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토루스의 권능 (4)
천마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꽤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노달과 흑객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데, 몸이 돌처럼 굳기라도 한 듯 뭔가 움직이려던 자세를 취한 채 까닥도 못 하고 있었다.
‘이게… 그 권능인가?’
쿠아토의 권능, 폭식.
일전에 노달이 말한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보니 참 해괴했다. 더군다나 흑객이야 그렇다 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달이 놈의 특기를 알고도 제대로 방비하지 못 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쓰윽.
천마의 시선이 몇 발치 떨어져 있던 놈들에게 향했다.
전장에 오자마자 그는 염화공을 뿌려 댔었다.
급하게 끌어올린 데다 광범위한 범위로 쏘아 내긴 했지만, 그래도 혈수마공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인 극양의 마공.
한데 그걸 몸으로 막아 낸 모양이다.
치이익. 이글이글.
바닥에는 불길이 꺼지지 않은 채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놈들은 멀쩡히 지면을 딛고 서 있었다.
천마 자신의 공격을 받고도.
‘그런데 이놈, 이렇게 컸었나?’
거기서 천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쿠아토의 체구가 이전과는 왠지 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볼 때… 적어도 두 배 이상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얘들아, 이 녀석이 여기 왜 있어?”
꿈틀.
천마가 노달에게 묻자, 그제야 몸이 움직여지는지 노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제자님! 갑자기 이 녀석이 땅에서 튀어나와 급습해 왔습니다!”
“땅? 아, 그때 그 도마뱀인가. 급습해 온 이유는?”
“그, 넘치는 심장이니 뭐니 하는 걸 내놓으라고…….”
“…그게 뭐야? 심장이 왜 넘쳐?”
“제자님이 획득하신 그 아이템의 이름 같습니다.”
“아, 그때의 오크로드.”
노달의 말을 듣고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트라는 오크로드. 놈을 처단하고 얻은 이따금 검은 기운이 서리던 진녹색의 보석 목걸이.
이제 보니 이놈들은 그 아이템을 찾아서 여기까지 쫓아온 모양이었다.
‘하긴 뭔가 좀 있어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폭식이든 폭발이든 어쨌든 네임드 몬스터. 화경의 고수 4명을 상대로 한 놈이 직접 나서서 회수하러 올 정도라니.
“뭐, 알았다. 일단 내가 처리할 테니 물러나.”
“위험합니다. 모두 같이…….”
“아니, 아니야.”
천마는 손을 저어 노달의 걱정 어린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전력을 다한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자칫 상황이 꼬이면 그조차 진짜로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천마가 특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흑객. 정확히는 그의 안에 있는 뱀파이어 블라드였다.
“그냥 내가 말하는 대로 너희들은 물러서. 저놈, 이전과 좀 다른 것 같으니까.”
* * *
“크르르르르.”
천마가 기습적으로 쏘아 낸 열화공은 쿠아토에게도 제법 위협적이었다.
화르르륵. 지직. 지직.
그의 몸은 물론이고, 땅까지 살라 먹고 있는 기이한 화염. 원래라면 그냥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을 지원하러 온 트롤 주술사 토루스를 잃게 된다.
마법사나 주술사가 으레 그러하듯, 토루스도 여러 가지 장기와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 기본적으로 몸이 약했다.
저런 이질적이고 강력한 화염을 맞는다면, 분명 치명상을 입거나 죽을 것이었다.
“음.”
그렇게 불길을 막아 낸 쿠아토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화르르륵. 지이이익!
맞을 때만 해도 화염 속성의 강한 마법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적이 펼친 불길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스스로 고리를 만들어 쿠아토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살아 있는 화염.
아무래도 보통의 불이 아닌 모양이었다.
쿠아토의 권능인 폭식은 크게 두 가지로 발현된다. 하나는 상대의 힘을 무조건 빨아들이는 섭취. 그리고 또 하나는 섭취한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소화.
쿠아토는 그 소화 과정에서 손상된 신체의 회복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의 힘, 인간들이 무공이라 부르는 것이 쿠아토 자신의 권능과 최소 동격에 올라 있다는 의미다.
“토루스.”
“예.”
살았다는 걸 겨우 인식한 토루스가 큰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너는 뒤로 좀 물러서 있어라.”
“예? 그럼, 쿠아토 님은…….”
스윽.
쿠아토는 답하는 대신 손을 내저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자기들끼리 태평하게 대화하고 있던 인간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에 토루스는 침음했다.
