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블랙 길드 (3)
찌리릿!
천마의 말에 사방에서 시선이 모여들었다.
노려보거나, 놀라거나, 그도 아니면 담담하거나. 그런 눈빛들이다.
“이 새끼가 잘도…….”
“그만.”
마법사가 벌컥 성질을 내려는 검사를 제지하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내 천마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앉지. 이야기를 좀 자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손을 들어 올리는 마법사.
덜컥. 드르륵. 스르르륵.
갑자기 벽에서 일 장 길이의 탁자가 솟아나 천마 일행 앞에 놓였다.
다음으로 역시 벽에서 의자가 솟아나와, 저절로 자리에 따라온다.
‘염동력(Telekinesis)……?’
그걸 본 흑객이 속으로 신음했다.
별도의 캐스팅도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 고위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흠, 그쪽이 의뢰주인가?”
마법사가 천마에게 물었다.
“오.”
천마는 꽤 흥미롭게 반응했다.
지금 자신은 기를 완벽히 감추지 않고 살짝만 드러내는, 반박귀진의 묘를 운용하는 중이다.
하여 극마 수준에 오르지 않고선 잡아낼 수 없는, 무예를 모르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그런 상태.
하지만 마법사는 자신이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걸 바로 알아본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눈치로. 이쪽 밥 오래 먹고 살려면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게 눈치지.”
감탄해서 물어보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딥 블랙 사천지부, 지부장 페이튼이다. 그쪽은?”
“이한이라고 하지. 노달은 이미 알 테고, 이쪽은 그의 제자 흑객이다.”
천마가 일행의 이름을 대자, 마법사 페이튼이 고개를 끄덕여 자기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부지부장 레이라. 여기사는 처음 보지? 저 성미 급한 칼잡이는 케세인, 음침한 마법사는 사이러스.”
“반갑네.”
“반갑소.”
지부장의 눈짓에 다른 이들이 간단한 인사를 해 왔다.
드르륵. 드륵.
그리고 여기사와 다른 마법사가 자리에 앉았다.
천마는 물끄러미 지부장을, 자신을 페이튼이라 소개한 마법사를 보다가 끄덕였다.
‘수준이 제법이군…….’
별것 아닌 투로 아까의 흉험했던 기세를 싹 날려 버렸다.
확실히, 한 지부를 맡을 지부장쯤은 되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아까 말하던 걸로 돌아갈까? 우리 친구 목이 죽었다고 했지.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들을 수 있을까?”
페이튼이 우묵한 눈으로 물었다.
천마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패러사이트.”
“…기생충?”
“그래, 거기 감염되었다고 들었어. 목이라는 상인 녀석, 처음에는 빠릿빠릿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던 녀석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정신 나간 것처럼 움직이더라고.”
그 외의 주변 놈들과 같이, 라고 천마는 덧붙여 말했다.
블랙 마켓의 상인 네 명이, 동시에 똑같은 움직임으로 움직이던 것.
그리고 갑자기 목이 이상한 행동을 한 것.
마지막에 의뢰품 양도를 거절하고, 괴이한 소리를 한 것 까지.
“으음…….”
마법사 페이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얼굴을 얹더니,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톡. 톡. 톡.
얼추 일각가량 침묵이 이어졌다.
들리는 거라곤 마법사 사이러스가 손가락으로 자기 손등을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일단 당신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사이러스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기생충을 매개로 쓰는 마법, 패러사이트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니야. 시야와 소리를 전달받는 정도니까. 그런데.”
거기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르륵.
팽팽하게 긴장한 이마 옆으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의뢰 항목인 아티팩트를 가지고 학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고?”
“그랬지.”
“그건… 보통이 아니야. 패러사이트가 숙주를 조종하려면 엄청난 지배력이나 흑마력이 필요해. 한데… 장소가 천무학관이었지?”
“맞아.”
“…그럼 몬스터 로드로군.”
천마의 말에 페이튼이 단정 지으며 끄덕였다.
