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52화 (153/310)

152화. 학과장과의 조우 (4)

블라드는 다른 차원의, 어느 가난한 나라의 기사였다.

아무리 열심히 경작해도 사람들이 굶주리는 나라. 땅의 문제는 아니었다. 농토는 풍요로웠다.

하지만 그 땅의 풍성한 산출을 노리고, 인근의 강대국이 침범해 왔다.

그래서 그 나라는 수십, 수백년을 외세에 시달렸다.

블라드 본인도, 귀족임에도 어릴 적부터 적국에 인질로 보내지는 고난을 겪었다.

그는 언제고 자신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리라고, 힘없는 자의 설움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말로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행보에는, 수많은 처단이 있었다.

-나는 내 나라의 좀벌레들을 찾아 죽였다. 그들은 외세의 군대가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들이었지.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은 것이다.

블라드는 부패한 이들을 처단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았다. 돈에 매수된 관리, 상인, 심지어 신전의 사제들까지.

재물에 양심을 판 죄인들은 많았고, 그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적발해서 처형했다.

그저 목을 매달거나 목을 치는 처형이 아니었다. 산 채로 꼬챙이에 꽂아 죽이는 잔혹하고 끔찍한 처형이었다.

또한 범죄자를 적발하면 그 혼자만 죽이지 않았다. 일가친척, 자식, 부모까지 모두 죽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블라드는 나라를 깨끗하고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명성이 아니라 악명을 떨쳤다.

-그 악명으로 괴물이 되었지만, 나는 그때의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로 반성하지 않는군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계로 떨어진 거예요.”

리그웨더가 고개를 내저었다.

블라드가 숙청한 이는 천 단위를 넘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한 일이라도,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특히 범죄자의 자녀들, 애꿎게 죄도 없이 죽는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블라드를 저주했다.

그 말에 블라드는 코웃음을 쳤다.

-위대하신 존재께서는 너무 위대해서 인간을 모르시는군. 나는 내 나라나 마계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지, 겪어 본 적 없겠지?

“…….”

-선량한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착한 국민들은 언제나 빼앗기고 죽을 뿐이다. 가련하게도.

블라드의 목소리에 착잡함이 깔렸다.

그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준으로는, 범죄자나 범죄자의 자식이나 다 한통속이었다.

부모가 범죄로 돈을 벌어 자식을 부유하게 길렀다면, 죄가 없다 해도 그 자식 역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블라드는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이였다.

“억울한 사람들도 있잖아요.”

-있겠지.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

-어차피 억울한 이는 항상 있었다. 내가 죽인 이가 죄 없이 억울한 이라면, 범죄자들은 더욱 두려워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지 않나.

“하아…….”

리그웨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참으로 뜻밖이게도.

“뭐, 나름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군요.”

“……?”

이제껏 듣고 있던 흑객이 찬동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하하하! 보았나! 바로 이 점이다. 나는 이 점 때문에 이자가 마음에 든다. 이자와 그의 교…….

멈칫.

말을 하다 말고 블라드는 잠시 끊었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단. 마교라고 하던가? 이들은 어쭙잖은 위선이나 사제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논파한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어! 남자답고 통쾌하니까!

“…….”

흑객은 살짝 긴장했다가 안도했다.

좀 전에 블라드가 ‘이자의 교주’라고 말하려다 급히 말 꼬리를 돌린 것을, 그는 안 것이다.

-힘! 돈!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 그런데 천국? 신? 내세? 현실을 외면하고, 겉으론 아닌 척하고, 깨끗한 척하는 속 검은 자들의 위선. 이들은 그걸 까발린다. 참으로 내가 원하던 사람들, 단체란 말이다!

“아무래도… 블라드, 용공은 당신들의 패도적인 철학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의외로 지혜로운 인물이군요.”

리그웨더가 탄식하는 중에 흑객은 기꺼운 얼굴로 끄덕였다.

덕분에, 성향이 선인 골드 드래곤은 덕분에 두 배로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 언제 다시 내 몸을 빼앗을 생각이지?”

-지금은 생각이 없다.

“…뭐라고? 그럼 싸우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 당연히 싸워야지.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는 너희들의 행동과도 맞지 않나. 내가 이긴다면, 네 몸을 빼앗을 것이다.

조금 마음을 놓기 무섭게, 바로 그럴 일 없다는 듯 말하는 블라드.

-하지만 그대가 경계할 것은 없다. 어차피 승패와 상관없이, 나는 네 몸을 가질 것이다. 네 수명이 다한 후에.

“…뭐라고?”

-네 수명, 인간으로서의 수명 말이다. 대략 100년쯤 걸리겠군. 그동안 내 힘을 마음껏 쓰도록. 네가 이루는 것들을 나 또한 기쁘게 관람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네 사후에 받겠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인 것 같군.

흑객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상대의 말을 짚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내 몸을 빼앗지 않는다고?”

-굳이 뭐 하러 그러겠는가. 네 인생이 내 인생보다 충분히 재미있거늘.

당연한 걸 묻는군. 그런 투로 블라드가 대답했다.

인간에게 백 년이야 한 생애지만, 영생을 사는 흡혈귀에게 백 년 따위 금방이라며.

-충분히 즐겨라.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테니.

“으음…….”

이쯤 되면 정말로 진지하게 친구… 까지는 아니라도 동료로 받을 만한지도.

흑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내가 필요할 때 나와 줄 수 있나? 그러니까… 당신의 힘, 그거, 내가 전부를 쓰고 있는 게 아니지?”

