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다시 만난 페이탈리스트 (2)
“흐음.”
천마는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이름 모를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싸움이 끝난 후 급히 노달을 침실로 옮기고, 의원을 불렀다.
다행히 마지막 호심경이 제 역할을 했는지, 큰 충격에 뼈가 많이 부러졌지만 생명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소견을 말해 왔다.
그래도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말도 꺼냈다.
그길로, 천마는 이곳에 도착했다.
생각할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놈들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쿠아토와 싸운 후, 천마가 느낀 솔직한 감정이었다.
과거 리치왕과 싸울 때 그린스킨의 수장이라는 아락취, 그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하나 당시에 그놈은 그다지 기억에 남을 정도의 무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에 붙어 본 쿠아토라는 놈이 예전의 아락취보다 더 강했다. 폭식의 권능이라는 것도 있어서 자신도 몇 번 곤경에 처할 뻔했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하니 그린스킨은 오른팔이라는 놈들이 수장보다 더 강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으로, 예전보다 놈들이 더 강해졌을 거라는 생각이 따라온다.
몬스터와 싸우면서 인간들이 강해진 것처럼, 그렇게 강해진 인간을 상대하면서 그린스킨들도 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체 얼마나 강해진 것인가?
수호장 중 하나 그린스킨의 아락취도 아닌, 그 휘하의 쿠아토가 이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어느 정도로 발전한 것인가.
-귀공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의 세상은 멸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강대한 적의 악의에 반해, 우리 인간들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변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제갈세가의 분타에서 만난 노인네.
그 녀석은 마치 이 사태를 알고 있는 듯했다.
적들의 위협이, 지금 수준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 말을 단순히 허풍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게, 그 녀석 또한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기가 아닌, 마력을 갈무리할 정도의 실력을.
높은 마력을 가졌다는 게 어떤 식으로 싸움에 도움이 될지 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제껏 천마가 만난 마법사들보다는 훨씬 월등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내 생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천마는 복잡하게 변하는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적들이 강해졌다.
그것도 매우 많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에 맞게 자신 역시 강해져야 할 것이다.
“지금 이대로 탈마를 기다리는 건 안 돼.”
천마는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가늠했다.
지금 상태에선, 쿠아토를 능가하는 적을 만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앞으로 더 강한 적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
그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없다면. 뭐, 오르면 되는 거지.”
결론은 그렇게 났다.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강해지는 것으로.
“안 가 본 놈들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탈마에 오르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탈마지경에도 뚫어야 할 벽이 무려 다섯 단계나 있다.
그리고 그 벽을 하나하나 부숴 내는 것도 경악할 정도로 어렵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언제까지나 마냥 탈마에 오르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 리치왕이라는 언제고 나타날 최강의 적을 상대하려면, 암만해도 예전에 올랐던 생사경의 앞까지는 가 있어야 할 터.
즉, 지금 오르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결국, 모험이 필요하다는 걸 테지.”
천마는 자신의 손에 내력을 모아 보았다.
스으윽.
서서히 뿜어져 나오는 마기.
언제부터인가, 천마가 뿜어내는 마공에 그늘진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페이탈리스트, 그림자의 정령이란 그 녀석을 만난 때부터 일 터.
“할 수 없지. 조금 뒤에 만나려고 했었지만. 내게 시간이 없으니까”
자칫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천마는 그를 불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탈마로 가는 마지막 벽은, 바로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뒈지진 않겠지?”
아니,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놈을 쓰러뜨린다면, 탈마를 얻게 될 것이다.
페이탈리스트의 정신계, 거기서 놈이 만들어 냈던 어둠에 잠식된 자신.
그건 지금의 천마에게 벽이면서 동시에 열쇠다.
자기 자신을 투영한 대상을 극복한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말이니까.
* * *
크르르르륵!
이제까지 꺼려 와서 그렇지, 일단 불러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는 바닥에 그려진 육망성이 정령을 불러내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대주천, 극마의 정점에 오르면서 대주천을 보다 더 쉽고 빠르게 활성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마의 눈에 보였다.
보라색 빛이 자신을 감싸던 사이에, 검은빛이 점차 다가옴을.
그 존재를 바라본 천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보여라.”
사아아아아-!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로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이전과 다르게, 지금은 이계로 들어가는 과정이 모두 뇌리에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시야가 다시 멈췄을 때.
‘왔는가?’
검은 하늘과 회색 대지, 그리고 그 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별이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고원. 여기저기 열기를 뿜어내는 분화구들.
풀씨 하나 보이지 않는 돌들은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저편에.
[또 왔군.]
사람 형상을 한 그림자가 입을 열고 있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래. 하지만 아직 그 상태로 다시 찾아왔다는 건,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거겠지?]
예상대로 그는 대화보다는 힘으로 제압하려는 특성을 띠였다.
적의 그런 도발에도 천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혀.”
그러고는 두 손을 펼쳤다.
그곳엔,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페이탈리스트, 널 쓰러뜨리러 왔다.”
[…호오]
우우우웅!
그 순간, 검은 장막이 짧게 물결치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달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푸른색 암석들.
