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토루스의 권능 (1)
천마는 운소령과 학관을 나섰다.
푸르륵.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일각도 아쉬운 것일까.
정문에는 ‘제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크고 화려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야, 야, 저기 봐.”
“우와… 역시 제갈세가…….”
“어? 저거 이한 아냐?”
웅성웅성.
학관생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운소령은 새빨개진 채로 마차에 올라탔고, 천마는 그 뒤를 따랐다.
차아! 히힝!
뒤이어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고, 마차는 그 크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다각다각. 다각다각.
커다란 마차는 탑승감도 좋았다.
마법적인 조치라도 걸려 있는지, 속도가 제법 됨에도 소음 하나 없었다.
덕분에 마차 안은 고요할 정도였다. 한참을 그리 이동하던 중에, 결국 운소령이 물었다.
“어딜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너희 집 가는 거 아냐?”
천마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것을 떴다. 마차에 올라탄 후로 이제까지, 입 한 번 열지 않았던 그다.
“그건 그런데… 혹시 내가 다른 위험한 곳에 끌고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위험한 곳? 나한테?”
천마는 운소령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어딜 가든,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없어.”
“…….”
운소령은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항상 이랬다. 그녀가 뭔가 말할 때면, 도발적으로 응수해 오는 말투의 이한.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저 허풍이라고 여기기엔, 이제껏 그가 학관에서 보였던 기행들이 떠올라 예사롭지가 않다.
어쩌면 그 때문에 증조모께서 주목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그나저나 이제 곧 알게 되겠군.”
이한이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야?”
“너한테 날 감시하라고 한 게 누군지.”
“……!”
운소령의 눈이 크게 뜨이고, 얼굴이 굳어졌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저 말은 그동안 자신이 이한을 몰래 살펴보고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아마 처음부터. 이제껏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여자애가 계속해서 날 쳐다보는데, 그걸 모르면 등신이지.”
“……!”
그리고 그녀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바로 알려주는 이한. 그는 까닥까닥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안 듣던 이론마법학까지 따라오면서 모를 줄 알았냐?”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운소령은 일단 사과부터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건, 당사자에게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운소령 본인이 그렇게 당해 봤기에 더욱 잘 알았다.
하지만 이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 저었다.
“사과할 것까지야. 너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뭐야, 모를 줄 알았냐? 난데없이 시간 내 달라고 한 거, 그리고 지금 이 마차.”
천마가 쿡쿡, 고급 쿠션으로 마감된 방석을 손으로 찍었다.
제갈세가의 방계가 타고 다니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고 고급진 마차를.
“이거, 꽤 너희 집안에서 직책이 있는 자가 보낸 거잖아? 그럼 그동안 네가 나를 계속 쳐다보던 것도 설명되지.”
“이…….”
후우.
운소령은 울컥하려다가 그냥 한숨만 쉬었다.
마지막 말이야 어쨌든, 그녀는 뜬금없이 이한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무슨 목적인지, 왜 그러는지 이유도 듣지 않고.
심지어 이제껏 몰래 살펴보고 있던 것까지 들켜 버린 입장이다.
무심하게 빤히 바라다보는 시선에, 운소령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해명했다.
“네 생각이 맞아, 이한. 너를 보자고 하신 분은 우리 제갈세가에서 아주 높으신 분이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불편한 자리가 될 수도 있어. 그러니…….”
덜커덕. 쿵.
말하던 도중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중년인이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제갈세가의 태위(太衛), 가주 직속의 호위 무사들이다.
예상 못 한 어른들의 모습에 운소령은 잠시 경직되었다.
오히려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일단 뭐, 한번 만나 보지.”
먼저 마차에서 내린 천마였다.
* * *
제갈세가의 안뜰은 꽤 넓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묘목과 분재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었다.
인공 연못도 몇 개씩 만들어져 있었는데, 정원의 따스함과 분수대의 청량감이 매우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쏴아아아.
제갈세가의 본가는 이곳 사천과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만 생활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분타는 전국에도 제법 많았다.
