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현경의 고수, 유장위 (1)
원래, 일이 꼬이려면 여러 가지로 꼬이는 법이다.
큰 난리를 겪은 딥 블랙은, 그렇게 일이 지나갔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에 태풍이 일어났다고 할까.
며칠 후 그들은 뜬금없는 후폭풍을 맞았다.
“…그러니까, 그 일은 저희들의 잘못입니다. 원래 의뢰의 위약금을 내고 배상하겠습니다.”
페이튼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 숙였다.
이번 주는 정말로 운빨이 망했다고, 어째 이런 일을 또 겪냐고 생각하며.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인물은 천하의 딥 블랙이라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였다.
“흥! 당연히 너희들의 잘못이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한데 위약금? 고작 그걸로 끝날 것 같나?”
지난번에 천마가 와서 뒤흔들고 간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각.
이번에 딥 블랙 사천지부를 뒤흔드는 상대는, 이전의 사내들보다 더 손속이 악랄했다.
페이튼은 눈앞의 현실을 인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옆에는 피박살이 난 레이라와, 중상을 입고 기절한 다른 클랜원들이 널려 있었다.
눈앞의 상대의 손에 반파된 지부 인원들은 아직 계산도 잡히지 않았다.
그 파괴를 일으킨 당사자는, 그러고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번 내 원정의 실패는 전적으로 네놈들 때문이다! 내 수하들의 목숨값과, 실추된 내 명성에 대한 배상 또한 해야 할 것 아니냐!”
“미…….”
미쳤냐 이 새끼야,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페이튼은 간신히 잡아 눌렀다.
속에서야 천불이 올라오지만, 그걸 뱉았다간 사천지부은 물론이고, 본부까지 천불이 떨어져 내릴 수도 있었다.
“미? 방금 뭐라고 했냐?”
꿈틀.
페이튼을 노려보는 장년 남자의 눈썹이 경련했다.
“미,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진노를 푸시기를…….”
페이튼은 철저하게 배를 깔고 엎드렸다.
눈앞의 상대는 지난번처럼 미심쩍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현경의 고수. 이장위.
그는 북북 귀를 파며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아, 그런 말이었나? 난 또. 미쳤냐 이 새끼야, 하고 욕하려던 줄 알았지.”
“…….”
페이튼은 생각했다.
이 새끼 다 알고 있다고.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그리고 실제로 그랬기에 더 골이 아팠다.
상대는 그냥 화가 나서 저러는 게 아니다. 자기가 억지를 부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래. 양심은 있는 놈들이로군. 네놈들이 가져오기로 한 보급품! 그것만 있었으면 내가 섬서에서 그 추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다.”
“…….”
“왜? 아닌 것 같나?”
당연히 아니다. 어디 던전 토벌대가 장난이던가.
식량이랑 포션 좀 빈다고 처발릴 정도로, 현경의 고수가 허약했던가.
그리고 그렇게나 중요한 보급품이라면, 왜 받기도 전에 출발했던가.
섬서에서의 대규모 던전 토벌이 갑작스러운 네임드 몬스터들의 급습으로 피박살이 났다는 건, 페이튼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자신들의 책임 소재도 미리 따져 보고 있었다.
그가 미처 따지지 못했던 건, 자칭 타칭 현경의 고수라는 유장위가 얼마나 얼굴이 두껍고 성질이 더러운 사람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정도였다.
“…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 저희들의 잘못입니다. 하하… 이런 때는 위약금이 아니라, 별도의 손해배상을 해 드려야 하지요.”
덕분에 이 꼴이 나고 있었다. 페이튼은 필사적으로 굳은 얼굴을 움직이며 웃었다.
“호오… 그나마 사람의 도리는 아는구만.”
“…….”
페이튼은 그냥 개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새끼는 도리를 따지러 온 게 아니다.
그저 화풀이 겸, 뭐 뜯어 갈 게 없나 분탕질 치러 온 것이니까.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여기, 손해배상 목록이다.”
펄럭.
