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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42화 (143/310)

142화. 다시 만난 페이탈리스트 (1)

청해성의 이름 없는 탑 3층.

대주술사 지르케는 숲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항상 혼자 있을 때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곳에 앉아 있는 걸 즐겼다.

사실, 명상은 주술사들이 흔히 하는 정신 수련 중 하나다. 그들의 특기답게 항상 정신을 맑게 해 주어야, 적기에 심력을 쏟아 낼 수 있으니까.

“……!”

그런 그가 갑자기 눈을 떴다.

한번 명상에 들었다 하면, 최소 하루를 넘기는 그가 오늘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뜬 것이다.

천천히 초점이 맺힌 그의 눈이 보랏빛 나무로 향했다.

죽음의 땅.

한때 푸르르고 생명이 가득해 청해라 불리우던 땅은, 그린스킨이 들어선 이후 변했다.

황토는 검고 질척이는 진흙이 되고, 초록빛 나무는 모두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뭐지?’

마경이 되어 버린 숲. 그걸 바라보던 지르케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댔다.

의식의 끈.

대주술사 지르케가 그의 제자 토루스에게 걸어 놓은 ‘일족의 영령’. 땅끝에서 끝까지, 한번 시전하면 절대 끊어지지 않는 의식의 끈이 갑자기 끊어졌다.

‘대체 누가 토루스를…….’

지르케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의식의 끈은 거리가 멀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는다. 또한 어떤 방해에 의해서도 차단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토루스의 죽음. 바로 그뿐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가 섬기던 오버로드 쪽으로도 생각이 뻗어 갔다.

‘쿠아토도 당했다는 건가.’

스르르륵.

그는 창가에 손을 슬쩍 올려보았다.

늙고 비틀어진 손. 하나 그 주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역장이 피어나고 있었다.

구르르륵.

꽤 시간이 지났을 때쯤. 탑 아래의 질척이던 바닥에서 거대한 뭔가가 치솟았다.

쿠와아악!

거대한 덩치. 핏빛으로 불타는 비늘을 가진 마물 샐러 드레이크.

토루스와 쿠아토가 타고 갔던 녀석이, 혼자서 빈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으르르르… 휴르르르르…….”

지르케가 부르자 거대한 도마뱀이 제 머리를 창가를 향해 천천히 들이밀었다.

“그래. 그래. 착하다.”

그 머리에 지르케가 손을 대었다. 그와 함께 빠르게 전해지는 상념들.

즈즈즈즉.

“…흠.”

자아가 작은 몬스터의 기억이기에, 전체 줄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단편적으로 흡수가 될 뿐이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쿠아토와 토루스는 마나트의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닿은 곳은 홍매학관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싸움이 한창일 때, 샐러 드레이크가 퇴각하기 전 본 적은 셋.

“어찌 인간 따위가…….”

지르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샐러 드레이크의 시야를 전해 받아, 직접 눈으로 보고도 그는 믿기 힘들었다.

고작 인간 세 명.

그들을 상대로 모든 권능을 쓰고, 심지어 토루스가 부활의 권능까지 썼는데도 모조리 패하고 죽어 버렸다.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자 수준에 올라온, 알려지지 않은 인간들이 또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쿠아토는 죽었다. 리치왕의 수족을 통틀어 보자면, 그의 비중이 그렇게 크진 않다.

하나 아락취가 통솔하는 그린스킨 군단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큰 피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르케.”

“흡!”

그때였다.

그를 부르는 소리에 지르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급히 걸음을 재촉해 1층으로 내려갔다.

왜소한 체격의 한 오크.

흡사 고블린처럼 작은 체격에 대나무처럼 비쩍 마른 몸.

하나 그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몸에는 거대한 늑대의 가죽을 두르고, 머리에는 늑대 머리를 셋 달고 있는.

해골 지팡이를 든 오크 샤먼. 그가 나타나자 지르케는 극도의 공경을 보였다.

“오, 오셨습니까. 켈베로스 님.”

“그래,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저 샐러 드레이크는 쿠아토의 것이 아니더냐. 왜 혼자 돌아온 것이지?”

“그것이…….”

지르케는 고개를 숙여 아는 대로 보고했다.

“허어. 아락취 님의 오른팔 쿠아토가 당했다고? 설마 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움직였던 것이냐?”

가디언의 수장, 링가드 휘하의 오른팔로 불리는 켈베로스의 의문은 커졌다.

그린스킨은 리치왕을 따르는 4개의 군단 중 두 번째로 큰 전력이다.

특히 오크라는 집단의 특성 덕에, 어지간한 군대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요주의 인물, 인간들이 현경의 고수라 부르는 초강자에 대한 정보 파악도 있었다.

켈베로스가 알기로 그들은 이곳 사천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쿠아토가 당했다? 이는 둘 중 하나였다.

자신들이 요주의 인물을 놓쳤거나.

“아닙니다. 그들은 진녹의 군대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누구냐. 쿠아토를 죽인 놈들이.”

아니면 이제껏 파악 못 한 새로운 요주의 인물이 나타났거나.

“빠,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쯧쯧.”

켈베로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아락취 님을 최전선에서 보좌했던 쿠아토가 죽었단 것인가.

7대 죄악의 권능을 몸에 담은 전사는 좀처럼 나타나기 힘들다. 때문에 켈베로스가 지르케에게 질책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게 인간들처럼 파벌 싸움을 벌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설마하니 쿠아토의 죽음이 그 때문은 아니겠지?”

“결단코 아닙니다. 저도 이런 결과는 예상 못 했습니다.”

지르케가 납죽 엎드렸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화제를 돌렸다.

“…한데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흠, 섬서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

“섬서라면……?”

“그래. 종남이라는 군단이 있던 곳이지.”