대부분 학관 옆에 터를 낸 곳으로, 규모도 적지 않게 컸고 부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애초에 예전부터 무림맹의 군사를 역임해 온 가문이다. 이 정도 정원을 꾸미고 유지할 만한 재력은 우스운 수준.
“증조모께서는…….”
정원에 들어서서 한참 걷던 운소령이 말끝을 흐려 물었다.
사박.
마침 그녀 쪽으로 걸어오는 호위 무사가 예를 표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덜컥. 끼이익!
정원과 정원 사이를 가르는 중문이 열리고, 천마와 운소령은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솨아아아.
그곳에 사람 한 명이 있었다.
회랑처럼 보이는 개방형 구조에, 인공 연못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호호백발의 노인.
타다닥.
그 모습을 본 운소령이 재빨리 앞으로 가 허리를 숙였다.
“증조모님, 분부대로 데리고 왔습니다.”
“왔느냐. 수고 많았다.”
백발의 노파가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보였다. 제갈세가의 가장 높은 어른, 제갈유진이었다.
“그래, 이분이 그 소문의……?!”
그녀는 증손녀와 같이 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흠칫,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령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던 그녀는 이내 운소령을 보며 말했다.
“예, 증조모님.”
“잠깐 자리를 피해 줄 수 있겠느냐.”
“네? 아, 네…….”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운소령은 당황했지만, 바로 증조모의 말에 수긍했다.
그녀는 천마를 한 번 바라보고 ‘잘 부탁해’라고 입모양으로만 말한 후, 천천히 허리를 숙여 물러났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스륵.
제갈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누추한 곳에 귀인을 모시게 되어 삼세(三世)의 영광입니다. 좋은 차를 준비했으니 앉으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극도의 존중.
세수가 자그마치 백수십에 달하는 노파가, 이제 겨우 십 대인 이한에게 극존칭을 하는 것이다.
스윽.
하지만 상대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대접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먼저 앉아 까닥, 하고 마주 앉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는 겉모습은 십 대인 이한이지만, 실제로는 눈앞의 제갈유진보다 아득히 위의 항렬의 어른인 천마였으니까.
후르륵. 후륵.
두 사람은 잠시 차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한도 제갈유진도,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고, 푸근한 노인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제갈유진의 표정은 이한을 보던 중에 천천히 굳어졌다.
‘끝을 알 수 없다…….’
눈은 곧 마음의 창(窓)이라 한다.
제갈유진쯤 되는 인물은 그저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격을 잴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아했다.
운소령이 데리고 온 소년은, 딱히 안광이 예리하거나 재지가 뛰어나 보이지 않고 그저 평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담담할 뿐인 상대의 눈 속에서, 한없이 깊은 심연(深淵)을 본 것이다.
‘이건……!’
어둡고 무거운 가운데, 극도로 침잠된 기운.
더욱이 그 기운은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암흑과 어둠이 공존하는 가운데,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광기의 갈구마저 느껴졌다.
‘……?’
하나 그 이질감은, 인지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너무도 짧은 순간이라, 자신이 잠시 착각했나 의문이 들 정도로.
해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제갈유진 쪽이었다.
“귀하께서는… 인간이 맞으신지요?”
“큭!”
천마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인간이지. 내가 몬스터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나?”
무슨 이런 어이없는 농담을 하나 싶었는데, 제갈유진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후우…….”
그리고 잠시 후, 제갈유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에 하나, 눈앞의 존재가 인외의 몬스터라면, 생사결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힘이 아닙니다.”
“네 견문이 부족한 걸 굳이 입 밖에 내서 자랑하지 않아도 된다만?”
거의 멸시에 가까운 폭언이었지만, 제갈유진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하긴, 백 년 넘게 세상을 둘러보아도 여전히 신비한 것들이 많긴 하더군요.”
지금은 그의 신경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물어볼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엔 천마가 질문을 해 왔다.
“그래서, 까마득한 손녀를 통해서 나를 감시한 결과는 어때? 만족스럽나?”
“불쾌했다면 사죄드립니다.”