유장위가 뭔가 잔뜩 적힌 황지 하나를 내던졌다.
페이튼은 반도 읽어 보기 전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러는 그에게 벼락이 한 번 더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추가로, 이번 원정의 보급에 차질을 빚게 한 그 상인을 내놔라. 우리가 직접 단죄하겠다.”
“……!”
페이튼의 얼굴이 굳었다. 참자 참자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유장위가 선을 넘었다.
직접 단죄하겠다고? 감히?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 한들, 딥 블랙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대놓고 죽이겠다고 한다고?
격한 반발심이 솟아올랐다. 지렁이조차 밟으면 꿈틀하는 법. 이제껏 인내하던 페이튼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왜, 문제 있나?”
“…….”
하지만 그렇게 솟구치던 반발심은, 유장위의 눈길 한번에 녹아내렸다.
바닥났던 인내심은 금새 소르륵 차올랐다.
페이튼은 유장위의 눈빛 속에서, 휘몰아치는 광기와 흥분을 본 것이다.
저건, 마수다.
대들면 그냥 죽을 뿐이다.
“문제 없습니다. 네, 없지요…….”
그렇기에 있는 힘껏 머리를 굴려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 페이튼은 그럴듯한 핑계 하나를 찾아냈다.
“다만, 아쉽게도 그 보급의 책임을 맡은 불성실한 놈이 이미 죽은 터라…….”
“무어라?”
“이름은 목이라 하옵고, 일을 대충대충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얼마 전 거물 의뢰주에게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애초에 유장위를 담당하던 상인은 목이 아니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사천지부가 갈가리 공중분해 되겠지만, 어차피 목은 이미 죽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목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도 이해해 줄 것이라 여겼다.
욕 좀 먹는 대신 사람 여럿 살리고, 클랜에도 도움을 주니 서로서로 좋은 것 아니겠는가.
“상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신뢰이지요. 하나 녀석은 큰돈을 보고 눈이 뒤집혀, 의뢰주를 배신했습니다. 금 백만 냥 때문에.”
“……?!”
유장위의 얼굴이 굳었다. 몸도 굳었다.
엄청난 금액의 황금은,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현경의 고수는, 이런 상식 밖의 이야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금… 백만 냥?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사천제일 상단도 그런 돈은 못 내!”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리그웨더 님이 그렇게 적극적이실 줄은… 아차.”
“……!”
그리고 거기서 슬그머니, 천무학관의 리그웨더를 언급하는 페이튼.
‘물면 끝이다. 새끼야.’
그는 조용히 밑밥을 깔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페이튼 역시 딥 블랙의 사천지부 지부장. 그 직위는 마작 해서 딴 게 아니었다.
그는 이 골칫덩이 현경 고수를, 같은 급의 현경 고수.
얼마 전에 목의 죽음을 알려온 천마, 그에게 떠넘기자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복수를 해 줄까 생각하던 차에 상황이 아주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거냐?”
상대가 입질을 해 오는 모습에, 페이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것이… 이 의뢰는 기밀을 제일로 요구하는 의뢰였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하! 네가 지금 나를 희롱할 셈이더냐? 그저 너희가 기밀을 지켜야 하니, 나더러 손해를 참으라고?”
유장위가 발끈하자, 페이튼은 간절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거절했다.
“그… 의뢰 내용을 발설하는 것은, 저희 클랜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됩니다. 배상금은 넉넉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유장위를 슬그머니 자극해 놓고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묻는다고 바로 대답하면 오히려 더 수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뭔가, 돈을 줄 테니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그 돈 안 받고 비밀이 뭔지 듣고 싶어 하게 되는 법.
“흥! 배상금? 그따위 것은 필요 없다. 나는 진실을 알아야겠다!”
티잉! 좌라락!
유장위는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서 금화 한 움큼을 꺼내 허공에 뿌렸다.
쌔액! 카카카캉!
그리고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이, 십여 개의 금화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쌔액! 카카카앙!
뒤이어 반으로 갈라진 금화들이 또 한 번 반으로 갈라졌다.
