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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61화 (162/310)

161화. 현경의 고수, 유장위 (4)

와하하하. 시끌시끌.

수업이 끝났다. 학관생들은 삼삼오오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교실을 나갔다.

스슥. 사각사각.

교실의 자리가 하나하나 비어 가는 중에, 마지막까지 필기에 열심인 아이가 있었다.

기부금 입학생, 소진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휙. 휘익. 휙.

그는 몇 차례 손짓을 한 다음, 조금 전 들은 수업 내용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필기로 정리했다.

삼음절맥의 두뇌. 그 뛰어난 오성의 활용이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같은 내용을 한 장, 두 장, 세 장을 적는다. 이렇게 반복해서 필기를 하면, 들었던 내용이 완전히 뇌리에 박힌다.

“휴우… 됐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삼음절맥의 두뇌는 만능이 아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두뇌 회전이 빠를 뿐.

무예의 재능이 박탈된 그들은, 몸을 쓰는 데 일반인보다 어려움을 겪는다. 대신 단기적인 기억, 시각과 청각의 잔류 사념이 남들에 비해 뛰어나다.

휘릭. 휘리릭. 휙.

그래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삼음절맥이라 해도 모든 지식을 기억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암기력과 장기 기억력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이니까. 정확히는 ‘필요 없는 것을 잊는’ 기술이다.

수업 시간에 얻은 시각과 청각 정보에는.

수업 내용, 교관의 목소리,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아이들의 모습, 책상의 형태, 창밖의 모습 등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섞여 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따라서 그중 필요 없는 것은 머리에서 삭제하고, 필요한 것만을 심도 깊게 저장한다. 이게 사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기억하기보다 더 중요한, 잊기.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삼음절맥이 타고난 천재인 줄 알지만, 이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휘릭. 휘릭.

“그거, 세피로트의 생명나무냐?”

그런데 갑자기, 필기에 집중하는 소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

돌아보니 이한, 평소라면 수업 마치면 바로 뛰어나가기 바쁘던 그가 지금 뒷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하하… 아직 있었네? 무슨 일 있어?”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응……? 아, 생명나무? 맞아. 그런 느낌이야. 얼래? 이한도 기억법 공부한 적 있어?”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반짝였다.

“상승으로 가려면 다 하는 거 아니냐… 뭐, 나는 기억의 궁전인가 하는 방식이었지만…….”

“고전적이네… 나는 궁전보다 나무가 어울려서. 기둥에서 가지로 뻗치고, 가지에 기억의 열매가 맺히는 방식이야. 이걸 언제부터 했냐 하면…….”

심드렁한 천마의 말에, 소진은 오히려 반색했다.

기억법, 혹은 두뇌 활용법. 잠시 두 사람만 아는 대화가 오갔다.

한참 동안 자신이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는지, 그게 쉬워 보이지만 얼마나 고역인지 한탄처럼 늘어놓던 소진.

그는 뒤늦게 아차 싶어 천마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한?”

“음.”

천마는 잠시 숙고하던 끝에 물었다.

“학관을 만들자면 뭐가 필요할까?”

“…엥?”

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소진은 잠시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뭐가 가장 필요하냐고.”

“어, 아니, 그러니까…….”

불문곡직하고 본론부터 말하는 천마. 소진은 버벅대다가 일단 아는 대로 말했다.

“일단은 돈… 사람, 그리고 실적? 정도일까…….”

“돈, 사람, 실적이라…….”

천마가 계속해 보라는 듯 말끝을 흐렸다.

“우선은 부지가 있어야지? 좋은 곳. 적당히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교관들, 학관생들의 숙소가 있어야 하고 교실, 그리고 학관으로 기능하기 위한 본관. 여기에 실험실, 무예 단련실, 이런 게 전부 돈이야. 그리고 교관들 월급, 학관생들 식사 이런 것들…….”

그냥 돈이 아니라 땅도 들어간다. 학관은 건물이니까 당연히 넓은 부지가 필요했다.

그래도 이런 거야 돈으로 어지간하면 해결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쉽지 않다.

“우선 교두, 교관, 조교를 맡을 사람이 필요해. 능력 있고 잘 가르치는 사람들. 배울 만한 교수가 없으면, 학관생들은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흐음…….”

그건 그래도 어느 정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천마신교의 고수들이, 교인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교수든 학관생이든 자동으로 확보다.

교수가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인이 점점 성장해서 조교, 교관. 교두가 된다.

타 문파, 타 학관의 학생을 받으려고 할 게 아닌 이상, 천마신교는 이 부분에서는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근데 제일 중요한 게 실적이야. 학관으로 이름을 내걸려면, 위험 등급 14급 이상의 던전을 클리어해야 해.”

“그 정도라면 뭐, 어렵지 않네.”

“…어?”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얘기해 보자. 그 외에는 더 뭐가 있어?”

흥미가 가는 천마였다.

* * *

교무부장 이중구가 급히 마련해 준 텅 빈 교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흑객은 여유롭게 앉아 있는 맞은편 사내를 바라보았다.

많게는 50줄, 작게는 40줄에 들어설 정도의 삭은 얼굴.

그는 자신이 왔음에도, 쳐다보지 않고 들고 온 책자만 읽고 있었다.

