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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33화 (134/310)

133화. 다시 돌아가는 학관 (3)

지평선까지 쭈욱 뻗은 황갈색 땅.

울창한 삼림이 가득한 수해를 지나, 강과 협곡을 지나가면 거대한 탑이 하나 나온다.

청해 성산봉.

전승에 따르면 무수한 도인들이 우화등선하고, 신선들과 영수(靈獸)들, 용과 천병(天兵)들이 살았다는 곤륜파의 성지.

하나 한때 영험했던 땅이 지금은 죽음의 땅처럼 변모해 있었다. 알이 곱던 황토는 질척한 진흙의 뻘이 되었고, 은은한 땅 냄새가 나던 대지는 비릿한 악취를 뿜어냈다.

척. 척. 척.

쿠아토는 질펀한 땅을 밟으며 거대한 어둠의 문을 열었다.

그 뒤를 트롤 주술사 토루스가 따랐다.

투욱.

한참을 걸어가 거대한 성채 중심에 선 쿠아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무껍질로 만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뱀이 또아리를 튼 지팡이를 짚고 있는 이가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오셨군요, 쿠아토 님.”

“그래, 지르케.”

에이션트 트롤, 그랜드 샤먼 지르케.

쿠아토의 옆에 시립한 토루스의 스승이자, 4대 수호장인 아락취의 명령을 전하는 자.

나이 든 트롤의 몸은 살짝 굽어져서 원래 체구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뱀처럼 차디찼고, 입가에는 기분 나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째…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으셨나 봅니다.”

샤먼은 쿠아토에게서 말을 듣기도 전에 단정부터 내렸다.

사실, 척 보기에도 무언가 낭패를 당한 모습이다.

쿠아토의 몸에 아직 남은 깊은 부상의 흔적.

아무리 폭식의 권능을 썼다 한들, 머리가 터져 나간 상처가 하루 이틀 만에 깨끗이 나을 수는 없었다.

이제껏 흡수한 많은 힘들 덕에 천천히 재생이 되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걸 떠나서 항상 쿠아토 옆을 떠나지 않던 오크로드 마나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지르케.”

쿠아토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일천의 오크 트롤 연합을 잃고, 길들인 와이번도 다수를 잃었다.

여기에, 수족보다 귀한 꾀주머니 마나트를 잃었다.

그러고도 작전을 실패했다.

이미 깊은 상처를 입고 있는데, 그걸 들쑤시는 상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저런, 저런. 재미있다니요? 저는 그저 우리 그린스킨의 실패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 안타깝겠지. 그리고 즐겁겠지. 내가 이 꼴이 된 걸 보고 말이다.”

“허어. 그것참. 전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요.”

흘흘흘.

그랜드 샤먼 지르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르륵.”

쿠아토의 눈이 가늘어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전부터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예전의 어느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아토는 쿠아토대로 샤먼은 샤먼대로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비난했다.

“뭐, 오크나 트롤이야 다시 모으면 되지만, 마나트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군요. 전말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네가 나에게 보고를 받을 위치였던가?”

쿠아토가 으르렁거리자 샤먼 지르케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아락취 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전투는 쿠아토 님이, 수습은 제 몫이 되었으니까요.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공사를 혼동하지 마셨으면 합니다만?”

“크륵…….”

쿠아토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억지로 눌렀다.

사이가 좋고 나쁜 것과는 별개로, 샤먼 지르케는 대족장 아락취의 부재 시 그린스킨의 운영을 맡고 있었다.

놈은 분명 기분 나쁜 냉혈동물 같았지만, 그만큼 부족 운영에 대해서는 항상 냉정하고 공정했다.

“일단, 우리는 넘치는 심장을 탈환하려 했다. 홍매학관의 전력을 밖으로 끌어내어 매령지관의 경비를 약하게 만들었지.”

감정을 가라앉힌 쿠아토는, 최초에 마나트가 입안했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마나트는 매령지관의 경비를 뚫고 넘치는 심장을 획득했다. 하지만 얼마 후, 녀석의 생명 반응이 사라졌다.”

“저런, 홍매학관의 대처에 당한 겁니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나는 내 친위 부대인 오거와 함께 홍매학관 교두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나트를 요격할 전력이 있었다면, 나에게 왔어야 했다.”

“…음.”

쿠아토의 이어진 설명을 들은 지르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라면 쿠아토가 실수한 걸 신나게 웃으며 조롱했을 테지만, 지금은 작전참모로서 보고를 받는 상황.

