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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54화 (155/310)

154화. 블랙 길드 (1)

위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황야에 몰아쳤다.

짐승 가죽과 통나무로 대충 얽은 티피(Tipi) 앞에서 검은 로브의 마법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별로 소득이 없으셨나 보오. 모처럼 출진하셨는데.”

아크리치 메버릭.

죽은 자이기에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말 내용은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일이 좀 그렇게 됐다.”

켈베로스가 손가락으로 어금니를 긁었다.

그는 적당히 받아넘겼지만, 정작 비아냥을 당한 그보다, 옆에 있던 수하가 더 화가 나서 냉기를 풀풀 흘렸다.

“…크륵. 건방지다, 뼈다귀!”

설산 군주 켈리스. 그는 예티와 골렘이 융합되어 탄생한, 마법 생물 키메라였다.

쩌저적. 찌직!

빠드득!

켈리스가 흘린 냉기에, 메버릭의 왼팔이 허옇게 얼어붙어 깨졌다.

하나 그는 고통을 모르는 언데드.

후드 아래의 그림자 속에서 무감정한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쓸데없는 드잡이질 하지 마시오. 켈리스.”

툭툭. 후우우.

인골 무더기를 들쑤시며 그린스킨의 대주술사, 트롤 지르케가 숨을 불어 냈다.

호오오오…….

들쑤셔진 인골들이 검은 가루로 화하며, 허공에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음산한 기운은 곧 저주로 변했고, 그 저주는 이 자리에서 가장 불길한 존재, 리치에게 흘러 들어갔다.

따다다닥.

깨져 나간 왼팔이 다시 생겨났다.

존재 자체가 불경한 언데드에게 저주란, 생명체에게 행하는 회복 마법과 같은 법.

메버릭은 다시 생겨난 왼팔을 까닥여 보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별것 아니오. 그보다 켈베로스 님, 괜찮으시면 어찌 된 일인지 여쭈어도?”

“으음… 그게.”

켈베로스는 이번 정탐의 결과를 천천히 말했다.

마나트와 쿠아토의 흔적을 따라 넘치는 심장을 추적한 것.

그리고 흔적이 하필이면 천무학관 앞에서 끊긴 것.

주변을 살피면서, 출입하는 자들에게 기생충을 뿌렸던 것.

조심조심, 넘치는 심장을 소유하고 있던 상인에게 잠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회수 직전에 정체 모를 청년에게 발각당한 것까지.

“…그러면 앞으로 어찌 되는 겁니까?”

지르케가 눈살을 찌푸렸다.

넘치는 심장의 행방을 확인한 것은 다행이지만, 하필 천무학관이라니. 신물을 봉인당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오크가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줄어 버린다. 비록 지르케는 오크가 아닌 트롤이지만, 그래도 그린스킨이었다.

무엇보다 그린스킨의 우두머리, 아락취 또한 오크인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었다.

“어쩌긴, 넘치는 심장은 회수한다. 반드시.”

켈베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그럭.

지팡이로 치켜올린 털가죽 아래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초록색의, 오크의 얼굴이.

그는 오크의 샤먼이었다가, 흑마법사의 시술을 통해 다시 태어난 합성 생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예전 일이 되긴 했지만 나는 오크였고, 그린스킨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오크의 번영은 내 마음의 평화다.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다.”

“후우…….”

“충정은 높이 사겠으나, 공사는 좀 구분하셨으면 좋겠군. 천무학관이라면 리그웨더의 영토 아니오?”

지르케가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에, 메버릭이 또다시 빈정거렸다.

그는 메피스토의 오른팔 이블린(Evilyn)의 수하다.

즉, 서열로 보나 가진 힘으로 보나, 그보다 한 수 위인 켈베로스에게 그는 겁도 없이 빈정댔다.

“골드 드래곤의 심처에서 그린스킨의 신물을 탈취하겠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전력을 먼지로 만드실 것인지. 이 사실을 안다면 가디언의 수장이신 링가드 님께…….”

“그쯤 하고 닥치시오. 아버지.”

우웅.

이제껏 메버릭의 무례함을 무신경하게 받아넘기던 켈베로스. 그의 눈에 광포한 살기가 담겼다.

