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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35화 (136/310)

135화. 다시 돌아가는 학관 (5)

학관생들의 시선은 마지막 문제지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쉬운 무협학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낮았던 문제.

바로 이것이었다.

12. 곤궁에 처한 가난한 마을을 지나가다 굶주려서 쓰러진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금 한 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확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돈으로 반드시 노인을 도와줘야 한다거나, 아니면 뭘 하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금 한 냥이라는 돈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그 해결하는 방안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생각하고 기술하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학관까지 들어올 정도의 소양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해결 방안을 생각해 낼 머리는 가지고 있었다.

답은 수십 가지였지만, 어쨌든 채점관들은 그 답을 다 정답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껏 무협학 시험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정론이 있는 과목의 특성상 다들 공감하는 얘기였고, 특히 정파의 성격이 강한 천무학관은 이런 주제에 대하여 뚜렷한 주의와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러던 그때.

천마가 입을 열자,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뭐냐?”

“왜 도와줘야 합니까?”

“…무슨 소리냐?”

미간을 찌푸린 지공대사.

하지만 천마는 조금 더 명료하게 말을 이었다.

“굶주려서 쓰러져 있는 노인을 왜 도와줘야 합니까?”

“…허.”

지공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앞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고,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돕는다.

이는 금수가 아닌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기반한 것이 아니던가.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의 탑을 쌓는 것보다 더한 덕을 쌓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하지 않느냐?”

“좋습니다. 그건 그렇다고 하지요. 그런데 정 도와준다면 밥 한 끼 해결하는 데 그쳐야지요. 금 한 냥이란 거금을 왜 주어야 합니까?”

천마가 다시 물었다.

“호오.”

지공대사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너는 그 금자 한 냥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더냐?”

금자 한 냥은 은자 열 냥에 달한다.

그리고 은자 한 냥이면, 한 가정 서너 식구의 한 달 식비에 달한다.

즉 금자 한 냥이면 그 노인의 열 달, 혹은 1-2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것이다.

“금자를 은자로 바꾸어서 은자 한 냥만 써도, 그 노인이 기력을 회복할 식료와 며칠 간 몸을 정양할 자리를 마련할 수 있지. 그런데 왜 금자 한 냥을 다 주어야 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렷다?”

“…….”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가 짚고 싶은 쪽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그 또한 덕을 쌓기 위함이다. 자신에겐 금 한 냥에 불과할 줄 모르나, 그에겐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생명과도 같으니까.”

하지만 지공대사는 천마의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어찌합니까?”

천마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상대가 굶주린 노인인 척하는 살수였다면, 이쪽은 황천길로 갈 겁니다.”

“…커흠커흠.”

지공대사의 얼굴이 굳었다.

수군수군.

반 안에서는 서로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일었다.

확실히, 천마의 생각대로 보자면 이건 이것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방금 네 말은 예가 너무 극단적이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선행에 대한 감사함을 당연시하고, 혹은 받는 자가 만족하지 못했을 경우 선의를 베푼다고 해서 선의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천마가 말을 조금 돌려서 말했다.

“실리를 말하는 것이냐? 방향이 맞지 않다. 선행은 이익을 고려하지 않기에 선행인 것이다. 내가 베푼 것이 내 의도와 다르게 돌아온다 해도 개의치 않는 것.”

지공대사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눈앞의 학관생은 12번 문제를 틀린 거로 보인다.

그러니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겠지.

하나, 그런 행동은 자신에겐 가소로운 반박일 뿐이었다.

무협학이 학관생들에게는 쉬워 보인다고 한들, 수많은 성찰과 학습에서 비롯된 학문이다.

그 학문에 평생을 바친 자의 소신을, 고작 일개 학관생이 반박해 봤자 얼마나 가겠는가.

그런데 이 정도 했음에도 눈앞의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교두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겠군요.”

천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지독한 악인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해를 끼치고, 그래서 도망치다가 기력을 잃고 쓰러진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 해도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는 말입니까?”

“…….”

집요하게 논제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학관생.

수군수군!

다시금 학급 안에서 요란한 소곤거림이 이어졌다.

“네 말은… 나름 일침을 가하는 것이지만 허점이 있구나. 그래, 악인에게 베푸는 것을 가지고 덕을 쌓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면 일단 그를 살리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 있겠지.”

지공대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칼을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다는 말이 있다. 악인이라면, 그 악인을 계도하여 선인으로 만드는 것이 지극의 선이고 도이니라.”

이는 불경에서 가르치는 정론이었다. 그 말을 들은 천마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겠군요.”

“…무슨 말이냐?”

“선한 이들에게 갈 베풂이 줄어드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

지공대사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가정법에 이리저리 말하다 보니 뭔가 말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했던 자신의 말을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지공대사는 이제 좌석표를 보고 학관생의 이름을 확인한 후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학관생 이한, 이건 선과 악을 구분하려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선의는, 의생의 도와 같아서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도 구분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그 선의가 누군가를 죽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분수에 맞지 않은 큰돈은 화를 부르니까요. 악인이라면 더욱이.”

곧장 천마가 말을 받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금 한 냥이라고 해도, 노인에게는 아주 큰 돈.

혹여 악인이라면 그 돈을 옳은 일에는 쓰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이…….”

지공대사의 눈에 노여움이 점점 몰려올 때쯤.

“결론은 났군요.”

