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블랙 마켓 (2)
새액. 새액.
투명하고 맑은 유리로 햇살이 드리우는 학과장실.
긴 의자를 기울이고, 햇볕을 쬐며 리그웨더는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났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똑똑.
“학과장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반짝.
리그웨더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의 기척을 감지하기 무섭게 당시 기억이 사라지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무슨 일인가요?”
편히 누운 자세로, 리그웨더는 물었다.
“예, 학과장님을 뵙고자 하는 상인들이 왔습니다.”
“…상인?”
뜻밖의 말에 그녀의 시선이 약간 옆으로 틀어졌다.
“상인이라면… 교무처에서 일을 진행하지 않나요? 굳이 왜 저를?”
“그들 말로는, 우연히 귀물을 얻어서 판매처를 찾고 있다 합니다. 한데, 보통 물건이 아니라 학과장님의 식견이 있어야 할 것 같다더군요.”
“그런가요.”
어찌 보면 흔한 일이었다. 리그웨더는 천무학관의 학과장.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존귀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게 일단 얼굴 도장이라도 받아 놓기 위해, 이래저래 선을 대려는 상단이 한둘이 아니었다.
속내가 뻔하고 괜히 시간만 쓰게 되는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까지처럼 대충 알아서 돌려보내라고 말을 하려던 그때.
“네, 학과장님께서 귀한 시간을 뺏겼다, 라고 느끼신다면 자신들의 상단을 해체하고 학관에 재산의 반을 기부하겠다고 합니다.”
“……?”
리그웨더의 고개가 갸웃했다.
상단은 기본적으로 이문을 따지는 존재다. 그래서 리그웨더를 만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행동의 근본은 이익 창출이다.
이번처럼, 그 어떤 상인이든 상단이든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제안을 해 온 적은 없었다.
상단을 해체하고 학관에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물론 리그웨더가 그럴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 엄청난 귀물을 보고도 물욕 때문에 ‘시간 낭비 했군’ 하고 말하면 어쩌려는 생각인지.
“정말로 대단한 걸 가져온 모양이군요. 어느 곳의 상단인가요?”
덕분에 리그웨더는 호기심이 동했다. 이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들이대는 상단이라면, 정말로 중요한 물건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게…….”
리그웨더가 묻자, 문 밖에서 구중천이 살짝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청송상단, 표면적으로는 아이템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중소 상단입니다. 하나.”
“하나? 실제로는 누군가의 일을 대신해 주는 쪽인가 보군요. 배후가 어디인가요?”
“…그게, ‘딥 블랙’. 상계에서 재력만 놓고 보면 3위에 속하는 클랜과 협력하는, 블랙 마켓의 암상인입니다.”
* * *
딥 블랙(Deep Black).
현 강호에서 현존하는 클랜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
그런 평가에 모자람이 없게, 그들은 최고였다. 수는 고작 백여 명이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일가를 이루는 이들이었다.
특히나 그중 클랜장을 비롯한 12명의 클랜 지주들.
그 대부분은 화경의 무인이나, 대마법사, 특수기술자, 도굴꾼, 패스파인더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직 자체가 던전 토벌에 최고로 효과적인 구성을 자랑해서일까, 강호의 수많은 클랜 중에서, 그들의 던전 토벌 성적은 1위였다.
천무학관이 전력 자체는 자타공인 최강이지만, 던전 토벌 성적은 2위 내지는 3위였다. 아무래도 학관의 설립 목적은 던전 토벌이 아니라 인재 양성에 있으니까.
어쨌든 딥 블랙은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이제껏 던전에서 수많은 아이템을 출토해 왔다.
워낙에 위험한 던전을 토벌하다 보니, 우수하다 못해 거래 불가 판정의 아이템도 캐 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딥 블랙은 암시장을 통해 암거래에 손을 대게 되었다.