“몬스터 로드?”
“그래, 원래 패러사이트는 마법이 아니었어. 어떤 기생형 몬스터가 딴 몬스터에 제 식솔을 심어 넣고 부리는 걸, 인간들이 그 매커니즘을 분석해서 흉내 낸 거지.”
마법은 여러 가지를 대용할 수 있다.
기름병과 화약이 있어야 낼 수 있는 큰 불을, 마법사는 마력으로 대신한다.
무예가 검기라는 무형의 칼날을 쏘아 내는 것을 보고, 마법사는 윈드 커터라는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서 흉내를 냈다.
“기생충이 가진 권능… 이라고 말하면 과하니 이능이라고 할까? 어쨌든, 마법은 여러 가지를 대신할 수 있지만, 결국 흉내는 흉내야. 아무리 애써 봤자 오리지널을 넘지 못해.”
“그래? 정말 못 넘나? 너도?”
천마가 되물었다.
페이튼은 마법사는 움찔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넘을 수야 있지. 하지만 그러려면 마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해. 그리고 패러사이트는 기본적으로 흑마법이야. 그런데 장소가 천무학관이라고?”
“그렇지.”
“그건 9클래스 대마법사, 아니, 대마도사라도 불가능할걸. 강한 어둠일수록 골드… 의 성역을 침범하지 못해. 짙은 그림자가 더 빛에 취약한 것과 마찬가지랄까.”
절레절레.
골드… 하고 하려던 말을 삼킨 페이튼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검지, 중지, 약지. 손가락 셋을 꼽아 보이더니 하나씩 접었다.
“결국 셋 중 하나지. 흑마력의 양은 적고, 패러사이트만 잘 쓰는 저위급 마법사. 하지만 우리 친구 목은 돈 몇 푼에 임무를 잊는 사람이 아니야. 다음으로 강력한 흑마력으로 목을 지배할 수 있는 고위 흑마법사. 아까도 말했다시피 천무학관은 골드의 성역이야. 흑마법으론 이빨도 안 들어갈 테니 역시 패스. 그럼 남는 건 딱 하나 뿐이지.”
“…….”
둘이 접히고, 손가락이 하나 남았다.
천마는 주의 깊게 진지한 얼굴로 페이튼을 보았고, 그러고는 툭, 한마디 했다.
“너, 지금 욕하냐?”
“……?! 미, 미안!”
페이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게 그가 마지막으로 펴고 있던 손가락은… 가운뎃손가락이었던 것이다.
“흠, 흐흠! 어, 어쨌든. 흑마법으로는 천무학관의 마법 방비를 뚫을 수 없어.”
살짝 얼굴을 붉힌 페이튼은, 중지를 접고 검지를 펴서 까닥까닥 흔들었다.
‘…잘나가다가 삐끗하는 허당이네. 마법사라는 놈들은 다 이런가?’
천마는 잘 몰랐지만, 의외로 이건 사실이었다.
마법사는 분명 똑똑한 이들이지만, 한번 자기 생각에 빠지면 주변 상황이나 상식을 죄다 잊어버리고 엄한 짓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럼 남는 건 원래의 이능. 제 동족에게 염파를 보내는 진짜 오리지널 기생충이지. 그런데 인간의 이지를 흩뜨리고 조종할 수 있을 정도면… 거의 몬스터 로드? 그 정도급의 몬스터란 말야.”
“어… ‘그 정도 급’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 거야?”
“최소 마법사 7클래스. 무인으로는 소드 마스터. 음, 중원인들은 화경이라고 하지? 어쨌든 최소가 그 정도야. 그리고 이능 계열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플 거고.”
술렁.
천마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뒤에 서 있던 흑객과 노달이 움찔했다.
자칫,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최소 화경-탈마급 고수가 천무학관까지 잠입해서.
그들과 거래 중인 상인을 납치하고, 아이템을 강탈해 가려 했다.
