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레이드 공격대 (2)
작전 계획실은 바빴다. 수많은 교관, 교두들이 저마다의 자료를 살피며 확인, 또 확인하기를 계속했다.
타닥. 타닥. 좌르륵.
높이 일 장. 폭 이 장에 달하는 거대한 지도가 한쪽 벽에 세워져 있었고, 그 지도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붉은색, 푸른색의 배치를 하며 그림을 그려 내고 있었다.
따악. 탁. 따악.
삼각형, 사각형 등, 색과 모양을 달리하는 지표가 지도에 달라붙었다.
지표는 지남철(자석)이고, 큰 지도 뒷면에는 얇은 철판이 덧대져 있었기에, 적당한 위치에만 놓으면 알아서 고정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 방식은 몇 년 전에 천무학관을 졸업한 한 졸업생의 발상이었다.
-누군가는 우습게 보겠죠. 하지만 이런 작은 아이디어가 모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훌륭해요.
발상의 결과물을 본 리그웨더는, 졸업생을 크게 치하하며 직접 어마어마한 금일봉을 내렸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의문을 가졌던 이들은 실제로 업무 처리를 해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어찌 보면 별것 아닌 발상이, 이런 대규모 작전의 경우에는 작전 정립에 큰 향상을 불러오는 것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정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탁탁.
제운비가 세 척이 넘는 지휘봉으로 지도를 두들겼다.
그는 이번에 필드 던전 공격대의 대장, 속칭 공대장이라 불리는 위치가 되었다. 체육학과 교두 뇌천벽은 심히 불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필드 던전 토벌 경험 42회.
공대장 경험 7회.
비록 무력 수준으로는 현경의 고수인 유장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한 번에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을 지휘해 본 경험은 그가 유일했다.
또한, 천무학관의 전력과 개개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이 역시 제운비였다.
“타락한 세계수, 세칭 어둠의 나무. 그 인근에 터를 잡고 마경을 지배하는 자는 본 드래곤 쉐이크, 세칭 고룡입니다. 지배 지역만 직경 3백 리에 달하는 거대 괴수지요.”
[어둠의 나무].
추정 위험 등급 17급에 달하는 고룡이 터를 잡은 곳.
본래라면 이 존재는 용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을 도를 닦아, 승천하여 용이 되었어야 할 이무기였다.
하지만 대격변의 날 이후 네크로맨서의 수호장 메피스토가 그 존재를 감지했고, 최고위급의 저주를 시전했다.
-삶은 죽음으로. 육신은 진토로. 신성은 마로 타락할지니.
용이 되려던 이무기는 전심전력으로 저항했으나, 끝내 근원이 오염당하여 마물로 변했다.
원래라면 신성한 신수가 되었을 존재가, 타락하여 마물이 되어 버린 비운의 운명.
-네놈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창천을 관장하는 용이 될 지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무기는 흑마법에 당하고서도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메피스토의 흑마법에 굴복했으되, 흑마법사의 수하로는 부려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나마, 용이 되어 신성을 각성했기 때문일까.
처음엔 메피스토가 명령을 내리면 링가드와 함께 몇 번 어울렸을 뿐.
학살이나 전투 같은 악의적인 명령은, 스스로 몸을 부술지언정, 술자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죽음의 나무에 기대어 잠든 고룡.
그 이름은 그래서 그렇게 붙게 되었다.
용이되 용이 아닌 존재. 이제는 용이 아니지만,
용이었던 때의 긍지로 인간을 해치지 않는 거대한 괴수.
리치왕의 수많은 몬스터 군단 중에서 몇 안 되게 자신의 지역만을 지키며, 먼저 공격해 오지 않는 이상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평화로운 몬스터.
그리하여 세인들은 그 존재를 고룡이라 불렀다.
딱딱.
세간의 이야기를 잠시 한 후, 제운비는 이제 거대한 뱀, 용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괴수의 그림을 가리켰다.
“본 드래곤 쉐이크, 이후 고룡으로 통칭합니다. 체장 13장. 미터법으로 40미터에 달하는 몬스터. 선행자들의 정보에 따르면 지역을 진창으로 만들거나, 질병 전파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항으로는 템페스트(폭풍우)를 불러내거나, 호흡곤란의 저주 또한 발현한 적 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용족 몬스터의 치환형 저주로 예상됩니다.”