저주받은 아이템, 광역 피해를 주는 독이나 폭약. 정상적인 루트로는 거래해서는 안 되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 수 있는 아이템이나 물건들.
그런 수요와 공급 때문에 생겨난 것이 블랙마켓이었다.
딥 블랙은 그런 것들을 거래하며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출처가 불분명한 아이템을 사거나 팔기도 했다.
“명성이 자자하신 천무학관의 학과장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청송상단의 목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비단옷을 입고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절을 하는 목. 그는 극공경의 자세로 리그웨더를 대했다.
‘정말로… 골드 드래곤일지도.’
원래 첫 거래에서는 일부러 자신을 낮추려고 애쓰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굳이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목의 눈에 비친 리그웨더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뭔가 초월적인, 신화적이고 어마어마한 존재가 일부러 모습을 바꾸어 인간이 된 것 같은.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숙연해지게 만드는,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목 님.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군요. 듣기로는 제 식견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네. 정확히는, 저희가 얻은 귀물이 보통이 아니라 할 수 있다면 천무학관에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재미있으신 분들이군요. 일단 앉으세요.”
드르르륵.
리그웨더가 탁자를 향해 턱짓하자, 의자가 저절로 뒤로 밀려나 공간을 만들었다.
목은 그 모습에 놀라지도 않고, 점잖게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제게 보이려는 물건이 무엇인가요? 오늘은 그저 이야기만 하시려는지?”
타악.
탁자 맞은편에 앉은 리그웨더가 목에게 물었다.
천무학관은 기본적으로 그녀의 영역. 골드 드래곤의 피가 뿌려진 성역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집중하면 모를 일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눈앞의 목을 보고 리그웨더는 오히려 의아했다.
그의 비단옷 아래, 가져온 가방 안, 그 어떤 곳에도 뭔가 특이한 기운을 발하는 그런 아이템은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골드 드래곤의 이목마저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목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까닥. 빙글. 까닥.
허공에 손짓을 하고, 손을 비틀고, 다시 손을 흔들고, 다음으로는 허공에 푸욱, 손을 집어넣었다.
“……!”
갑자기 손부터 팔목까지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 그에 리그웨더는 놀랐다.
‘…아공간 도구함?’
목은 강호 전역에서 소유자가 한 손에 꼽힌다는, 아공간 인벤토리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달그락.
“여기, 이 녀석입니다.”
뒤이어 목이 꺼내 놓은 진녹색의 보석 목걸이. 그걸 보고 리그웨더는 두 번째로 놀랐다.
“이건…….”
눈앞의 이 보석이 무언지, 이 강호를 통틀어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보석의 가치를 그녀보다 높게 쳐줄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설마, 오크들의 신물이라 할 ‘넘치는 심장’이라니.
나름 눈앞의 상인, 목이라는 이에게 감탄이 나왔다. 이런 지보를 확보한 그의 능력에도, 또한 구매자로 자신을 굳이 고른 식견에도.
상대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이였다.
“…그렇군요. 아하, 쿠아토가 홍매학관을 친 이유가 이것이었던가요.”
넘치는 심장을 눈앞에 두게 되자, 리그웨더는 자연스레 몇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이제껏 왜 폭식이 제 부하들을 희생시켜 가며 홍매학관에 침공을 행했었는지, 이해가 안 가던 부분이 있었는데.
“홍매학관은 비밀로 하고 있었군요. 쿠아토, 혹은 그의 수하 중 하나가 매령지관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신물을 되찾으려 애를 썼던 모양이지요?”
홍매학관의 피해 보고에는, 매령지관이 피습당한 것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인명 피해와 파괴된 학관 건물에 대한 재산 피해만 나와 있었기에 리그웨더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아무리 기습당했다고 변명한들, 결국 자신들이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사방에 퍼뜨리는 꼴만 될 테니까.
학관의 가장 중요한 지보(至寶)를 공격당하고 아이템을 도둑맞았다는 건, 정말로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넘치는 심장이라…….’