그걸 눈 뜨고도 몰랐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목에게서 떼어 낸 패러사이트의 잔해가 있나?”
“아, 여기.”
스륵. 툭.
천마가 품에서 말라비틀어진 기생충의 사체를 꺼냈다.
목이 죽은 이후, 혹시 쓸모가 있을까 챙겨 왔는데 마침 이야기가 잘된 것이다.
“그리고 불상사이긴 했지만, 녀석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모든 아이템을 가져왔어. 흑객?”
“네.”
철컹. 주르륵.
흑객이 보물이 가득 담긴 관짝을 들고 왔다.
그도 원래라면 짐이나 들고 나를 사람은 아니지만, 노달은 자기 사부고, 천마는 교주이니, 짬밥상 이런 허드렛일은 그밖에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좋아… 이 정도면 위에 보고 올릴 때 문제없겠군. 현명한 처리에 감사한…….”
“잠시만, 페이튼 지부장.”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일 때, 옆에 앉아 있던 여기사 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천마와 뒤의 노달과 흑객까지 번갈아 본 후 매섭게 눈을 흘겼다.
“지부장, 이야기가 너무 빠른 거 아냐? 지금 이 이야기는 전부, 저 녀석들이 사실대로 말했을 때라고 가정하는 거잖아. 사실이 아니면?”
쏴아앗!
뒤이어 강렬한 무형의 살기가 퍼져 나왔다.
벌떡.
노달은 반사적으로 일어나고, 흑객은 얼굴을 굳힌 채 기세를 일으켜 방어했다.
다만 천마는.
“풋.”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웃어? 정말 겁을 상실했군.”
여기사 레이라는 이제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그녀는 창날처럼 뻗은 손가락으로, 천마와 노달과 흑객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지금 당신들은 우리 클랜의 산하 상단을, 특히 그 상단의 중요 인물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진행 중이던 의뢰를 박살 내 버렸어. 이는 딥 블랙에 대한 도전인 거야.”
“그래서?”
“당신들이 말한 게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거짓인지, 나는 말만 들어선 믿을 수 없어. 사실을 확인하려면 당신들이 진지하게 협조해 줘야겠다.”
협조. 라는 말에 강세를 주는 여기사.
암만해도 말이 협조이지, 실제로는 취조나 고문을 하겠다는 투다.
그녀는 한참이나 셋을 노려보다가 곧 노달을 보았다.
“어이, 늙은이. 이제껏 있었던 인연을 봐서 하나 묻겠다. 당신은 이번 일을 직접 봤나? 아니라면 잠시 빼 주겠어.”
“웃기는 소리.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망언을 하는 건가?”
노달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레이라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녀의 손이 허리로 향했다. 동시에 폭발적으로 기세가 솟구쳤다.
“사정을 봐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럼…….”
“어이, 계집.”
그때였다.
따악!
노달과 레이라가 대거리하는 것을 보고 있던 천마. 그가 가볍게 탁자를 두들겼다. 그러고는.
“설치는 것도 때를 봐 가면서 하는 거다.”
“……!”
너무도 자연스럽게, 폭언을 내뱉었다.
레이라의 눈이 커지고, 이마에 힘줄이 솟구쳐 오를 때.
따악!
또 한 번, 천마가 탁자를 두들겼다.
그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지, 철갑을 몸에 두른 여기사 레이라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천마는 그런 그녀를 보고, 다시 지부장 페이튼을 본 후.
“사정은 알겠는데, 적당히들 해. 난 너희들 장난에 장단 맞춰 줄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가 만만히 보였나?”
말과 함께 천마는 스윽, 시선을 내려 흑객이 가져온 보물함을 눈짓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이 가졌던 재물, 그게 담겨 있는 곳은.
“우리가 들고 온 관짝. 언제든 너희 중 하나가 그 주인이 될 수도 있지. 말해 봐. 누가 되고 싶어?”
꿈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 말 그대로 광오한 자세. 그런 천마의 모습에 딥 블랙 클랜의 세 명이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