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62화 (163/310)

162화. 현경의 고수, 유장위 (5)

흑객의 눈에서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절대고수의 도발. 그것도 드넓은 강호에서 무려 한 손에 드는 현경의 고수의 말.

그것은 그에게 기분 좋은 흥분을 선사했다.

“정말이라니까. 스치기만 해도, 널 인정해 주겠다고.”

유장위는 흑객을 보며 계속 도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흑객이 쿠아토를 죽인 거라면, 스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줄 만한 실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녀석이 아닌 다른 이의 개입도 염두에 둬야 할 터.

쿠아토는 그런 놈이다.

그에 대한 정보를 모른 채 싸운다면 현경의 고수도 곤경에 처할 수 있는 몬스터.

“오호.”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흑객을 보며 그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첫째로는 왼손 병기.

허리춤에 찬 검이 아닌, 몸을 통해 만들어 낸 긴 창.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물질로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눈빛.

잠깐이나마,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한 걸 감지했으니까.

“언제든…….”

그 순간, 유장위의 기도도 변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감싸고 있던 기류가 매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내기를 이런 식으로 발산하는 데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데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만 봐도 그는.

이미 일반적인 무인과 달랐다.

츠측.

그렇게 기류가 점차 안정이 되었을 때.

“오거라.”

자신감 있게 내뱉던 순간.

“……!”

유장위의 눈이 부릅떠졌다.

교실의 벽까지 거리를 벌렸던 흑객의 신형이 한순간 눈앞에 와 있었다.

그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쉬프트.

디딤발이 필요한 경공술과 달리 흡혈귀의 권능이라는 공간 이동이 펼쳐졌으니까.

촤악!

하지만 흑객의 창이 그의 허리를 베는 순간, 유장위는 그 자리에 없었다.

흑객의 바로 뒤에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곧장 반응했지만, 또다시 그 자리에 없었다.

‘이형환위!’

흑객은 곧장 그를 따라갔다.

쩌쩡! 쩡! 쩌저정!

번쩍거리며 공간을 이동해 공격하는 흑객.

교실 안을 번쩍임과 울림, 그리고 발 구르는 소리가 끝없이 수놓았다.

‘내가 느리다.’

흑객은 유장위를 쫓아가며 생각했다.

거리가 멀었다면,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는 그보다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걸.

그러나 지금 이동 거리는 최대가 교실 안.

그랬기에 이형환위의 반응이 미세하게 조금씩 빨랐고, 때문에 그를 쫓아가지 못했다.

‘할 수 없군.’

흑객은 창으로 오른 팔등을 그어 버렸다.

핏물이 솟구쳐 오르듯 튀어나오며 그의 움직임을 따라 사방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혈액 제어.

블라드의 권능 중 한 가지로, 피의 결계로 상대방을 묶어 두는 수법.

최근 흑객은 우연히 이 기술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동 중에 피의 결계를 만들어, 상대방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방법.

그가 이동 중에 뿌려 놓은 피들이 격자선을 만들어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다.

“잡았다!”

“……?”

희미한 피의 결계가 유장위의 몸에 들러붙자마자, 순간적으로 그는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흑객은 곧장 피의 결계를 터뜨렸다.

그 순간, 흑객은 아무리 유장위라도 약간의 상처는 입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뭐?!”

유장위는 다친 흔적이 없었다.

아니, 다친 부위를 발견하기도 전에 그의 주변에 도는 불길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뭔가 몸을 감싸기에 태워 버렸지.”

‘이익!’

흑객은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퍼억!

“크헉!”

달려들었던 방향대로 밀려났다.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공격.

“이봐,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 생각하는 거냐?”

유장위는 주저앉은 흑객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자 허리춤에 있는 검이 그의 손에 잡혔다.

현경의 고수들이 쓴다는 이기어검이었다.

“다시 덤벼. 그 정도로는 쿠아토를 죽일 수 없어.”

그의 외침에 흑객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어찌해야 하지.’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권능이 떠올랐다.

충분히 그를 난감하게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중심은 기본이다. 그것이 블라드를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천마가 했던 조언.

흑객은 머릿속에 소지하고 있는 경공술과 마공을 떠올렸다.