그녀는 천마에게 바로 고개를 숙인 후 잠시 시선을 연못에 둔 다음,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귀공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의 세상은 멸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강대한 적의 악의에 반해, 우리 인간들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변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멸망이 다가와? 강대한 적이라는 게 이치왕을 말하는 건가?”
“……?!”
제갈유진의 눈이 커졌다.
고작 그게 어쨌다는 거냐는 투의 말.
세상의 멸망, 강대한 적, 리치왕. 누구든 바로 알 수 있는 의미의 나열이다.
딱히 학관의 학생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떠올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치왕이라고?’
하지만 잠깐 언급한 어투가 이상했다.
완전수의 제곱의 때에 부활한다는 리치왕.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서 중원의 모두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강호 무림을 재편하고 몬스터와의 전투를 위해 단결한 학관 연합체가 그를 상대하기 위함이니까.
그래서 이치왕이라는 단어는, 상대의 이름을 어설프게 알고 있던, 백수십 년 전에 잠시 쓰였다가 지금은 거의 사장되어 버린 단어다.
그것이 지금 눈앞의, 십 대의 얼굴을 한 존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뭐… 굳이 애쓸 필요 없다. 어차피 해결될 테니.”
“…네?”
“아니, 너희들이 방비한다고 해서 도움 될 거도 아니고.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거잖아. 괜히 깝죽대다가 죽지 말고, 그냥 가만히 몸이나 사리고들 있어.”
“……!”
듣기에 불편할 정도로, 너무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제갈유진은 더욱 궁금했다.
지금 이자가, 대체 누구인가를.
“혹시…….”
그녀는 슬쩍 운을 띄웠다.
“그 재앙을 해결하는 것이 마교인가요?”
하지만 천마는 그저 갸웃할 뿐이었다.
“알아서 뭐 하게?”
“저희도 무엇이든 하고 싶으니까요. 이제껏 천마신교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심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허락하신다면 미력하나마 돕고 싶습니다.”
“…참, 여전하군.”
천마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너희들의 한심한 작태는 변하지 않는구나. 이런 식으로 슬쩍슬쩍 간만 보는 쥐새끼들이 누굴 돕는다고?”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지나쳐? 웃기는군. 그럼 어디 말해 봐라.”
천마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차갑고 냉혹한 냉소였다.
“너희가 마교를 돕겠다는 이유가 뭐냐?”
“그야 리치왕을 섬멸하고, 이 땅에서 몬스터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제갈유진이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마교가 없다면 너희들은 어쩔 건데?”
“당연히…….”
콱!
제갈유진은 말하려던 순간 입이 틀어막히는 기분을 맛봤다.
마교가 없다면.
지금의 무림 연맹만으로 리치왕과 싸워야 한다.
“이제 알겠냐?”
“…….”
천마가 말한 건, 어차피 할 싸움이란 것에 있었다.
예전에는 몰라도 그 싸움은 학관 연합 자신들의 싸움이다.
마교는…….
사실 싸우든 안 싸우든 상관없다.
정확히는, 그들은 이미 싸웠었다.
140년 전에 이미.
자신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본산마저 빼앗기며, 리치왕에게 가장 혹독하게 궤멸당한 곳이 천마신교의 십만대산이다.
“…….”
그렇기에 그런 마교에게 ‘돕겠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 궤변이며 위선이었다.
마교를 ‘돕겠다’고 하는 말은, 실상 그들을 빨리 회복시켜서 선봉에 세우려는.
자신들의 싸움에 남을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쓰려는 속셈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제갈유진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몰랐다. 그리고 그걸 천마는 지적한 것이고.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나 보군. 너희들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었는지.”
“…….”
“되도 않는 도움 따윈 없어도 돼. 너희들 도움은 애초에 계산에도 넣지 않았으니.”
후르륵. 탁.
천마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제갈유진은 그러는 그를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저 깊은 충격에 빠져 남겨진 말을 되새길 뿐.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너희들의 한심한 작태는 변하지 않는구나.
-슬쩍슬쩍 간만 보는 쥐새끼들이 누굴 돕는다고?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천마가 나간 자리를 보며, 제갈유진은 망연자실하여 묻고 있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