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46화 (147/310)

146화. 다시 만난 페이탈리스트 (5)

스스스슥.

균열이 일었다.

주변을 덮었던 어둠의 공간은 몇 번이고 침식되며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그 어둠이 모두 사그러들자, 다시금 달 표면이 드러났다.

심한 곰보처럼, 수없이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진 크레이터들. 별의 조각이 흔적을 남긴 상처투성이 월면.

권능이 사라진 페이탈리스트는 흐릿해진 몸으로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혼돈의 주인…….]

머리를 부여잡힌 광기와 만월의 주인. 그는 어둠이 있기 전 태초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따르는, 혼돈의 세계를 경험했다.

[인간, 아니… 신적인 존재…….]

그는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인간이었지만, 인간이라고 보기에도 불가능했다.

그가 펼치는 힘의 근원은 자신과 같았다. 어둠이 존재하기 이전의 힘, 혼돈이었기 때문이다.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자격을 갖춘 분. 함께하는 날까지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 * *

파스슥.

그의 말을 끝으로 천마의 시야는 깨어졌다.

“이게 뭔…….”

사실, 천마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페이탈리스트의 머리를 잡은 건,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놈의 힘의 원천을 알아내기 위해 읽으려고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들여다보자마자 페이탈리스트가 스스로 굴복했고 주변이 쪼개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눈앞에 그 이상한 이계가 아닌, 현계가 보였다.

수풀 사이에 떡하니 솟은 너럭바위. 그 위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자신의 몸.

“거참…….”

천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쪼르르르. 쫑쫑.

들리는 건 숲속의 작은 새들의 소리뿐. 그 외에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따르겠다고 하던 녀석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느냐?”

혹시나 하여 부르는 물음.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 그래. 이 방법이 아니지.”

사사삭.

손바닥에 내기를 슬쩍 발출한 뒤, 자신의 그림자에 향하고 다시금 그를 불렀다.

천마가 불려갔을 때가 아닌, 그놈을 만나러 갔을 때 해 봤던 방식이었다.

“있느냐?”

그러자.

촤아아아아악.

거대한 어둠이 천마의 몸 주위로 맴돌기 시작했다.

어둠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고. 이윽고 자신의 그림자에 살짝 겹쳐진 녀석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말씀하시지요.]

신기한 일이었다.

녀석이 이제는 현실에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너, 능력이 뭐냐?”

천마는 궁금했다.

사실 이제까지 만났다 하면 계속 싸우긴 했지만, 그건 녀석이 대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의 강함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극복.

사실 지금은 광기와 만월의 주인이라는 놈이 어떤 녀석인지, 천마에게 어떤 조력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저는 어둠, 그 영역에 있는 모든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원하는 대상을 종속시킬 수 있으며, 만월의 세계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얼마나, 어느 정도의 능력이 발휘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곳은 이제껏 제가 단 한 번도 현계한 적 없는 곳. 만월에 있는 힘이 얼마나,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지, 저 또한 아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어둠의 힘, 종속, 차원 이동 등.

전부 다 생소하거나, 추측이 힘든 힘들이다.

과연 이런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사실 감이 잡히지 않는 게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녀석의 힘은 이미 극마의 수준이 아니다.

혼돈이라는 마공의 특성이 없었다면 결코 그가 스스로 굴복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리치왕이 호위하는 4대 수호장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온 상황인가. 좋아, 대충 그렇다고 하고. 너는 어디에 있을 거냐?”

[저는 혼돈의 주인을 따르는 몸.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늘 주인이 원할 때 존재할 것입니다.]

뭔가 이상한 말에 천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부를게’ 한마디를 하는 순간.

피이이이잉-.

녀석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제야 주변을 다시 돌아보는 천마.

곧 자신이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옷부터 입어야겠군.”

그길로 천마는 거처로 이동했다.

그저 단순한 경공술이 아닌, 그가 바랐던 비행. 허공을 날아다니는 무공을 펼친 것이다.

* * *

“교, 교주님?!”

천마가 들어왔을 때, 흑객은 기함했다.

발가벗은 몸을 본 그는 급히 속옷을 내어주었고, 천마는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말했다.

“노달은? 정신이 좀 돌아왔냐?”

“예, 그렇습니다.”

“흠.”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향했다.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한 팔은 부목을 댄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던 노달이 천마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제자님! 오셨습니까.”

그래도 표정은 좋아 보였다.

죄다 터진 얼굴을 하고서도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래,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사실 하루 정도 운기만 하면 금방 나을 정도지요.”

“그래야지. 고작 그 정도로 뻗어 버리면 곤란해.”

“……!”

천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달의 시선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노려봤다.

“왜?”

천마가 빤히 쳐다보자, 그는 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뭐가?”

“몸이…….”

“오?”

그 말에 천마는 반색했다.

흑객은 몰라도 노달은 알아봤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페이탈리스트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그때.

“혹 무슨 문제가 있으신 겁니까? 이런 말씀 꺼내기 죄송하지만, 내상이 상당해 보입니다.”

“…응?”

“이전에 느꼈던 갈무리한 기운 역시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휴식을 좀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

천마는 그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 녀석, 결국은 극마였지.’

탈마에 오른 순간, 신체는 당장 태양혈이나 안광 같은 눈에 띄는 변화가 전부 원래대로 돌아와 버린다.