그 속에는 천마가 써 왔던 무공들과 노달이 사용했던 무공들이 있었다.

처억.

흑객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들었다.

오직 블라드의 권능만이 아닌, 무공도 함께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펼친 천마군림보.

사사사사삭.

편안하던 유장위의 얼굴에 약간의 이채가 서렸다.

‘오, 이건…….’

주변을 덮는 환영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환영처럼 보이지만, 전부 실재한다는 걸.

그리고 이어지는 여섯 환영들의 손끝에 피어오르는 녹색의 기운.

‘마공!’

그제야 그의 출신이 마교라는 게 생각났다.

쩌저정!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남과 함께 그의 신형이 벽 끝까지 밀려났다.

그럼에도 흑객은 멈추지 않았다.

그를 따라가 공격을 시도했고.

파파팟.

유장위는 수많은 환영의 공격을 모두 쳐 냈다.

그러던 그때,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뭐지?’

방금 자신이 쳐 내, 땅에 박힌 검.

그런데 그건 흑객의 검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처음에 병기로 물질화시켰던 신체.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더니 자신의 몸을 수직으로 그어 버린 것이다.

“큭!”

방어했지만, 늦었다.

어떻게 된 건지, 그 물질은 그의 호신강기를 뚫었다.

그리고 병기는 거짓말처럼 흑객으로 변하며 그의 신체까지 파고들었다.

“이놈!”

유장위는 결국 공격을 시도했다.

눈앞에 있는 흑객의 머리를 찍어 버렸고, 그 즉시 발로 밀어 버렸다.

‘아차!’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실로 상대를 죽을 수 있는 공격을 시도했다는 걸.

그 순간.

피를 흘리면서 뒤로 밀려난 흑객은 쓰러지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해맑게 웃는 흑객.

승리를 예감한 그런 웃음이었다.

“현경인 나와도 다른 신체, 금강불괴에 특화된 몸이로군.”

유장위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은 신체 강화에 주력한 편이 아니었다.

기의 운용과 몸을 가볍게 하느라 금강불괴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

“솔직히 쿠아토를 죽였다는 건 믿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는 인정해야 했다.

상대 역시 여간내기가 아님을.

“뭐, 시험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 * *

사람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클랜과 달리, 학관은 사람들을 길러 낸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성과를 확인하려고 감사가 나온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무공, 교수진의 자질, 그리고 학관 건물 등, 여러 가지 다각적인 평가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불합격을 받으면 학관은 폐쇄 절차에 들어간다. 학관 연합의 힘으로.

천마는 물었다.

“뭐야, 그게? 누굴 어떻게 가르치든 무슨 상관이라고 폐쇄를 하니 마니 해?”

“상관있지. 학관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악성 학관이 나오면 곤란하잖아? 학관 연합 전체의 이름을 깎아 먹는데.”

대격변의 날 이후, 리그웨더는 학관 연합을 출범시켰다.

초기에는 학관이란 게 어떤 개념의 체계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예전의 문파나 당처럼, 고압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수탈하는 학관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리그웨더는 학관 연합의 힘을 모아, 그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그런 사례가 쌓이자, 점차 신생 학관들은 알아서 수준 관리, 수질 관리에 들어갔다.

“그 판단은 누가 하는데? 결국 리그웨더 아냐?”

“학관 연합에서 각 학관의 교두급 인사 10명이 감찰하고 만장일치로 정하는 거야. 리그웨더 님이 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권력은 부패하니 안 된다고 하셨다나.”

“……?”

천마는 눈을 좁혔다.

듣고 보니 딴에는 절차라는 걸 갖추는 모양이다.

학관의 교두급 인사들 중, 리그웨더와 친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0명이나 되는 교두-화경급 고수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사안이라면?

무림인들이 자존심이 보통 센가. 그냥 친하다고, 시킨다고 따르지는 않는다. 학관 연합이 죄다 미쳐 돌아가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는 공정성이 확보된다고 봐야 했다.

“절차가 꽤 까다롭네…….”

다만, 학관을 유지하는 것에만 이 정도로 촘촘한 장치가 되어 있다면 새로 설립하는 것에는 훨씬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을 게 당연했다.