힐끗.
제운비의 말끝에 뇌천벽은 리그웨더의 기색을 살폈다.
용족. 어찌 보면 드래곤과 비슷한 계열이다. 그리고 유사한 외모에, 강력한 술법으로 인간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점에 대해서는 리그웨더도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래서 조금 눈치가 보였는데… 리그웨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뇌천벽은 결국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정이 안 간다니까.’
길 가다가 개를 치어 죽여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색목인이든, 양귀든, 아니면 사람 모습의 인형이 갈기갈기 찢겨진 것만 봐도 마음이 선뜩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리그웨더는 추호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용족 몬스터. 용족 사냥. 이런 말에 저 얼굴이 조금이라도 찌푸려졌다면, 그랬다면 리그웨더를 조금 가깝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뇌천벽이 리그웨더를 항시 경계하고, 마음에서 멀리 두는 이유는 명백했다.
‘금룡, 당신에게 인간은 그저 쓸 만한 장기말일 뿐입니까?’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 모습을 한 다른 존재였다. 뇌천벽은 그것이 불편했다.
그가 이제껏 보아 온 리그웨더는, 아마 천무학관의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이였다.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분명 리그웨더는 중원에 거대한 새 흐름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살아가기 좋게 인도해 준 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대격변의 날 이후로 인류는 이미 멸망했어도 두어 번은 더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 아무리 그 점을 상기하려 해도.
뇌천벽은 왠지 모르게, 골드 드래곤이 인간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지수화풍. 네 가지 속성의 타락한 세계수가 흑마력을 생성, 고룡의 전투력을 상승시키고, 부상 시에 치유력을 발현합니다. 따라서 네 그루의 어둠 나무를 동시에 퇴치하고, 그 즉각 1군단이 진입하여 고룡과 전투합니다. 이상입니다.”
따악. 딱.
뇌천벽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브리핑이 끝났다.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작전 계획 팀은 제운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긴 한숨부터 쉬었다.
“으음…….”
“까다롭군…….”
“허어, 치환형 저주라니… 그저 역시 용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구려.”
용, 그들은 호풍환우(呼風喚雨)가 가능한 신수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그들 특유의 권능. 또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낫게 하거나, 주변의 사기(邪氣)를 흩어 숨을 편히 쉬게 해 주는 등의 능력이 있다.
고룡의 경우는 흑마법에 잠식당해 그 용의 권능을 역으로 사용하는 존재였다.
“권능을 봉쇄하지 않으면, 전사들의 움직임에 큰 지장이 있겠습니다.”
늪지화.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 하염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지역 변화.
“사제들과 신물, 성수와 포션을 있는 대로 모아야겠군요.”
질병 전파. 상세 불명의 급속 전염을 일으키는 저주.
“무거운 갑주로 무장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기동력에 다소 제약을 받더라도, 바람에 날아가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폭풍 소환. 기후를 변경하여 폭우를 뿌리거나, 강력한 바람으로 거동조차 힘들게 만드는 권능.
“호흡이라… 이건 대체 어떻게 막아야 할지 답도 안 나옵니다만?”
그리고 호흡곤란까지. 작전 기획 팀은 아는 대로 최대한 머리를 짜내었다. 그래 봐야 결론은 하나뿐이지만.
“타락한 세계수를 먼저 퇴치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고룡이 부릴 수 있는 권능은, 결국 고룡 주변의 네 그루의 어둠 나무에서 비롯된 것.
따라서 어둠 나무를 파괴하면, 고룡의 권능은 줄어든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전투 중에 한두 번 정도밖에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뭐… 알고 있던 이야기기는 한데… 그럼 탑 파괴단의 손실은 어쩝니까?”
“그러게요…….”
문제는 지극히 정석적인 이 방법이, 작전 중에 심대한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계수, 세칭 어둠 나무는 그냥 시커먼 보통 나무가 아니었다.
녀석들은 살아 있는 저주이자 몬스터였고, 어둠 나무가 뿜어내는 파동에 이끌려 온갖 잡다한 몬스터들이 주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중이다.
