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다시 만난 페이탈리스트 (4)
후르륵. 후르륵.
천마의 몸에 자주색 불꽃이 일어났다. 그 불꽃은 일반적인 불과는 많이 달랐다.
팔랑거리기를 한 차례. 그리고 거짓말처럼 굳었다가 다시 열기를 피워 내며 움직이고, 멈춘다.
그렇게 박자라도 맞추듯이 규칙적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고오오오오-.
페이탈리스트가 존재하는 이곳은 월면.
흔히 말하는 ‘달’이다.
그래서 바람이 없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달이라서, 지구와 다른 중력의 영향력을 받았다고 해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애초에 이 불꽃은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힘을 빌려 왔다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아니, 페이탈리스트가 알기로는 확실히 그러했다.
[마계의 불꽃…….]
그림자의 정령이자 혼돈의 근원인 그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불꽃.
과거 마계의 공작들이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옥의 불꽃을, 눈앞의 녀석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
감히 생각지도 못한 기운을 소환해 냈음에도, 페이탈리스트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만월의 주인. 이 땅에 있는 한, 눈앞에 있는 녀석이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오직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건 신(神)뿐.
심연의 세계에는 인간 따위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방대함이 있었다.
“그거야 한번 부딪쳐 보면 되는 것이고.”
천마 역시 피식 웃었다. 그는 오히려 반가웠다. 상대에게서 보이는 여유로움이.
녀석은 반드시 강해야만 했다.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져서, 간신히 붙잡은 탈마의 경지에 들어서서도 자신이 버겁게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어울려 준 가치가 있으니까.
“자, 간다.”
후웃!
말이 끝나자마자. 천마가 한 손바닥을 펼치며 지옥 불을 한데 모았다.
그러고선 막 달려들려는 자세로, 그대로 서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는 페이탈리스트.
상대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언을 노리는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분신?]
싸한 느낌에 페이탈리스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후욱!
갑자기 등 뒤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페이탈리스트가 그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퍽! 화르륵!
몸에 붙은 지옥 불이 전신으로 번져 버린 것이다.
[크아압! 하합!]
어찌, 이런 경공술을 펼칠 수 있는지.
이미 본신이 나타났는데도, 아직도 정면에서 손을 펼친 녀석의 분신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
그런걸 의아해할 겨를이 없었다. 녀석의 지옥 불을 맞자마자 페이탈리스트의 모든 호신강기와 호심공이 깨져 버렸다.
화르르륵!
이 자색 불꽃은 염화공의 불의 고리 정도가 아닌, 하나의 생물이었다.
불꽃이 혈도를 타고 페이탈리스트의 몸으로 들어가려는 기미가 보였다.
[이이익!]
결국 페이탈리스트는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만월의 반대편. 영구한 어둠의 지대.
이곳은 그의 영역이기에 다른 기운들이 침투해 올 수 없다. 온몸에 붙은 지옥 불을 떨쳐 냄과 함께, 잠깐이라도 천마의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일정 부분은 성공했다.
다만.
[으으으윽. 으으윽. 대체 선택받지 못한 어둠 따위가 왜 이렇게 죽지 않는 것이냐!]
분명히 만월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는데도, 자주색 불꽃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라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서서히 힘을 잃어 가는 것은 목적 대상을 잃어 버려서 스스로 소진되어 가기 때문이었다.
“뭐 하냐? 거, 한 번 공격했다고. 쫄았어?”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상대를 향해 천마는 히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가 펼친 무공은 이형환위.
하지만 지금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이형환위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탈마의 경지에 들어서고 나면 이형환위란 무공은 유명무실해진다.
상대 주변에 있는 기의 통로를 자신과 교감한 뒤, 완벽하게 두 개의 간극을 뛰어넘는 경공술을 펼친다.
그리되면 천마는 상대의 눈을 속이는 이형환위가 아닌. 실제로 두 명이 되는 효과를 줄 수 있었다.
물론 단 일회성일 뿐이지만.
투욱.
그렇게 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의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천마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람의 모습 또한 아니었다.
한쪽은 인간, 한쪽은 검은 연기가 흐르는, 그러면서도 온몸이 칠흑처럼 어두운 존재였다.
[…정말로 스스로를 뛰어넘은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차분해졌다.
온몸이 새카만지라 표정이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그래 보였다.
“그렇게 됐군.”
천마는 짧게 대답했다.
그 말에 말없이 천마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페이탈리스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진심으로 놀랍다. 인계(人界)에 이런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이 본인이 낼 수 있는 한계 너머의 힘을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보여 주다니. 인정하마. 너는 충분히 나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
“…….”
천마는 놈의 말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일견 뭔가 자신을 칭찬하는 듯하나, 그러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드높이는 괴상한 말투. 곧 죽어도 오만함을 버리지 않는 태도가 아닌가.
[하지만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 그건 너라도 하더라도 예외일 순 없다.]
“…….”
아니나 다를까. 역시 변하지 않은 놈의 본심이 나왔다. 천마는 그의 대답을 여유롭게 기다렸다.
[지상으로 내려가거라. 이 이상은 무모할 뿐이다. 난 오로지 신(神)적인 존재를 따를 뿐. 협약 관계인 마족과 활동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 없다. 그러니 인간 따위와 협약을 맺는 일은 있을 수…….]
“거,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는데. 오해한 부분부터 풀지.”