오크들의 신물. 그들 종족의 번영을 위한 아티팩트.
주인으로 인정한 자에게 각성 못 했던 권능이나 이능을 주기도 하지만, 이 녀석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족장이 착용만 하고 있어도 무한한 축복이 부족 전체에 내려지는 괴물 같은 신물.
축복 자체는 단순하다. 번식력, 신체 능력의 강화, 그리고 빠른 회복과 학습력의 향상 정도.
하나 이 축복이 오크라는 종족 전체에 베풀어진다면… 이야기는 ‘그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게 된다. 오크가 아닌 다른 종족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었구나…….”
리그웨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이걸 입수한 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찾아가서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골드 드래곤인 그녀조차 모르는 사이에 폭식의 쿠아토, 그의 노림수를 저지한 이가 있었다.
자칫 넘치는 심장이 오크들에게 넘어가게 되면 그들의 전력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증가한다.
이제껏 몬스터 방비 전선을 넘어, 인간들이 사는 곳에 오크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소소한 침공 정도는 있었지만, 끽해 봐야 만 단위 내외.
그래서 인간들은 오크를 살짝 경계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리그웨더는 알고 있었다.
넘치는 심장을 확보하게 되면… 그린스킨은 침공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침략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상되는 전력의 수는… 최소 백만.
아무리 리그웨더라 해도 그 숫자가 중원 전역으로 퍼지게 되면 감당할 수가 없어진다. 아무리 손으로 틀어막아도, 그 틈으로 물이 새고 마는 것처럼.
“이걸… 어떻게 구하셨나요?”
리그웨더가 긴 한숨을 쉬며 묻자, 목은 대답했다.
“의뢰인의 신분을 묻는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거래의 기본이니까요.”
“그런가요. 하긴 신뢰야말로 당신들의 가장 큰 가치였죠.”
리그웨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나만 묻겠어요. 이 보석의 판매를 의뢰한 의뢰인은, 이 목걸이를 소유했던 자들을 쓰러뜨린 건가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금 백만 냥.”
“……?”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만 하면 금 백만 냥을 드리죠. 이 자리에서.”
“……!”
목은 당황했다. 등 뒤에서 소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금 백만 냥이라니. 이건 액수 자체가 그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청송상단을 통째로 두 번은 사고도 남을 거금.
그저 말 한마디만 하면 그런 거액이 들어온다. 하나, 암상인에게 의뢰인의 보호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큰돈을 원한다면, 돈보다 신뢰를 중요시 여겨야 하지 않던가.
“죄,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대답하는 목의 목소리가 떨렸다.
부들부들.
거부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원칙대로 말하긴 했지만, 온몸이 떨리고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흐음, 뭔가 오해를 하셨군요. 목 님, 저는 그 아이템을 사는 조건으로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
“그저 정보. 이걸 소지했던 의뢰인에 대한 정보. 그가 이 목걸이를 가진 그린스킨을 쓰러뜨렸느냐? 그것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금 백만 냥을 드리겠습니다.”
“……!”
목은 이를 악물었다.
그저 말만 하면 된다. 딱 한마디만.
어쩌면 의뢰인도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할지 모른다. 사정을 설명하고, 좀 나눠 준다고 하면 그들이 그러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딱 말 한마디로 금 백만 냥을 주고 난 다음, 리그웨더는 분명 더 많은 거래를 하려 할 것이다.
의뢰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어디에 살며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누구인지.
누구나 선을 넘는 것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다. 목은 괴로웠다.
분명 이 선은 지켜야 했지만, 선 너머에는 너무도 막대한 황금의 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황금을 사랑하는 상인이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어요. 교무처에 말해 둘 테니, 언제든 다시 찾아오시길.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기대하죠.”
스륵.
리그웨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넘치는 심장을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
목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넘치는 심장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부턴가 협상의 주도권은 목이 아니라, 그녀가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