메버릭을 아버지라고 한 이유.

그건 메버릭이 오크였던 켈베로스를, 수십 종의 샤먼들과 뒤섞어 키메라로 제작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감히 나의 수장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아무리 귀하가 내게 새 생명을 준 존재라도, 지금 말은 지나쳤소. 정작 공사 구분을 못 하는 게 어느 쪽이지?”

“…….”

“자중하시오.”

“알겠습… 니다…….”

‘아버지’라 불린 아크리치, 메버릭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만들어 낸 키메라가 종의 한계를 초월해서 창조주인 자신보다 월등히 강해졌다.

심지어 소속도 가디언이라는, 자신이 손댈 수 없는 링가드 휘하로 옮겨지고 위치상 상관이 되어 버렸다.

피조물이 창조주인 자신보다 더 대접을 받으니, 메버릭은 여러모로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켈베로스 역시 그걸 알기에 적당히 넘어가 준 것이고.

“어쨌든.”

탁탁.

켈베로스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 출진에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패러사이트의 제한된 시야로 확인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가 출현한 것 같다.”

“으음…….”

지르케가 침음했다.

쿠아토를 보낼 때 어쩌면, 하고 내심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이 묵직한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 확실한 것입니까.”

메버릭의 눈빛이 심유해졌다.

그랜드 마스터. 중원인들의 말로 현경의 고수.

아크 리치의 시각으로 볼 때, 걸어 다니는 인간의 전략 병기. 위대하신 리치왕의 대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쿠아토를 고작 화경의 고수가 죽일 순 없다. 그리고 내 패러사이트는 아버지, 당신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것을 링가드 님의 축복으로 더욱 강화했지. 그것을 통해 재검증의 과정을 거쳤다.”

“과연, 그렇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켈베로스의 자화자찬에 메버릭이 끄덕였다.

그는 아크 리치이며 언데드 마법사다.

언데드건 뭐건 마법사에게 있어 냉정함은 기본 소양이다.

이제껏 무슨 이야기가 있었건, 중요한 일에서는 감정을 관여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그 정도도 못 하는 인물이라면, 아크(고위) 리치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존 자료들과의 확인은 어찌 됐습니까?”

메버릭이 켈베로스를 향해 물었다.

“끝냈다. 새 인물이 확실하다.”

“허장성세, 속임수 가능성 검토. 기존의 현경 고수가 역용, 우리 말로 캐모플라쥬(변장, 위장)를 했을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글쎄, 상대 또한 다급했고, 뭔가 어설퍼 보였다. 운이 좋았으면 넘치는 심장을 그대로 빼돌릴 수 있었을지도.”

“용모파기 요구.”

갑자기 메버릭의 말이 짧아졌다.

상관에게 보이는 태도로는 무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켈베로스는 그런 메버릭의 말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후욱.

그는 재빨리 손을 흔들어 환영으로 젊은 청년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여기, 이렇게 생긴 놈이다.”

“…확인. 허장성세 가능성 희박. 신규 그랜드 마스터 출현으로 단정. 전 군단에 자료 전송. 새 위협 개체 확인.”

깜박. 깜박. 깜박.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아크 리치의 눈.

이건 메버릭이 수많은 자료와 정보를 분석하는 데 골몰하는 중이라는 의미였다.

일하는 데 바빠서 존칭 붙일 정신도 없는 마법사를, 말투로 트집 잡는 건 웃기는 일이다.

코드 넘버 11번 기입.

중원형 인명 사항 - 천무학관 학관생. 이한.

활동 타입- 히든.

메버릭의 목소리가 더더욱, 무감정하고 기계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따끔따끔하고 가느다란 음성으로, 어딘가를 향해서 전송되고 있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중요 정보이니만큼, 곧 빠르게 분석되어 리치왕의 전략에 적용될 터였다.

“이로써 현경에 오른 인간 중에 11번째인가… 아쉽구나. 10번째로 만들 수 있었는데.”

켈베로스가 입맛을 다셨다.

얼마 전 섬서에서 차마 끝장내지 못한 현경의 고수, 유장위를 놓쳤다는 정보를 전해 들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신이 참전했다면, 반드시 없앨 수 있었는데.