어떤 손실이 발생했고, 무엇이 잘되고 잘못되었는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당신을 상대했던 소드 마스터, 이곳 인간들의 말로 화경급 고수가 몇이 있던가요?”

“넷이었다. 그중 하나를 물어뜯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원래 예상은 둘에서 셋 아니었습니까?”

“둘이었다. 한데 예상 못 한 소드 마스터가 더 개입했다. 아마 인근의 천무학관에서 손을 보탠 것으로 보인다.”

“…그게 마나트의 오산이었군요. 하여튼. 제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놈들의 결말이지요.”

빠직.

쿠아토의 이가 갈렸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충성스러운 부하. 그의 죽음을 모욕하다니.

그는 단숨에 지르케의 목줄을 죄고 모가지를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럼에도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우우웅.

지르케의 주위로 검은 뱀 같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쿠아토가 살기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반응한 것이다.

‘몸만 정상이라면 제대로 싸울 수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성채 안에서 같은 그린스킨끼리 싸우는 건 금지다.

대족장이 선포한 영역 안에서 그린스킨끼리 사적인 감정으로 싸우는 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토루스.”

이글이글 불타는 쿠아토의 눈을 외면하고, 그랜드 샤먼이 주술사에게 물었다.

“예, 스승님.”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토루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제3의 인물들이 나타나서 개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3의 인물? 이유는?”

“쿠아토 님의 위력 시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홍매학관 소속의 교두라면, 목표를 탈취하고 이탈하는 마나트가 아니라 학관생들을 도살하는 쿠아토 님에게 몰렸을 겁니다. 인간들은 제자니 스승이니 하는 것들을 끔찍이 아끼니까요.”

토루스의 말에 지르케는 잠시 생각하다가 끄덕였다.

“일리 있다. 그럼 마나트를 요격한 자는 천무학관 소속인가?”

“그게 또, 그렇게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소드 마스터는 큰 전력. 천무학관이 그런 인력을 홍매학관을 지원하러 둘이나 보낸 것부터가 예상 못 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둘을 보냈다면 셋을 보낼 수도 있을텐데.”

지르케가 갸웃하자 토루스가 고개 저었다.

“그랬다면 아까와 같은 이유로, 쿠아토 님에게 몰렸을 겁니다. 넷이나 되는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쿠아토 님은 결국 그중 하나를 격살하셨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입장에선 큰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그린스킨도 오크로드를 잃었다만.”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마나트가 신체보다 지혜에 더 강한 오크로드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 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 셋 이상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토루스는 거기서 고개를 살짝 돌려서 쿠아토를 보았다.

“차라리 그들을 모두 모아 쿠아토 님을 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이익입니다. 외람되오나, 아무리 쿠아토 님이라도 소드 마스터 일곱을 상대로는 무사하기 어려울 테니.”

“크음…….”

쿠아토가 신음하고, 지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합당한 생각이다.”

그가 인간이라도 그리 생각할 법한 일이었다.

고작해야 오크로드 하나를 처치하기 위해 전력을 분산하는 것보다, 폭식이라는 위명을 떨친 쿠아토를 그 자리에서 격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할 터.

샤먼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팔각형으로 튀어 오른 유리지붕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쿠아토 군장(Overlord), 마나트가 넘치는 심장을 확보하고 이탈한 것은 확실합니까?”

“확실하다. 예정된 신호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살아 있었다.”

쿠아토가 대답했다. 지르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신중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군요. 그럼… 그 제3의 세력은, 최소 소드 마스터 3명, 혹은 네 명으로 보아야겠습니다.”

“……? 그 이유는?”

“넘치는 심장.”

따악.

지르케는 손가락을 튕겨 보였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트롤 하나가 날렵하게 달려왔다.

“마나트의 이빨을.”

“넵.”

타다닥.

트롤이 달려가자, 쿠아토가 이빨을 드러내고 맹렬하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뭘 할 생각인가. 마나트의 성인치로 주술을 쓸 생각인가?”

성인치.

오크는 일정 이상으로 성장하면, 양쪽의 어금니가 크게 솟는다. 그리고 그 이빨을 스스로 뽑아 그린스킨과 족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다.

당연히 숭고한 의식이고, 그렇게 뽑힌 성인치는 순서대로 그린스킨들의 ‘조상의 동굴’에 안치된다. 인간으로 따지면 위패 같은 것이다.

“그린스킨이 그린스킨의 사체로 주술을 거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내 수하를 모욕할 셈인가! 지르케!”