‘그 정도인가.’
폭식의 쿠아토는 본시, 피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과격하게 분노한다. 그러니 이 정도의 부상을 입었으면 극도로 격분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쿠아토는 그 성격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분노하거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지극히 고요한 상태.
이는 상대가 지극히 강한 상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저벅. 저벅.
“그리고 토루스.”
토루스가 물러서자, 쿠아토가 시선을 앞에 둔 채 말을 이었다.
“블러드러스트 3단계를.”
“헉……!”
그 말에 토루스는 흠칫했다.
블러드러스트(BloodLust).
그린스킨 일족의 고유한 술수로, 그 효과는 광폭화.
걸리게 되면 모든 능력치를 두 배 이상 늘려주는 버프이자 디버프.
하나 부작용이 심각해서 어지간해서는 요구하지 않는 술수였다. 실제로 쿠아토는 홍매학관에서 화경의 고수들과 싸울 때도 광폭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블러드러스트 3단계라니.
‘대체 어느 정도기에…….’
토루스는 심각하게 새로 나타난 인간 소년, 아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수준이 낮아서인지, 토루스 자신은 그에게서 딱히 큰 힘을 느끼지 못했다.
“하나 쿠아토 님, 이걸 사용했다간 몸에 부담이 많이 갈 겁니다.”
아무리 쿠아토라 해도 직전에 생사를 건 대격전을 치르고 온 지 얼마 안 되었다. 기껏 이긴다 하여도 후유증이 엄청날 것이다.
“상관없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 될 테니.”
하지만 쿠아토는 완강했고, 그의 의지에 토루스는 결국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가 읊조리는 주술어를 따라 점점 핏빛이 거세졌고, 이내 쿠아토의 몸에 붉은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주술이 걸린 쿠아토의 몸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대신 눈빛과 몸의 기세가 달라졌다.
가만히 서 있어도 붉은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르르르르.
광폭화를 받게 되면 쿠아토가 가진 폭식, 그 권능도 강화된다.
일단 섭취한 힘을 소화하여 재생 능력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다. 하물며 3단계라면.
섭취 능력의 극대화. 주변의 모든 힘을 빨아들이며 쇠약화시키는 ‘마비의 파동’도 발현이 가능하다.
말 그대로 가진 모든 패를 까서 전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람 걸음.”
땀을 물처럼 쏟아낸 토루스는 천천히 공중을 밟고 하늘로 벗어났다.
투욱. 훅. 훅.
쿠아토를 한 번 보기는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 쿠아토의 폭식에 자신마저 휘말릴 수 있기에 멀리 떨어질 수밖에.
“네가 이곳의 로드인가?”
그르르륵.
온몸에서 붉은 기운을 흘리며 쿠아토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는 너는 쿠아토라 불리는 놈이군.”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음.”
쿠아토는 눈을 부라렸다. 주술로 이어진 마나트의 뼛가루. 정확히는 성인치를 분쇄한 가루는 근처의 건물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져갈 수 있는 위치다.
눈앞에 선, 까다로운 적만 아니라면.
“내가 원하는 건 하나. 넘치는 심장뿐이다. 굳이 싸워서 애꿎은 생명을 버릴 필요가 있는가?”
쿠아토는 우선 협상을 제의해 보았다.
“생명? 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님 너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상대는 노골적인 거부 의사를 밝혔다.
“…….”
쿠아토의 표정은 딱히 변함이 없었다.
상대는 강하다.
아마도 이제껏 만나 본 적 중 제일 강할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이라는 기운을 갈무리함을 넘어 완벽히 제어하는 수준까지 올라 있는 것이다.
“알았다. 너의 답은.”
쿠아아앙!
대답과 함께 쿠아토가 미친 듯 달려들었다.
순간적인 속도는 가히 이전보다 몇 배나 빨랐다.
노달이 헛바람을 일으킬 정도의 속도와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쿠우우욱!
하지만, 천마는 상대의 발톱 공격을 한 손으로 받아 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손목을 손으로 낚아채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딴 게 통할 거라 생각하나?”
화르르륵.
그리고 이어진 염화공.
노달의 것보다 한층 더 숙련된 불길은 그의 손목을 타고 쿠아토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쩌어어어엉!
쿠아토는 다른 손으로 천마를 밀어냈다.
그리고 밀려난 그의 몸은 온통 화염으로 물들었다.
스르르르르.
하지만 곧 열기는 걷혔고, 다시 드러난 쿠아토의 모습은 멀쩡했다.