학관이 들어서고 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섬서에는 종남파라는 전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장로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적들을 조심조심 끌어들여, 일거에 쓸어버리려고 했었다. 목표는 종남파에 머물러 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유장위. 막 숨을 끊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는데, 갑자기 저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아…….”

지르케는 탄식을 터뜨렸다.

최근 리치왕의 수호장들을 중심으로, 주군이 일어나시기 전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 먼저 한 놈이라도 잡자는 얘기가 나왔다.

지위가 낮은 그는 그저 되면 좋겠군, 하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작전이 실제로 진행되고 성공 직전까지 갔었던 모양이다.

유장위라는 놈이 있는 섬서 지역에서.

“어쨌든. 리치왕께서는 어떠시냐.”

“아. 머지않아 깨어나실 것입니다.”

“머지않아라… 시간은?”

켈베로스의 눈이 반짝였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호오. 절대 제곱수의 시간은 아직 멀었을 텐데?”

“그게 다 켈베로스 님 덕입니다. 수확 대대가 가져온 전리품을 제물로 돌렸더니, 어둠의 마나가 대량으로 피어났습니다.”

“커---커커커!”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켈베로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지르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넙죽 엎드렸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용맹하고 영민한 이들을 뽑아 감히 쿠아토를 없앤 놈들에게 핏값을 치르게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너희는 지금처럼 의식을 계속해라. 그 놈들은 내가 처리하지.”

“굳이 켈베로스 님께서 나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기분 전환이다. 이제껏 약해 빠진 인간들. 특히 어린애와 여자만 주워 담다 보니 갑갑해졌어.”

우드득. 뿌득.

앙상하게 마른 손이 요란하게 뼈 소리를 냈다.

“쿠아토를 죽인 놈들이라면 손맛은 좀 있겠지. 겸사겸사 밖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

처억.

그러고는 바로 손을 들어 샐러 드레이크를 향했다.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지고, 켈베로스가 놈의 입에 들어섰다.

그그극. 쿠구구구!

뒤이어 땅 위로 일어서는 맹렬한 진동.

케르베로스를 태운 샐러 드레이크가 멀어지자, 지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질책도 피했고, 의식의 공양에 집중할 수 있겠어.’

그리고 넘치는 심장도 회수할 수 있을 터.

지르케는 쿠아토의 복수를 하러 간 켈베로스. 그에 대한 걱정은 일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분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현경의 고수와 싸워도 쉽게 밀리지 않을 자이기 때문이다.

* * *

“으음.”

노달의 앞이 서서히 밝아졌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더니 서까래가 보였다.

여긴 어딘지,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 어쩌다 여기로 온 것인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헉!”

노달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에 다시금 자리에 누웠다.

“으윽.”

“사부님, 일어서지 마십시오.”

옆에 있던 누군가가 그의 상세를 돌보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은 천마 제자님의 거처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는, 자신의 제자였다.

“어찌, 됐느냐.”

노달은 정신이 들자마자 곧장 물었다.

폭식의 쿠아토. 그놈에게 일격을 당하고 기절한 것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그렇다면.

“교… 천마 제자님이 죄다 처리했습니다.”

“역시…….”

노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추측할 거리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고 해도, 그라면 충분히 적을 쓰러뜨렸을 것이다.

“…참 부끄럽구나.”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혼자서 수만의 적들을 상대한 사람처럼, 머리부터 무릎까지 허연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아닙니다. 사부님의 도움이 컸다고, 제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고.”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게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한 번은 죽였으니 되었다.

방심을 했다곤 했지만, 본 교의 사람이 복수를 해 준 것도 괜찮았고.

“후우…….”

노달은 천천히 고개를 천장으로 들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만신창이로 당한 것이.

아마도, 뱀파이어 녀석을 처단할 때 외에는 극마에 올라 이렇게 당한 적이 한번도…….

“너…….”

순간 노달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흑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사부님?”

“…….”

잠시간 눈을 감고 있던 노달은, 허! 하고 감탄성을 터뜨렸다.

“장하다. 과연 내 제자로구나. 기어코 이런 날이 오고 말았으니.”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고 있었더냐? 너는 환골탈태를 했다. 이 사부와 같은 경지라는 말이지.”

노달의 말에 흑객의 눈이 접시만 하게 커졌다.

“제, 제가요? 아니, 제가 언제…….”

“그걸 네가 모르면 어쩌느냐. 봐라, 이 몸을. 가히 금강석처럼 단단하지 않느냐.”

노달이 손끝을 세워 기공의 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흑객의 팔에 찔러 넣었다.

푹. 파각!

그 침은 이쑤시개처럼 부러졌다.

흐뭇하게 미소 짓는 노달 앞에 흑객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었다.

“아니, 이건… 제가 아니라 사부께서 주신 아이템, 뱀파이어의 이빨 때문입니다. 놈이 각성하고 보니 예상보다 어마어마한 거물이더군요.”

흑객은 지난번에 사부에게 다 고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부끄럽다는 얼굴을 했다.

“즉, 이 현상은 그 녀석의 권능 탓입니다. 저는 아직 극마에 다다른 게 아닙니다.”

“아니, 그게 그거다. 꿩 잡는 게 매지. 뭔 품종을 따지겠느냐”

“예……?”

“금강불괴. 그게 가능한 시점은 극마부터다. 그리고 지금 너는 이미 금강불괴를 손에 넣었지. 알겠느냐? 너는 이미 극마의 경지다.”

“…….”

난데없는 확인에, 흑객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이미 극마라니.

그럼 블라드란 놈과의 관계는 이제 어찌 되는 건가?

답을 해 줄 이는 이곳에 없었다.

천마는 조금 전, 잠시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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