“앞으로 어찌하시겠습니까?”

전송을 끝마친 메버릭이 물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음지에서, 던전 확장에 주력하던 켈베로스의 다음 움직임이 궁금했던 것이다.

“제단에서 허락이 떨어지면 켈리스와 함께 출정할 것이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쿠아토를 죽인 놈이다. 제단에서 사전에 알아서 준비해 줄 터. 난 그날을 위해서 단단히 대비할 것이다.”

그는 잠시 건물 밖을 바라보았다.

“내 군단. 이무기와 누에들을 데리고서.”

* * *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던가.

천마의 강력한 주장으로, 노달과 흑객은 졸지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블랙 마켓의 배후 클랜, 딥 블랙을 방문하기 위해.

노달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받은 충격은 며칠 동안 지켜보는 것이라고 의원이 말했습니다’라고 항변해 봤지만, 당연히 천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태도를 바꿨다. 각반, 가슴 보호구, 마법 내성 팔찌 등 화려한 아이템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얘야, 이건 검이다. 방어구도 미리…….”

심지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흑객에게 한마디를 건넸고.

“…사부, 저 금강불괴라면서요?”

“아.”

황당해하는 흑객을 보고 노달은 이마를 딱, 하고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시금 장갑, 건틀렛, 신발 등 전신 무장한 아이템들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생각을 바꿔야 해. 다시는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지!’

이제껏 그는 방어구인 쉐도우 아머를 착용한 것 이외에는 최대한 가볍고 단촐하게 움직였다. 애초에 본인 실력이 강호상의 누구에게도 모자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전 쿠아토와의 싸움에서, 땅속 깊숙이 처박힌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방어구 하나만 입고 있었어도!’

땅에 쑤셔박힌 정도로 기절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제껏 그가 강호를 돌아다니며 모아 왔던 아이템들.

어지간한 건 죄다 팔아 먹었지만, 그러고도 애매하게 남은 아이템들은… 전신 무장을 하고도 몇 번은 남을 분량이었다.

그것들을 전부 장비해서 싸웠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제자님이 아니라 노달 자신이 쿠아토의 목을 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생각을 바꿔야지. 이제부터 돈 걱정 안 해도 되고.’

노달은 그동안은 아이템을 쓰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해 오고 있었다. 이유인즉, 귀물을 자꾸 쓰다 보면 씀씀이가 헤퍼지거나, 교단의 교인들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질까 봐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천마가 나타난 후로 사정이 달라졌다.

돈이면 돈, 아이템이면 아이템. 필요한 만큼 쓸 수 있고,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치는 부리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것은 이제 쓸 만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데도 예전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냥 미련한 짓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 위치가 어디라고 했냐?”

곧 준비를 끝낸 천마가 물었다.

보통은 먼저 위치를 물어보고 준비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노달은 즉각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성도 관문에서 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사천에 본부가 있냐?”

“아닙니다. 지부입니다.”

“그럼 조직원도 몇 없겠네?”

“그렇지 않습니다. 마침 본대라 불리는 클랜원들이 다수 머물러 있습니다.”

노달의 말대로 클랜 딥 블랙의 본부는 하남에 위치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는 업무를 보는 무사 몇 명만 있을 뿐, 핵심적인 클랜원들이 없다.

왜냐하면 클랜의 실력자들은 던전 토벌을 위해 항시 대부분 인원이 전 지역을 순회공연하듯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 중원에 지부를 두고 있었고, 그중 사천에서는 가장 중심지인 성도의 적당한 위치 좋은 곳에 터를 두었다.

“다 준비했냐?”

철컥.

듬직한 바스타드 소드를 멘 천마가 물었다.

그는 노달의 소장품 중 칼날부터 손잡이까지 온통 새카만, 흑색 일색의 바스타드 소드를 챙겼다.

“예!”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

흑객과 노달은 곧장 대답했다.

준비가 끝나자 천마는 문을 나서며 한마디 했다.

“가자, 협상하러.”

철컥. 철컥.

노달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이 협상이지, 차림새는 무슨 전쟁을 하러 가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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