“염화공이……. 이놈, 가죽으로 된 피부가 아니구만?”
쿠아토는 천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숨을 고른 뒤, 또다시 달려들었다.
패애애액.
하지만 반응 속도는 천마가 더 빨랐다.
둘의 공격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쿠아토의 가슴 어름을 베고 지나갔다.
그 순간.
쿠오오오오오!
섭취라는 폭식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두두둑.
그리고 천마의 몸은 거짓말처럼 굳었다.
상대의 눈을 보거나, 어떤 외부의 기운에 닿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람에 닿기만 해도 마비되는 것.
“이게 권능인가?”
천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서 풀리지가 않는다. 그리고 서서히 녀석의 입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흡!”
그에 한순간 내공을 격발시켰다. 상대의 권능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피이이이익.
그대로 천마를 빨아들이려던 쿠아토가 일순 동작을 멈추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녀석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천마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
콰아아앙!
천마의 몸이 땅을 파고들었다. 땅속에 거의 절반쯤 파묻힌 채로 있다가 급히 튀어나온 천마.
콰득.
“너 이 자식…….”
그의 얼굴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권능을 발현하자마자 취소한 쿠아토의 회심의 공격.
그게 아주 제대로 먹힌 것이다.
퉤엣.
천마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담담한 표정의 쿠아토를 노려보았다.
“좋아. 이번 건 꽤 아팠다.”
* * *
“세, 세상에…….”
노달은 대경실색하고 있었다.
쿠아토도 쿠아토지만, 그를 상대하는 천마의 움직임이 너무 엄청났다. 싸움은 물론이고 대응 방식, 움직임이 기존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대는 지난번보다 몇 배나 빨라지고 강해졌다. 그럼에도 천마는 너무도 쉽게 대응하고 있었다.
자신과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최강자의 경지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다만, 흑객의 물음에도 그는 그다지 확신을 하지 못했다.
둘 다 진짜 실력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마는 아직 경공술과 마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지도 않았고, 쿠아토는 움직임만 달라졌을 뿐 특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몸짓이 두 배 이상이나 커졌다. 뭔가 숨기고 있을 거다.’
쿠아토.
화경의 고수들도 쉽게 쓰러뜨리는 네임드 몬스터.
놈의 권능은 분명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홍매학관의 그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분명 자신만의 싸움 방식이 있다는 얘기일 터.
문제는 제자님이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냐이다.
“으읍.”
또다시 공세가 오갔다.
쩌어엉! 쩌어엉!
몇 번의 교전에서는 둘의 우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저 형식적인 싸움.
몇 번의 힘겨루기 끝에 서로 땅을 디뎠고, 칼은 천마가 먼저 빼어 들었다.
“염화폭열검.”
검을 휘두르자, 쿠아토는 흠칫 놀라며 옆으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검강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이어진 공격은 검강이 아니었다.
쿠우우우우웅!
그저 간단한 베기였는데, 지면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이전보다 몇 배나 더욱 거대한 용암이, 곳곳에서 땅을 가르며 튀어 오른 것이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발 어름에도 있었다.
“크아아악!”
지이이익!
피한다고 피했지만, 그의 몸 삼분지 일은 용암을 뒤집어썼다. 이번 공격은 이전과 달리, 순수하게 생물의 몸을 살라 먹을 끔찍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소수폭마공.”
뒤이어 이번에 쏟아지는 것은 극음의 냉기.
좌아아악!
이번에는 땅이 아니라, 공중에서 일어나는 얼음 결정이 그의 몸으로 옮겨 붙었다.
다다다닥!
하나하나가 지독한 냉기 마법과 맞먹는 얼음의 결정. 그것이 쿠아토의 몸을 감싸고 둔하게 만들었다.
“그만 끝내지.”
쿠아아아아앙!
그리고 이제야 펼쳐 보이는 검강.
그 검강은 제운비나 노달의 것보다 더욱 새하얗고, 길었다.
그런데.
“으아아가!”
쿠아토가 비명과 함께 땅을 밟자마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와드드득!
전혀 준비도 움직임도 없는 상황에서, 천마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
“카아아앙!”
몸의 반은 열기에 익고, 나머지 반은 냉기에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쿠아토는 전력을 다해 두 손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그러자 거대한 열 폭풍이 천마 쪽으로 뻗어 나왔다. 그 모습에 노달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저, 저! 도둑놈의 새끼가!”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조금 전 천마가 사용한 염화공과 같은 종류의 기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