대지를 뒤엎을 듯한 거대한 투석 공격은 이전과 같았다.
“똑같구만.”
예전에도 봤던 공격을 본 천마는 손을 높게 올렸다. 자신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암벽을 보면서도 그는 태연했다.
쿵! 쿠쿠쿠쿠쿵!
그렇다고 피하지는 못했다.
천마를 덮친 돌덩이들은 계속 쌓이기 시작했다. 아래에 깔린 인간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무게와 양으로.
한데 그런 가운데서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쩌저저저적 콰아아아앙!
불의 고리가 수천, 수만의 암석을 깨부수며 번져 나오고 있었다.
염화공 10성. 무한계도.
불의 고리가 닿는 곳은 무한대로 번져 간다는 무공으로 적의 공격을 완벽하게 잠식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저편에서 나타난 암석들이 있는 곳까지 불의 고리가 파고들어, 이내 천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 나오지.”
천마나 씨익 웃자 그림자 영체는 잠깐 침묵을 지킨 뒤,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 같은.
크으으으으!
천마, 자신의 모습으로.
* * *
눈앞의 검은 천마는 검붉은 마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눈은 풀리고 입가에서는 침까지 흘려 대는, 이전처럼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었다.
쩌어어엉!
검은 천마가 손을 휘두르자, 지면 군데군데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열화멸절공.
정염의 불꽃이 푸른빛을 내며 천마가 피할 방향을 선점했다.
그 가운데서도 천마는 피하지 않았다.
한순간, 모래 폭풍을 연상시키게 하는 속도로 불길이 천마를 덮치자 이전에 맞상대하던 방식과는 달리.
피이이이이-.
그 강한 불의 결계를 파훼해 냈다.
완벽하리라 보였던 결계 자체를 천마군림보로 단숨에 뚫어 낸 것이다.
[…묵령초살]
묵령공. 화경 고수의 검강보다 수십 배는 강한 흑마공의 정점.
이전에 검은 천마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무공.
놈은 역시나 똑같은 무공을 적절한 시기에 펼쳐 냈다.
그런데 이번엔 천마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운을 정면으로 맞상대했다.
[무모한…… !]
검은 천마는 단 한 번에 상대가 산산조각이 날 거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팍.
한데 그의 눈에 괴이한 장면이 잡혔다.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위치와 시간에, 천마가 손짓 한 번으로 묵령공을 완벽하게 상쇄시켜 버린 것이다.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 천마는 잠깐 동안 눈앞의 천마, 그의 모든 무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꼈다.
지금, 상대는 본인 스스로의 기억에 없는 무공을 썼다는 것을.
“역시나. 넌, 나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했군.”
천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마는 원래 천월성의 몸에 들어온 영혼이었다. 그리고 천월성은 당시에 탈마의 경지였다.
한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낮은 경지라, 예전에 배웠던 무공을 전혀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묵령공의 약점은 바로 같은 성질의 무공과는 합쳐지지 않는다는 것.
똑같은 성질을 가져다 대면 밀어내는 성질이 있었다.
어쨌든, 이것저것 헤아려 보면 상대는 자신이 과거에 알던 모든 무공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도 당연했다.
그는 이미 탈마의 범주에서 아우를 수 있는 정신계가 아니었으니.
[너, 예전과 달라졌군.]
이번엔 검은 천마가 말을 걸어왔다.
“흥.”
천마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가 강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아마도 이론상으로 눈앞의 검은 천마는.
‘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일 터.’
신체, 내공, 내력, 그리고 마력까지.
상대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낼 수 있는, 아마도 극마에서 이룰 수 있는 강자의 최종 형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체 너 같은 녀석이… 이런 무모한 짓은 왜 하는 거지?]
구면이기 때문일까. 이전과 달리 묻는 녀석의 태도도 조금은 호의적이었다.
아마도 이런 미련한 짓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상당한 궁금증을 자극했을 터.
“누군가에겐 무모한 짓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이런 무모한 짓으로 성장해 왔다.”
천마는 말했다.
[…….]
“그리고 무모함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지. 여러 가지 수를 남겨 놓은 자가 바라보는 절박함과, 마지막 남은 방법 하나를 남겨 놓는 자의 절박함이 다른 것처럼…….”
쾅!
순간적으로 천마는 자신의 손을 뻗어, 상대의 손을 붙잡았다.
어느새 검은 천마가 눈앞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실패하겠군.]
“…….”
[생각해 봐. 눈앞의 나는 너 자신의 최대치의 힘이다. 그런 날 상대로, 어떻게 뛰어넘겠다는 거냐?]
상대의 반응에 천마는 씨익 웃었다.
그랬다.
이론상으로는 절대 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걸 상대도 알고, 자신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조금 뒤 내가 다르다면 어때?”
[…무슨 소리냐?]
“성장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지 않나. 네놈이 나의 형상을 본떠 눈앞의 나를 만들었지만, 나는 이제부터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예정이거든.”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한테는.”
천마는 상대의 손을 잡고 꾸욱 내렸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열기를 품어 내는 검은 천마를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에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