“마나트를 모욕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쿠아토. 그는 개죽음을 당했다.”

“뭐라-!”

“넘치는 심장을 잊고 있군. 쿠아토.”

우뚝!

벌떡 일어나 참지 못하고 손을 쓰려던 쿠아토가 손을 멈췄다.

그런 그를 보고 지르케가 끄덕였다.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마나트가 지혜롭고 용맹한 전사였다는 것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넘치는 심장을 가지고 이탈하던 마나트는 홍매학관도 천무학관도 아닌, 제3의 누군가와 조우했고, 싸우다 죽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타다닥.

달려갔던 트롤이 한 쌍의 굵직한 어금니를 가져와 내밀었다. 지르케는 그 이빨들을 손에 올리고 쿠아토를 보며 물었다.

“항거할 수 없는, 이길 수 없는 적이다. 마나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넘치는 심장을 사용했을까? 안 했을까?”

“…….”

“당연히 했겠지. 그는 지혜로운 전사이고 사리 분별이 뛰어나다. 넘치는 심장은 마나트 정도의 전사라면 당연히 주인으로 인정했을 거고, 그는 분명 권능을 얻었겠지. 쿠아토, 당신처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

“표정을 보니 안 것 같군. 그래, 권능을 각성한 마나트는 최소 두 배 이상 강해졌을 테지. 그런데도 죽었다. 그리고 넘치는 심장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최소 소드 마스터 넷…….”

쿠아토가 신음했다. 지르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위-대하신 폭식, 오버로드 쿠아토께서는 친애하는 부하를 죽인 놈들의 정체도, 위치도 파악 못 하고 계시고 말이지.”

“크… 윽!”

빠드드득!

쿠아토의 입안에서 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르케는 그런 그를 냉랭하게 바라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빠지직! 까드득.

마나트의 성인치. 그가 살아생전 남긴 신체의 일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후우욱.

지르케는 그 가루에 숨을 불어넣고 음울하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솨아아악.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곧, 뚜렷하게 허공에 뭉쳐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쿠아토와 토루스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마나트가 성인치가 그가 흘린 피를 따라갈 겁니다. 그 인도를 따르면 마나트를 살해한 자도 찾을 수 있겠지요.”

“…….”

“쿠아토, 이번 일은 대족장께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소식도 아니고, 만회할 기회도 있으니. 다만, 기회는 한 번 뿐입니다.”

“……!”

쿠아토의 눈빛이 변했다.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마나트의 복수.

지르케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요란하게 가슴을 두드리고 일어섰다.

“기회, 고맙게 받지.”

“딱히 고마워할 것 없소. 나는 그저 개죽음당한 전사. 마나트를 위령할 뿐이니.”

“네놈……!”

개죽음이라는 말에 쿠아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에게 지르케는 음울하게 속삭였다.

“마나트가 넘치는 심장을 사용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소?”

“……?”

“당신의 충복,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그라면 아마 분명 결심했을 거요. 일단 위기를 돌파한다. 그리고 귀속 반응을 일으킨 넘치는 심장을 주인께, 오버로드 쿠아토께 다시 바친다. 즉.”

쿠아토의 얼굴이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할 각오였던 거요. 그리고 그런 충성스러운 전사가 허망하게 죽고 만 거지.”

지르케는 냉랭하게 쿠아토를 보았다. 새카만 뱀 같은 냉혹한 눈동자는, 비릿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다 당신의 실수, 생각 부족이오. 이러니 개죽음이 아니고 뭐라 하겠소?”

“으… 으…….”

쿠아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분노가, 다음에는 자괴가, 그리고 더 큰 분노로 온몸에 지글지글 불길이 일어났다.

-쿠오오오오!

벽력같은 포효와 함께 폭식이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지르케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한 가지, 쿠아토에게 숨기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성인치를 바스러뜨리는 순간, 그는 마나트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로 방대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만약 만의 하나, 넘치는 심장이 그 모든 잠재력을 개화시켜서 엄청난 힘을 주었다면.

그러고도 마나트가 허망하게 살해당했다면, 상대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겠지.”

현경의 고수, 쿠아토가 한때 마주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한 전력.

대족장 아락취가 절대 상대하지 말라고 명령한 최강의 인간.

하지만 설령 상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도, 지금의 쿠아토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죽기 살기로, 아니, 같이 죽자고 덤벼들 것이고.

그 결과.

“혈기만 앞서는 놈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더 어울리지. 바로 나처럼.”

그린스킨의 대족장, 아락취를 보좌하는 오른팔은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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