천마는 그의 말에 끼어들며 말했다.
“우선, 난 너와 협약을 맺을 생각이 없다.”
[그럼 뭐 하러 온 건가…….]
“그냥. 뭐 하는 놈인가 싶어서 보러 왔지.”
“…….”
페이탈리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그라 해도 이 정도로 정신 나간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마가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랬는데, 와서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널 내 발밑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
페이탈리스트는 이번에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지나갈 무렵.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느냐? 인간?]
페이탈리스트의 전신에서 노여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극마, 화경의 고수도 억누르기 힘든,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기파.
하지만 천마는 피하지 않았다.
“알지. 널 이기는 건 최소 신(神)의 영역일 거라는 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이미 신의 초입에 올라섰거든.”
[……!]
탈마(脫魔).
이 경지는 이미 인간을 벗어난 경지, 굳이 말하자면 신선, 혹은 하급 신의 영역이었다.
이제껏 천마가 애타게 그곳으로 오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극마와 탈마는, 애초부터.
절대로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말이야. 너한테도 그렇고.”
천마는 만월의 주인을 오만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놈!]
페이탈리스트가 노한 음성으로 손을 들었다.
드드득! 드드드득!
천마의 주위로 어둠이 짙어졌다.
이제껏 분화구가 팬 바닥에나 서리던 그림자. 그것이 번져 나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철퍽. 스르륵.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지면을 밟고 있다는 느낌조차 희미해졌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홀로 놓인 듯한 기분.
[미련한 인간, 너의 그 오만함이 결국 죽음을 부른 것이다.]
그림자의 정령, 페이탈리스트의 권능.
바로 완벽한 어둠으로 그가 점찍어 놓은 '대상'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것.
이 깊고 완벽한 심연의 어둠에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무력감. 공포감. 두려움.
그것은 절망감으로 이어지며, 그 사념이 짙어지면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든 간에 스스로 붕괴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항상 의심하는 존재다. 마음에 그림자가 지지 않는 인간은 없다.
따라서 페이탈리스트는 인생이 표류하는 심상 그 자체도 전장으로 삼을 수 있었다.
[어떠한 저항도 의미 없다. 그곳은 네 마음속의 가장 깊은 어둠. 네가 인간인 이상 절대로 견뎌 낼 수 없을 지옥이다.]
그리고 그걸 더욱 가속화하는 것은 바로 어둠의 침해였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해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있다는 것. 필멸자들에게는 결코 견뎌 낼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이다.
패애액!
“……!”
완벽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천마에게, 첫 공격이 가해졌다.
지이익.
그것으로 천마의 등이 찢어졌다.
패패액! 차아악! 솨아아악!
페이탈리스트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 속에서 계속된 일격. 천마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사실, 이 정도로 버티는 것도 페이탈리스트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하나가 상대를 일격에 죽일 만한 공격이었음에도, 천마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도 상관없었다.
느리지만 확실히, 천천히 그의 목줄을 옥죄일 것이기에.
[너는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감히 나를 도발한 죄를 물어서.]
“거, 되게 시끄럽네.”
천마가 입을 열었다. 페이탈리스트는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심상이, 다음에 쏟아져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가 두려워? 오히려 난 즐거운데?"
다른 어떤 인간들과도 달리, 천마는 이미 이런 어둠에는 익숙했다.
아니, 사실 탈마를 깨닫기 위해서 이미 수많은 망상 속에서 와 봤던 길이다.
'기준이 없어서 표류한다면, 스스로 세우면 된다.'
심연.
아무것도 없는 이 무의 공간은, 결국 기준을 자신에게 세우는 순간 모든 게 다시 유로 돌아간다.
자신의 위치가 세워지면, 적의 위치가 가늠이 된다. 그리고 적의 위치가 가늠이 되면, 거리가 계산이 되고.
거리가 계산이 되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
화르르륵.
천마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염화공의 불꽃.
짙은 어둠 속이었기에 불빛은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화르르륵!
하지만 재차 피어오르는 자주색 불꽃.
이 불꽃은 어둠을 밝혔다. 바로 멸화공. 페이탈리스트가 지옥의 불꽃이라 여긴, 그 어떤 차원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멸망의 불꽃이었다.
[…….]
"기준을 세웠으니. 이제 너를 찾아보지."
스스스슥.
천마는 주변의 감각을 일깨웠다.
당연하게도, 이 공간에서는 기(氣)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쏘아 보낸다면.
일순간에 삼천만 개의 전신 모공에서 모든 기운을 사방으로 쏘아 보내,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것이.
"여깄군."
[……!]
페이탈리스트였다.
[이런! 어둠이여!]
그는 급히 어둠의 공간을 뒤흔들었다.
이곳은 만월의 영역. 따라서 그의 권능 중 하나인 공간을 재분배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사사사사삭.
순간, 수많은 천마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라지고 없어지고를 몇 번을 거치면서도 천마는 줄어들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페이탈리스트가 공간을 뒤흔들 때마다, 계속해서 천마 스스로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천마군림보…….]
페이탈리스트는 깨달았다.
방금 상대가 펼친 것은, 거의 무한대로 환영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천마군림보였다는 걸.
"이게 너구나?"
천마의 손에 잡힌 페이탈리스트. 그는 대답 없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너는 내 것이다."
화아아악!
음험한 지옥 불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수많은 공간이 생겨났다 사라지며, 일대가 파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