-당연히. 마계의 대공이라는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직, 내 힘의 십 분의 일도 쓰지 못하고 있다.

십 분의 일.

무수히 많은 피의 꼬챙이를 쏘아 내고, 순식간에 공간을 도약하고, 신체는 금강불괴에 가깝게 단단해지는, 이 정도가 겨우 십 분의 일도 쓰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흑객은 새삼 이 괴물이 엄청난 놈이라는 걸 되새겼다. 정말 피바다가 펼쳐진 곳이라면, 저 리치왕과도 겨뤄 보려 할지도.

“그럼… 네 힘을 어떻게 쓰는지도 알려 줄 수 있나?”

-원하는 게 그거라면 언제든 불러라. 하지만 기억하도록. 나를 부르면 부를수록, 너는 점점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가 되어 갈 것이다.

“……!”

블라드는 천 년 가까이 살아온 흡혈귀였다. 고작 오십 년도 살지 못한 흑객으로서는, 방대한 그의 의식에 접촉할 때마다 의식이 섞여 버린다.

이걸 미리 알려 준 것에 대해 흑객은 기분이 묘했다. 마치 진심으로 도우려는 것 같지 않은가.

“…조언 고맙군. 최대한 피해야겠어.”

왠지, 걱정해 주는 투였다. 거친 말투로 친근감을 표현하는 동네 파락호 같은, 그런 녀석이라고 흑객은 생각했다.

“후우…….”

그래서, 뭔가 홀가분해졌다. 이제껏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 걱정, 그런 것들이 앓던 이를 뽑은 것처럼 개운해졌다.

100년 뒤라면 크게 걱정 없을 거다.

이놈을 믿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살짝 있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곧 웃음이 나왔다.

오만하고 강하고, 자존심이 높은 인물.

흑객은 이런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천마가 그렇듯이, 블라드는 한 번 했던 말은 어지간해선 지킬 터였다.

“그럼.”

그렇게 흑객의 고민이 나름 해결을 맞은 가운데, 리그웨더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넘치는 심장을 얻게 된 건지는 말씀 안 해 주셔도 될 듯합니다.”

“아…….”

흑객은 눈을 껌뻑였다.

대화를 하다 보니 학과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만,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의아했다.

“블라드라면 오크로드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하. 뭐, 그렇죠.”

흑객은 내심 땀을 삐질 흘렸다.

그녀는 쿠아토의 죽음을 아직 알지 못한 듯 보였다.

생각해 보면 홍매학관에서의 전투가 이들이 생각하고 정보의 마지막일 터.

괜히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럼, 그 상인분들을 여기로 부르시면 될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흑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한편, 그 상인들은 천마에게 붙잡혀 있었다.

드르륵. 그그긍!

천무학관의 도구 창고. 주로 3, 4학년이 실전에서 쓰는 무기들과 장비 보조 도구들을 비치해 놓은 곳.

체력 단련실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널찍한 공간으로, 수업 때가 아니면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이곳에 몇 명의 인원이 들어왔다.

“의뢰주님, 왜 갑자기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

블랙 마켓의 상인들은 물었다.

여전히 눈이 살짝 풀리고, 잠이 덜 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천마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야, 얘들 어떻게 안 되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목이 어리둥절해했지만, 천마는 무시했다. 애초에 그에게 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러사이트를 제거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어. 그거.”

-가능은 하지만,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기생충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보다 주인이시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 뭔데?”

-앞서 말씀드렸지만, 패러사이트의 근본 목적은 시야와 소리의 전달입니다. 저 기생충은 이미 주인님의 모습을 시술자에게 전달했을 겁니다.

“……”

-다행히, 패러사이트란 감염 기술은 고위급 마법이 아닙니다. 기생충이 숙주의 기억까지 읽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군. 좋은 정보 고마워.”

천마는 끄덕이고, 즉각 손을 휘둘렀다. 예상하지 못한 위험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 결단이 빨랐다.

휙! 퍼퍽! 팍!

“크윽!”

“꺽!”

“어흑…….”

목을 제외한 암상인 세 명의 뒷머리에서 진녹색의 체액이 터졌다. 천마가 발출한 권기로, 그들에게 들러붙은 기생충을 처단한 것이다.

“의뢰주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목이 당황하여 항의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어눌했고, 눈은 풀려 있었다. 잠이 덜 깨거나 낮술 한잔 거나하게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천마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일단… 물건 내놔.”

“예?”

“팔라고 맡긴 물건. 잘 있나 보게. 애초에 그거 내 거잖아? 네게 아니고.”

“아, 그렇군요. 그랬지요. 알겠습니다…….”

목이 바로 수긍하고, 손을 들었다.

스륵.

아공간을 열고, 막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넘치는 심장을 꺼내려던 그는.

툭.

“죄송. 하지만. 안될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풀린 눈으로, 멍하게 거부했다.

“그래… 예상했어.”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넌 조종받고 있구나. 패러사이트라고? 시야와 소리를 전달한다고 그랬지?

“…….”

목이 무표정하게, 아무 대답 없이 있었다. 천마는 그의 뒷머리에 붙은, 기분 나쁜 기생충을 잡고 말했다.

“그럼 지금 나를 보고 있겠구만. 누구냐, 너?”

“…….”

목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씰룩,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참으로 뜬금없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쿠아토… 폭식의 권능을 받은 자를.”

“…….”

“그를 죽인 것이 너로구나.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턱, 퍼석!

그 말은 더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천마가 듣다 말고 기생충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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