“대, 대단…….”
허공에 대중없이 흩어진 금화를, 단 일 초에 수십 번의 변화로 갈라 버리는 솜씨였다.
페이튼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감탄을 적절한 시기에 터뜨렸다.
그런데.
씨잇! 카라라랑. 카라라랑.
“……?”
씻! 카라랑. 카라라라라라라랑.
검이 멈추지 않았다.
더 빨라졌다. 금화는 두 조각이 네 조각이었다가, 여덟 조각, 열여섯 조각으로 쪼개지며 허공에 비산했다.
그리고 검이 더 빨라졌다.
까라라락. 차라라락. 타다다다닥.
“…….”
십여 개의 금화가, 어느새 수백의 금 조각으로 변해 허공을 누비고 있었다.
크기는 콩알만 하게, 그리고 쌀알만 하게, 다음으로 좁쌀만 하게 점차 줄어들었다.
싸사사삭! 사아아악!
유장위의 검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뭔가가 번뜩번뜩하며 반투명한 유리처럼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그 광경에 페이튼은 신음했다.
저게 어떤 경지의 무공인지 아는 탓이다.
“검막…….”
검기의 절정. 검강을 쓸 수 있는 경지의 고수가, 검기를 극한까지 펼쳐 내는 기예.
검기의 가느다란 실을 수없이 뽑아 내어 천처럼 만들어 내는 경지다.
방어이면서 공격이고, 공격이면서 방어인, 공방 일체의 극한.
페이튼은 이제 일부러 감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새삼 느낀 것이다.
찰칵.
유장위가 소리내어 검을 납검했다.
솨아아아…….
그와 함께 허공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페이튼은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검으로 금화를 가루로 만들다니. 저게 사람인가?
“나는 알아야겠다.”
“무, 무엇을……?”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었기에, 내 던전 토벌 원정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내 재산… 아니, 내 수하들의 죽음이 무슨 일에 얽혔는지를 말이다!”
“…아, 네.”
하지만, 무심결에 나온 유장위의 말에 그 경외는 곧 시들해지고 말았다. 페이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 새삼 느꼈다.
‘확실히. 경지와 인성이 비례하지는 않는군.’
현경의 고수라고 하면, 막연히 품격 있고 고고한 무림 대종사를 상상하는 법인데, 눈앞의 유장위는 그냥 탐욕의 덩어리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게 정상인 것 같았다.
하기야 수십 년을 오로지 검의 수련에만 매달리는 집념덩어리들이, 정상인일 리 없지 않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 분명히 말은 멋진데, 이제껏 그가 본 인물들은 죄다 괴상했다.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거나, 혹은 살짝 미친놈들이었다.
“말해라. 딥 블랙의 지부장. 나 또한 너희의 의뢰로 인해 피해를 받았다. 관련자나 다름없다. 내가 원하는 건, 배상금이 아니라 이번 일의 진실이다.”
“…….”
진실이 아니라 금 백만 냥이겠지? 하고 페이튼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적절히 고민하는 얼굴로 살짝 시간을 끈 다음, 며칠 전 천마에게 들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넘치는 심장.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리그웨더는 이 아이템을 얻은 사람의 정보에만 금 백만 냥을 준다고 했다.
그건 눈이 튀어나올 만한 이야기였다.
페이튼이 그때 그랬듯, 지금 이야기를 들은 유장위도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얻은 사람의 정보만 금 백만 냥이라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거액이었다.
누가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웃고 넘겼겠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천무학관의 학과장이라면 이건 이야기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그 아이템의 가치는 대체…….’
소유자의 정보만 주는데 백만 냥이니.
실물의 가치는 최소가 금 천만 냥.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금 1억 냥? 유장위의 눈에 탐욕이 뚜렷하게 어렸다.
“그래서, 그 녀석의 이름은? 어디에 있지?”
그는 이쯤 되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박살이 날 터.
그리고 승자는 떠돌이 일행들이 아닌, 유장위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한, 천무학관 2학년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