“애초에 돈부터 문제야. 학관 하나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금액은, 금 수천만 냥이 우습다고 하니까.”

“…수천만 냥?”

“응. 홍매학관이 그냥 파산한 게 아니라고.”

듣고 보니 그 정도면 무리다. 아무리 천마라 해도, 없는 돈을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었다.

부잣집을 털거나 상단을 털거나 하는 식으로 돈을 모았다간, 예전의 ‘강호 공적’처럼 취급을 받는다고 하니까.

리그웨더는 실질적으로 현 중원의 지배자에 가깝다.

하나 그녀조차 학관이라는 체제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학관을 운영하는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움직이지 않으면, 자발적인 발전과 노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학관은 함부로 못 만들어. 현경의 고수라 하더라도 클랜 정도로 운영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으음…….”

학관은 막대한 돈을 잡아먹고, 미래를 위한 동량을 길러 내는 기관이다.

그들이 만드는 가치는 사람이다.

뛰어난 전사나 마법사를 배출한다.

그리고 그들을 활용해서 돈과 인맥을 쌓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전 강호의 문파와 비슷한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서로서로 연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구성된 체제인 것이다.

천마는 그 마음대로 학관을 세울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당장은 클랜 정도로 시작해야겠군. 그나저나…….’

스윽.

천마는 소진을 다시 한번 보았다. 갑자기 매서운 눈길이 쏘아져 오자 소진은 덜컥 겁을 먹었다.

“이… 이한? 왜……?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아니, 쓸 만하다 싶어서.”

“……?”

쓸 만하다. 그게 천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소진은 그냥 똑똑하기만 한, 책벌레 같은 놈이 아니었다. 녀석에게는 ‘식견’이라는 게 있었다.

그냥 턱 하니 ‘학관을 세우려면 뭐가 필요하냐’라는 질문에, 이 정도로 막힘없이 술술 대답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쪽으로 본인이 많이 공부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무리 한 상단의 후계자라 해도, 천마는 여러 번 보았다. 제 그릇도 모르고 돈만 줄창 뿌리는 버러지 같은 놈들을.

‘이런 놈을 나중에 총관으로… 아니, 요새는 교무처장이라고 하나?’

삼음절맥 때문에 무공을 쓰지 못하는 거야 어쨌든, 소진은 나름 인재였다. 그것도 앞으로 무럭무럭 클 수 있는 인재.

퉤, 꾸욱.

그런 생각이 들자, 천마는 엄지에 침을 살짝 묻히곤 소진의 손등을 꾸욱, 눌렀다.

“으익?! 뭐 해! 이한!”

“응, 침 발랐다. 신경 쓰지 마.”

“……?”

“됐고. 우리 2학년 애들 아는 대로 좀 말해 봐라. 서문영, 운소령, 필리아부터. 그 외에 유능한 애들도 좀 말해 보고. 다른 반도 좋아.”

“어… 왜? 갑자기? 나 잘 모르는데…….”

소진이 살짝 경계심을 품고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천마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목줄을 잡았다.

“따로 파티 한번 짜 보려고. 너도 끼워 줄게. 아, 참. 나 따라다니면 떡고물 많이 떨어지는 거 알지?”

“……!”

끄덕끄덕. 파다닥!

소진은 그 말에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뒤져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천마는 시작이 좋다고 느꼈다.

‘역시나 이놈, 나름 인재 평가를 하고 있었군.’

소진, 이 녀석은 상단의 후계자다. 그리고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이다.

언제고 학관을 졸업하고 난 후에, 다시 만날 다른 학관생들에 대해 제법 정보를 모아 놓은 것이다.

파라락!

“어… 일단 서문영부터 말해 주면 되나? 일단 서문세가의 소공자이고, 무공을 익힌 근접 전사. 동시에 패스 파인더. 그리고…….”

“흐음…….”

일단 이 떠버리부터 포섭하면 금방이다.

같은 반, 같은 학년, 그 외에 천무학관의 다른 유망주들에 대한 정보도 금방 알 수 있을 터.

천마는 소진이 물어 오는 정보를 들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뭘 미끼로 쓰면 좋을까 생각하며.

‘역시, 무인에게는 무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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