그래서 같은 극마끼리는 기를 갈무리하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지만, 탈마가 되면 그런 것까지 완전히 없어진다.

그러니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또는 조금 무공을 익힌 수준으로 보이는 것이다.

본인의 눈높이보다 더 강해져 버리니, 상대는 이쪽을 읽거나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그것보다.”

천마는 화제를 돌렸다.

“그 오크 놈들, 여기는 어떻게 찾아온 거야?”

“…그게 말입니다.”

노달은 그제야 중요한 얘기를 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천마가 들고 온 보석에 대해 얘길 꺼냈다.

진녹색의 보석. 스스로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는 보석.

아마도 이것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폭식의 쿠아토는 싸움에 앞서 먼저 그걸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말도 했다.

“여기 있습니다.”

듣고 있던 흑객이 예의 그 물건을 꺼냈다.

잘그락.

성인 주먹 크기만 한 진녹색의 보석. 그리고 보석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

부우웅. 부우우웅.

이런 걸 아티팩트라고 하던가, 마치 심장의 고동처럼 맥박 치듯 안쪽에서 빛이 나왔다가 어두워졌다가 하는 보석이었다.

“극마급 몬스터가 찾으러 왔다면, 그저 그런 아이템은 아니겠군.”

“예, 아마도 신물이나 그런 것에 준하는 등급이 아닐까 합니다. 저희로서는 용도를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아이템은, 누구에게나 작지만 확실한 힘을 부여한다.

하지만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특히 아티팩트급의 아이템은 ‘권능’ 같은 강대한 힘을 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마나트라던가. 이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오크로드가 갑자기 세 배로 강해지는 것을 보았던 기억도 났다.

“어찌 됐든 이 물건에 대한 처분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노달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오크로드. 다음에는 쿠아토와 주술사.

이 물건이 놈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더욱 강한 놈들이 되찾으러 오게 될 것이고, 이 진녹색 보석은 그런 만큼 위험한 물건이다.

“그래야겠지. 노달, 네 생각은?”

“부숴 버리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천마의 물음에 노달이 살짝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이미 놈들과 우리는 적입니다. 그리고 이건 놈들에게 중요한 물건입니다. 부숴 버리면 놈들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테고, 저희들은 더 이상 추적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흠.”

노달의 말에 천마는 가타부타 하지 않았다. 대신에, 옆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흑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은 어때?”

“저… 말씀입니까?”

의견을 묻자 흑객이 흘끔, 사부인 노달의 눈치를 보았다. 이걸 말해도 될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일에서는 의견이 다를수록 좋은 거다. 특히 윗사람이 아니라 아랫사람의 의견이 중요해. 항상 책임과 안전을 생각하느라 윗대가리들은 머리가 굳어 버리곤 하거든.”

“…….”

천마의 시선에 흑객이 조금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저는 부술 바에야 팔아 버렸으면 합니다.”

“흠.”

“너무 위험하다. 이 물건은…….”

“노달은 가만히 있고.”

천마가 버럭 하는 노달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흑객에게 시선을 준 후 턱을 까닥했다.

“예… 이 아이템은, 몬스터를 불러들입니다. 그것도 강대하고 위험한. 그 말은 분명히 가치가 지극히 높은 물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요.”

“계속해 봐.”

“아마도 제값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 10분지 1이라 해도 분명 어마어마한 돈이 될 테고, 그건 본 교에 극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한번 사부와 교주를 눈에 담은 채, 흑객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중원 전체를 위해서, 그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중원 전체?”

“혹은 인류 모두를 위해서거나요. 누가 됐든 간에, 이 아티팩트를 사는 이는 결국 그 쓰임새를 알게 될 겁니다.”

딴에는 학관에서 물을 좀 먹었기 때문일까.

흑객은 완전히는 아니라도 학관인들의 의식, 그러니까 인간들이 힘을 모아 몬스터들을 몰아낸다는 이념을 제법 이해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무기라면, 부수는 것만으로도 몬스터들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건, 적의 무기로 적을 치는 것이 아닐지요?”

“흐음, 확실히 일리 있어.”

천마가 끄덕였다.

적의 무기로 적을 친다. 또한 그 와중에 재물을 챙긴다.

이것이야말로 마교, 천마신교다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닌가.

흑객의 말을 들은 노달도 턱을 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아니, 생각은 했을 거야. 엄두를 못 낸 거지. 위험하다 싶어서.”

“…….”

“윗대가리라는 게 그래. 위험과 책임을 아니까.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이득을 어떻게 내냐? 이러니까 아랫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거야. 기존의 생각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그리고 그 때문에 천마는 혼자 움직인 거였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그들의 안위까지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하려면 자꾸만 선택이 제한된다.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탈마에 오르면서 천마는 천천히 찾아 가고 있었다.

예전의 기억, 예전의 사고방식을. 그리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기억해라. 노달.”

마교의 태상장로에게, 천마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제 우리는 도망자가 아니다. 수하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천마신교는 네 보호가 필요할 만큼 약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

“방안을 좀 짜내 봐. 최대한의 이익을 보고,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라. 물론 여차하면 다 뒤집어엎으면 되지만, 되도록이면 우리가 드러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할 수 있겠어?”

“…명, 받들겠습니다.”

노달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