하나 있나 봅니다.”
그러고는 다시금 사박사박, 한 자, 한 자씩 집중했고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6번 문제 하나가 틀린 거겠지요?”
“…너도 그렇냐?”
“예? 무슨…….”
노달은 ‘무협학’이라고 적힌 문제지를 들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분명 완벽한 정답이었고, 천마 제자의 반응에 혹여나 하나 슬쩍 빼 봤는데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그거, 다 틀렸어.”
“그럴 리가요, 허허허. 농담도 잘하십니다. 뭐 하나 빈틈없이 완벽한 논리 구성의 답인데…….”
“다 틀렸다니까. 이 녀석아!”
“…헙!”
어이없이 바라보는 노달.
그리고 그의 의문 섞인 표정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흑객에게로 향했다.
“저도 만점인 줄 알았습니다.”
“…허!”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노달.
천무학관이 문제를 내줬고, 천마 제자께서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누가 봐도 맞는 답을 거짓으로 해 가면서 말이다.
황당, 당황, 난감으로 이어져 가던 감정선은 이내 점점 극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분노와 응징, 파멸이라는 감정이 저변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시 그런 건가. 학관 정종 무공을 쓰는 이 개새끼들은…….”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학의를 입고 있는 천마를 향해 물었다.
“누구입니까?”
“무슨 말이야?”
“무협학 교두 이름이 뭔지 말입니다. 제가 기회를 봐서 모가지를 슥삭…….”
“아서라. 나도 그 생각 안 한 건 아닌데, 의미 없더라.”
천마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대충 면경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홍매학관처럼 학관 한 복판에서 개난장판을 벌이게?”
“아, 그건 제가 조용히…….”
“이제 겨우 본 교가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지 않았나.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
노달이 입을 다물었다. 휴우~ 하고 천마가 허탈한 얼굴로 고개 저었다.
‘그냥 조용히 졸업해야지. 그래야 원 몸 주인한테 면이 설 테니.’
괜히 머쓱해진 노달은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 보니 흑객은 등교를 위해 딱히 학의를 입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안 가느냐?”
“아, 저는 얼마 전에 임무를 하나 완수한 게 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자율학습입니다.”
“…그래?”
3학년까지의 교과과정과 달리, 4학년은 거의가 실전 위주다. 이제껏 배우고 익힌 지식과 무위를 현장에서 직접 쓰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파견 임무를 마치고 난 학관생은 짧게는 사흘, 길게는 한 달까지 임의로 폐관수련을 요청할 수 있다.
현장에서 겪은 깨달음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학관 측에서 배려하는 것이다.
“아니, 너무 방임하는 게 아니냐? 그럼 그냥 농땡이 피우는 놈들이나, 열심히 하는 놈들이나 똑같이 졸업할 게 아니냐.”
“그게 함정이지요. 게으름 피우는 놈들은 알아서 도태됩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실력자뿐입니다. 뭐, 연줄이나 그런 걸로 학관의 교두나 교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놈이 학관생이 다 됐구나.”
제자의 모범적인 답에 노달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전에 듣고 의아했던 부분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 아니냐? 네가 4학년인데 제자님이 2학년? 천무학관 교두가 되셔도 모자랄 판국에……!”
그때였다.
“이 녀석 또 흥분하네. 평생 그 머리로 살래?”
막 열을 올리려는 노달에게 일침을 가하는 천마.
“아, 죄, 죄송합니다…….”
머리라는 말에, 노달이 멈칫하며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손으로 덮었다.
그러는 노달에게 천마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너도 이제쯤 슬슬 느끼고 있을 텐데? 벽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 좀 더 관점을 다양하게 가져라. 토대를 넓히라고. 그래야 높이 세울 수 있으니까.”
“예. 예.”
“극마를 넘어서 탈마가 되면, 운 좋은 놈들은 환골탈태를 한다. 너 그 머리, 다시 풍성하게 길러 보고 싶지 않아?”
“……!”
갑자기 노달의 눈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극마의 벽. 무인으로서 넘기 힘든 극한의 갈림길. 하지만 묘하게도, 지금 그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풍성하게 자라 허리까지 길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이었다!
“가,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노달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눈에는 이글이글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가히 필사적인 기세에 천마는 헛웃음을 짓고 탁탁,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를 걱정해 주는 네 마음은 알겠다만. 기껏 얻은 배움의 기회를 뭐 하러 내버리냐? 나도 요즈음 다시 깨닫는 건데, 아래에서 봐야지만 보이는 것도 있더라.”