‘이자는 누구지?’

흑객은 중년인을 경계했다.

이중구와 안면이 있는 듯 보였고, 어찌 보면 꽤 높은 직위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천무학관에서 높은 직위를 가진 이가, 예를 갖추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뭔가 낯이 익은 것 같은…….’

“오크로드 마나트를 죽였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흑객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초면에 반말 투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행동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흑객은 하오체로 대답했다.

“…그랬소.”

“그다음 쿠아토를 죽였고?”

“…그건 왜 물어 보는 거요?”

뭔가 취조받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약간은 짜증을 담아 대꾸했다.

하지만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정식으로 인사하지. 난 유장위라고 하네.”

“유장… 위?”

흑객의 머릿속에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

천천히 되물었다.

“설마하니 현룡(賢龍) 유장위란 말씀이십니까?”

어느새 흑객의 말투가 존대로 변했다.

그를 바라보던 눈빛 역시 달라져 있었다.

“현룡이란 별호는 요즘 잘 쓰지 않고. 무극뇌제(武極雷帝)라고 불러 주길 바라지.”

“……!”

흑객은 입을 쩌억 벌렸다.

이제야 이중구가 그리 깍듯이 행동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현존하는 강호의 천하오대고수 중 하나.

알려지기로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화경의 고수들 중 고작 다섯인 현경의 경지.

절대무학이라는 검강을 뿌리는 건 기본이고 검막, 그 너머로 이기어검까지 사용한다.

특히나 알려지기로 유장위는 파괴적인 힘인 뇌전까지 사용한다고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십 장의 주변을 완벽하게 초토화시키는 압도적인 무력.

그에 대한 소문이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뵙고…….”

“뭐, 그럴 게야. 별로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니…….”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던 흑객을 향해 유장위는 손을 내저었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거추장스러운 반응은 딱 질색이었다.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탁.

그는 화제를 돌리며, 읽던 서류를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짧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14급 이상의 몬스터를 잡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아, 그거 말입니까.”

흑객은 순간 직감했다.

조금 전까지 이자가 읽고 있던 책자가 무엇인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고, 아마도 학관 내의 정보를 저기에 담았을 터.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라…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나트는 몰라도, 쿠아토는 이미 14급 이상. 특히 그가 가진 폭식의 권능은 나도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말할 수 있어. 그 권능은 섭취를 넘어, 미비한 파동만으로 마비를 걸어 버리거든, 웬만한 아이템이 아니고선 방어해 내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

“…….”

“특히나 그걸 넘어 권능을 부쉈다고 해도 쿠아토는 쉽게 쓰러지지가 않아. 몸을 재생하는 능력 또한 그의 능력 중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유장위는 고개를 내밀며 조용히 쳐다보는 흑객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어 보인단 말이지.”

"……."

흑객은 그의 의심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장위의 말 중에 거짓은 없다.

학관에 알려진 실력은 그의 고작 남궁호 정도. 초절정 수준에 올라 반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실력이 아닌가.

상대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그것도 연거푸 일어났으니 이상할 법했다.

그러니 그저 그가 여기에 왜 왔는지가 궁금할 뿐.

"답을 하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천무학관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걸 네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나?"

“그건 저도 마찬가지겠군요.”

“호오.”

유장위는 흥미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성격이 까다롭다는 보고서를 읽기 했지만, 확실히 강단은 있어 보인다.

“좋아, 얘기하지. 자세하게까지는 몰라도 자네도 들어 보긴 했을 거야. 섬서에 큰 사건이 있었다. 수백의 도사들이 죽었고, 적들 역시 수천이나 수몰당했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학과장께서도 도왔고. 그렇게 어찌되다 보니 신세를 지게 된 거지.”

“…그게 이유입니까?”

“당연히 아니지.”

유장위는 흑객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죽인 목이란 녀석 말이지. 그 녀석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딥 블랙을 찾아갔더니 그놈이 죽었다는군. 그래서 이곳에 온 거다. 목을 죽인 놈에게 배상을 청구하러.”

“……!”

흑객은 그제야 연유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을 죽인 자가 왜 자신이 되었는지 그 이해관계(?)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게 좋았다.

천마의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이 줄었으니.

“그럼 이제 말해 보거라. 실력이 없는 네가 어떻게 녀석들을 죽인 거지?”

그의 물음에 흑객은 더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를 설득시키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았으니.

“뱀파이어의 힘을 이용했습니다.”

“뱀파이어?”

“예.”

흑객은 왼팔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힘을 주자.

화락.

괴이한 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슨!”

기겁하듯 뒤로 물러난 유장위.

흑객은 그를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의 도움을 얻어 그들과 싸웠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유장위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느 정도 설득당한 모습이었다.

이런 게 있는 건지도 모르는 그였기 때문이다.

“좋군.”

하지만 유장위의 호승심을 건드린 것일까. 아님 흑객이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일까.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장위가 웃어 보였다.

“한번 덤벼 보게.”

“……?”

“보기만 해서 어떻게 아는가? 한번 내게 너의 능력을 보여 보란 말이지.”

그는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었다.

“스치기만 해도 인정해 주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

“얼마나 가소로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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