어둠 나무를 퇴치하려면 그 우글대는 몬스터들을 먼저 처치해야 하는데, 그 싸움의 와중에 어둠 나무 또한 개입할 것이다. 앞서 언급된 고룡이 발현하는 저주를 쓰면서.
이렇게 되면 장담컨대 백 퍼센트.
탑 파괴단은 심대한 인명 피해를 입을 것이다.
“아무래도 2군단에도 전력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그랬다간 정작 1군단의 전력이 약해집니다. 본 드래곤 쉐이크는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닙니다.”
“그럼 어쩌잔 말입니까. 교관들이야 어떻게 살아남겠지만, 100명의 4학년생들 중 20명이 사망할 거라고 예측되는데, 이걸 그냥 진행해야 합니까?”
“그건 일단 좋은 장비와…….”
“그래 봐야 1군단이 이미 알짜를 가져가고 난 후 아니오!”
교수들이 옥신각신, 저마다 의견을 내놓으며 난상 토론을 벌였다.
매년 2~3건씩 대규모 던전을 토벌하긴 하지만, 이번 건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난이도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거부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식처럼 키우고 길러 온 제자들, 학관생들의 떼죽음.
교수들로서는 결코 반길 수 없는 난제였으니까.
* * *
“교두들과 교관들의 반발이 심하더군요.”
회의가 파행이 되자,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리그웨더와 계획실 옆 한쪽 방으로 이동한 유장위는 조용히 앉아 예를 표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죠.”
리그웨더는 냉정하게, 오로지 전략적인 관점에서만 현 사태를 진단했다.
넘치는 심장. 오크들을 생육하고 번성시키는 그린스킨의 신물.
이제껏 홍매학관에 있던 아이템을 쿠아토가 가져가려고 했던 이유는 간명하다. 그들의 주인이 부활하기 전, 전력을 최대한 모으려는 것.
리치왕은 총 네 개의 신물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각 종족들에게 엄청난 축복을 내리는, 말 그대로 신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티팩트.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진 신물은 고룡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골드 드래곤인 리그웨더조차 설마하니 오크 종족의 생멸을 좌지우지할 넘치는 심장이, 홍매학관의 창고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일단 하나가 들어왔어…….’
그러니 지금이 바로 기회다.
넘치는 심장에 이어 고룡이 수호하는 또 하나의 신물, 그 행방을 알고 있는 지금이.
메피스토가 갑자기 경계를 강화해서 고룡이 지키는 신물을 옮겨 버리기라도 하면, 인간들은 다시는 손에 넣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약 희망적인 관측으로, 리치왕이 깨어나기 전까지 무림이 사대 신물 중 두 개를 소유하고 있다면, 부활하는 리치왕의 군세를 적어도 3분지 1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피해는 불가피해.’
그렇기에 최정점에 있다고 알려진 본 학관의 고수를 모두 대동할 생각이었다.
중원 어디에도, 화경의 고수가 천무학관만큼 많은 곳은 없었기 때문에.
끼이이익.
때마침 문을 들고 들어오는 교두가 있었다.
제운비였다.
“무슨 일이죠?”
“학과장님, 아무래도 이번 계획에 무림맹의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죠?”
제운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수를 내려고 해도, 인명 피해가 극심할 것 같습니다. 학관생들이 위험해지니 무림맹의 고수들을 지원받아, 최소한의 피해로…….”
“그건 안 돼요.”
그녀의 대답에 제운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그웨더는 그를 향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죠. 무림맹의 도움을 받게 되면, 나중에 아이템 분배에 대해 말이 나올 거예요. 지금 우리가 노리는 건 고룡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의 탈환도 있지만.”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4대 수호장 중 하나인 메피스토. 그가 고룡을 속박하기 위해 사용한 언데드의 신물, ‘저주받은 성배’를 회수하는 것입니다.”
“언데드의… 신물?”
“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얼굴로 제운비가 눈을 좁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껏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한 적 없었으니까.
“살해한 자를 언데드로 만드는, 언데드들의 권능이 담긴 부정한 신물이지요. 그걸 잃게 되면, 이 대륙에서 더는 언데드가 늘어나지 않게 됩니다.”
넘치는 심장에 이어, 또 하나의 전략목표가 알려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