“아래에서만 보이는 것……?”
노달이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 넣듯 천마의 말을 따라 했다.
“그래, 보통 말이지, 경지가 높아질수록, 기본을 게을리하는 녀석들이 적지 않아. 하지만 내 경험상, 그런 놈들은 결국 벽을 넘지 못하더라고. 토대가 넓지 못하거든.”
토대(土臺).
탑 같은 높은 건축물을 쌓기 전의 기초다. 기초가 튼튼해야 높고 큰 건물을 세울 수 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뭐, 마음은 이해가 간다. 일가의 정점에 이르려면 모든 것을 하나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니까. 그리고 그렇게 집중하다 보면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지.”
“…….”
“하지만 여러 번, 될 듯 말 듯 한 게 계속해서 여러 번이라면 방법을 바꿔야지. 옛말에 남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배운다는 말이 있지? 그 말이 틀림이 없더라. 아주.”
천마의 말에 노달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천무학관의 수업에서 말씀입니까? 그 구닥다리들이 뭘 할 수…….”
“구닥다리들이니까. 오히려 반면교사가 된다. 내가 저 위치라면, 나라면 어떻게 가르칠까. 어떻게 설명하면 애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진리일수록 단순한 법이야.”
“음…….”
“어중간하게 배운 놈들일수록 설명이 길고 복잡하다. 깊이 깨우친 고수의 말은 듣기에 간단하지.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내용이 깊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알 듯합니다.”
노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류귀종이라,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근원에 다가가는 이의 깨달음은 대동소이하다.
그 무기가 검이든, 권장이든, 혹은 정파의 무예든, 사파나 마교의 무예든, 극한에 이른 이의 시각은 비슷해진다.
“확실히 저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천마님… 의 제자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수련했더니, 이번에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으니까요.”
흑객이 거기에 덧붙였다.
샐러 드레이크에 심지어 바질리스크까지. 놈들을 해치운 이야기를 간략하게 이야기하자 노달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지난번에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견 임무를 나간 덕분에, 사천제일상단이라는 오가장과 친분도 맺었지. 이건 인정해야 한다. 천무학관의 교과과정이 제법 도움이 된다는 걸.”
천마의 말에 노달이 살짝 울컥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건… 본 교가 예전의 반의반만큼의 힘만 있었어도…….”
“노달, 현실을 자각해라. 중요한 건 지금이라고. 옛날에 잘나갔다고 위세 부리다가, 영원히 재기하지 못한 정파가 한둘이었나? 너는 천마신교가 사라져 버린 옛 영광에만 매달리게 할 셈이야?”
“…….”
천마의 잔소리가 늘어났다. 노달은 한참이나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하는 말이니까.”
“…….”
“그나저나 말이다 노달.”
다소 묘한 표정을 짓는 노달에게, 천마가 딴소리를 했다.
“이번에 얻은 소득. 처분을 어떻게 할 거냐?”
“처분… 이요?”
“마정석과 보석, 그리고 금붙이 말이다. 이제껏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곳 분타만이 아니라 본단까지 두루두루 물자가 부족한 것 같던데?”
“그건… 그렇습니다.”
노달이 끄덕였다.
금과 보석, 마정석과 포션 등은 분명히 큰 재산이다.
하지만 당장의 천마신교에는 자라나고 있는 교인들이 먹고 입을 것을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오가장에 한번 가 보는 게 좋겠다. 오가장과 흑객은 서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니, 우리가 저 일에 대해 입을 다물어 주는 이상은 그쪽도 우리를 후하게 대해 줄걸?”
“과연 그렇습니다.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처럼 긴밀한 것도 없지요.”
노달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아냐, 오가장이 추진하고 있는 그리핀 길들이기. 언제고 그들이 그리핀을 대량으로 키워 낼 수만 있다면, 본교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럴 겁니다!”
노달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가득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수많은 그리폰들의 위에 올라타 특유의 피풍의를 입고 창검을 휘두르는 천마신교의 무인들.
길고 오랜 고난을 거쳐, 본 교는 진정으로 부흥의 길을 맞게 된 것이다.
“그간 고생들 많았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고, 그리고 조심해라.”
“다, 다녀오십시오!”
터억!
천마의 다독거림에 노달은 깊이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땅에 대고 주군에 대한 예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