천마는 이 상황을 마무리를 지었다.

“도와주는 게 꼭 답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 * *

뻑뻑뻑.

노달은 열심히 빨래 중이었다.

요 며칠 동안 거처를 비웠으니, 당연히 씻어야 할 옷감이 많았다.

펑! 펑!

땟국을 지워 내고, 물기를 털어 내고, 마무리를 지은 빨래를 길게 널은 줄에 내걸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색색 가지의 옷들이 바람에 나부껴 말라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당히 일을 끝마쳤을 때쯤.

“끝났구나.”

의자에 앉으며 머리의 땀을 닦아 냈다.

이런 노동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수하들이 자발적으로 빨래를 해 왔다. 그러다 자신이 직접 해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새삼 아래에서 일하는 수하들의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흑객이 뭐 하는지 볼까 싶어 슬쩍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운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노달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본래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응?”

그러다 언뜻 밝아지는 한 옷가지.

살펴보니, 그건 천마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왜 갑자기 빛이 나지?”

수정처럼 앞에 튀어나온 해골 모양의 구슬이 반딧불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특이한 현상에 노달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뭐, 설마 뭔 일이야 나겠는가.”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던 중, 방을 나온 흑객과 조우했다.

“헉? 사부님, 이게 다…….”

흑객은 눈앞에 빨래한 옷감들이 내걸린 장면을 목도하고 놀라 물었다.

“응. 내 열심히 해 봤다. 제자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 담당은 빨래라고.”

“그건 그렇지만…….”

“흑객아.”

“…예, 사부.”

“그 녀석은 발작하지 않느냐?”

“…아.”

흑객은 직감적으로 노달의 물음이 무언지 깨달았다.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그래, 그 녀석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그저 장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체화되려면, 네 경지가 몇 단계는 더 올라야 한다. 자칫 무리해서 쓰려다간, 놈이 너를 잡아먹으려 들 것이니라.”

“무, 물론입니다.”

흑객은 어물어물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뱀파이어의 이빨을 이미 썼었고, 녀석이 자신을 한때 잡아먹었었다는 얘길 할까 고민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천마의 진체와 관계되는 이야기였다.

‘뭐, 나중에 기회가 되겠지.’

일단 천마에게 그 자신이 드러나는 일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들은 만큼, 이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저놈은 왜 깜빡이는지, 원.”

“뭐가 말입니까?”

“저기 저 아이템 말이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빛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더구나.”

“아…….”

흑객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진한 녹색의 보석. 때때로 검게 색이 변했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보석.

“혹시 말입니다.”

“…혹시 뭐?”

“신호를 주는 게 아닐까요?”

“신호라면?”

흑객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뭐, 자신이 있다라고 알리는… 그런.”

“이게 무슨 신물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고작해야 아이템인데.”

노달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변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제자께서는 언제 오신다더냐?”

뭔가 모를 불안감을 감지한 것이다.

* * *

수업이 끝난 뒤 반 학관생들이 천마에게 몰려들었다.

지공대사가 시뻘건 얼굴로 뭐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놀랐어.”

“그게 그런 식으로도 되는구나.”

무척이나 놀라워하는 학관생들의 반응을.

“뭐, 그게 위선이지.”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이 문제의 답에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사실,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답이라고 정해진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합의한 것.

하지만 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론이 있고, 해답은 있지만, 정해진 정답은 없다.

수업은 계속 흘러갔다.

그렇게 4교시까지 끝날 때쯤.

“저기…….”

천마를 향해 한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운소령이?”

“…진짜네?”

좌중의 시선이 다시금 천마에게 쏠렸다.

웬만해선 말을 건네지 않던 그녀가 무슨 일인지 직접 사람들 앞에서 천마를 부른 것이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그게…….”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는 운소령.

그녀는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의 증조모를 보러 가자고 말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그게 말이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학우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을 잘 걸지도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을 보니 더욱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말해. 뭔데?”

빤히 쳐다보는 천마의 행동에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내게 시간을 좀 낼 수 있을까? 우리 집안 어르신을 좀 만나 줬으면 하는데.”

“……!”

순간 학관생들의 눈이 커졌다.

“우, 운소령이…….”

서문영도 눈이 찢어질 듯 커진 다음,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릴 정도였다.

“집안의 어르신이라니…….”

“설마…….”

천하의 운소령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인 구애를 하다니.

그녀가 소극적으로 건넨 말투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내가 왜?”

천마의 반문.

어이없는 반응에 학관생들은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미모의 소저가 자신더러 집안의 어르신을 보러 가자고 먼저 말을 건네 줬거늘.

거의 청혼이나 다름없는 저런 고백을 듣고도 무안을 주다니.

“이익……!”

하지만 운소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증조모의 부탁은 제갈가의 지엄한 명령과도 같았다.

가문의 규율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그녀는 지금 중책을 맡고 이곳에 와 있었다.

“부탁해.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야.”

다시 한번 이어지는 정중한 요청. 얼굴이 벌게진 운소령은 이제 고개까지 숙였다.

천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해. 나도 바쁜 사람이니까.”

“미안, 여기서는 좀 어려워. 아무래도 우리 집까지 좀 가 줬으면 좋겠어.”

우워어어……!

학급 안에서는 이제 거의 폭동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지려 했다.

“거, 귀찮게 구네.”

천마는 잠시 창가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너희 집이 어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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