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파티 짜기 (1)
필리아와 운소령.
하나는 정령사. 공방 모두에 도움이 되며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평가.
또 하나는 몸이 빠른 쾌검수. 심지어 머리도 좋아 어지간해서는 시키는 걸 잘 따라와 줄 전력.
이 두 사람은 소진 역시 던전 파티에서의 필수 전력으로 본 바 있다.
이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 또 뭘 감시하려고?”
그럼에도 천마는 짐짓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전의 일 때문이다.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럴 리가. 네 할머니가 뭐라 안 하디?”
“…….”
운소령은 입을 다물었다.
천마가 말한 운소령의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아니다.
고조, 아니, 종조쯤 되는 고모할머니, 제갈유진이다.
세수 170에 달하는 까마득히 높으신 어른. 심지어 그분이 지난번에 따로 하신 말씀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 소협과 연분을 맺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천룡의 비늘 한 장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제갈세가의 홍복이 될 테니까.
-조.… 종조 할머님?
-네가 들이는 노고를 제갈세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말거라.
말인즉슨, 여인으로서 유혹하는 것도 마다하지 말라는 것. 운소령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렇게 어버버 하는 태도를 보고 천마는 한마디를 더 쏘았다.
“파티원은 싸울 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들여야지.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들여?”
“다, 다른 목적이라니……?”
“뻔하잖아. 운소령은 내 허실을 탐지하는 게 목적이다. 내 최고의 절초를 쓰면 이 사람이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알릴지 모른다. 이런 불편한, 매사 눈치를 살펴야 하는 사람을 파티원으로 넣어? 싸움이 장난이야?”
“아… 아니야!”
운소령이 경악해서 소리 질렀다. 이야기가 상상도 못 했던 방향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마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뭘 그렇게 놀라? 정말 그럴 사람처럼?”
“…뭐?”
“그냥 한번 짚어 본 거다. 네가 해 봤자 내 허실을 탐할 수 있을 리도 없지. 같이하자. 잘 부탁한다.”
스윽.
말과 함께 천마가 손을 내밀었다.
“…….”
“왜. 싫어?”
“아, 아니…….”
운소령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푸욱,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시작부터 엄청 기선을 빼앗긴 기분인데…….’
그리고 천마는 속으로 웃었다.
‘기를 좀 꺾어 놔야 해.’
운소령은 2학년 수석인 데다,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인재다. 그러다 보니 파티를 천마 마음대로 굴리려 할 때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를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시작부터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에 첩자질 하는 거 아니냐고 괜히 시비를 건 것은, 그걸 위한 포석이었다.
“이한,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오, 서문영.”
다음으로 천마에게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서문영이었다.
같은 반 최고의 인재들이 제 발로 찾아드니, 하나하나 입맛대로 고르는 맛이 있어 천마는 기분이 좋아졌다.
“함께 파티를 꾸리고 싶다. 네가 좋다면…….”
“좋아, 대신 파티장은 내가 하고 싶은데.”
“…네가?”
서문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당연하잖아. 이쪽은 나, 소진. 뭐. 이렇게 둘이야 네가 보기엔 좀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운소령과 필리아도 합류했어. 전력으로는 차고도 넘치지 싶은데.”
천마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그리고 운소령은 내가 파티장인 걸 인정했어.”
“운소령이……?”
“그렇다니까. 물어보든가.”
“으음…….”
천마의 말에 서문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인정한 적 없었다.
하지만 아까 운소령의 기를 팍 꺾어 놨으니 지금 와서 반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네가 파티장이면 오히려 짐이 무거울걸? 전방에서 함정이나 적 동향을 탐지해야 하잖아.”
“맞아.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 던전에서 패스 파인더의 시야는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파티장이 되면 저 둘, 분명히 나랑 소진을 얕잡아 볼 거란 말이지.”
천마가 턱짓으로 종천도와 언규, 서문영의 두 딸랑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굳이 불편한 파티를 꾸릴 필요가 없고. 좀 더 솔직히 말해 볼까? 서문영, 너 혼자라면 파티장 권한을 줄 수도 있어.”
“…….”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낫지. 경험 많은 패스 파인더가 파티장인 게. 잡음 나지 않게 다른 두 사람을 더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냥 네가 파티장 해도 돼.”
“다른 두 사람? 누구?”
“방윤과 당무련.”
“……!”
서문영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혹시… 엘리트 파티를 짜자는 거야?”
엘리트 파티.
한 반에서 모을 수 있는 최고의 전력으로 꾸려진 파티. 가장 강한 사람들만 모았기에, 전력이 충분하다면 굳이 3학년 선배와 동행하지 않아도 된다.
“가능하다면. 솔직히 저 둘을 끌어들이는 데는 내가 아니라 네가 더 제격이잖아?”
천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애초에 그의 노림수는 여기에 있었다. 실력은 좋지만, 천마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두 유망주. 그들을 파티원으로 포섭하려면 서문영이 더 제격이었다.
바로 이름값. 무예나 실력이야 천마가 더 높지만, 이제껏 같은 반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구심점 역할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쪽이 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니까.
“세어 보라고. 서문영, 운소령, 필리아, 거기에 땡중 중에서 대빵인 방윤. 여기에 트래퍼이자 사천당문의 당무련.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비벼 볼 만하잖아?”
“…듣고 보니 그래. 독립 작전권을 요구할 수도 있겠네. 그 정도면.”
서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 작전권.
파티의 자체 판단으로 작전지역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원래라면 고작 2학년 수준으로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아니지만, 던전은 애초에 변수투성이다. 3학년이라고 해서 무조건 2학년보다 강하고 기민하다는 보장이 없다.
-2학년이든 어떻든, 실력이 충분하다고 검증받게 되면, 자율적으로 행동 방침을 정하고 강행할 수 있다. 그러니 열심히 준비해라. 머리가 될지 꼬리가 될지는 다 너희하기 나름이다.
이는 던전학과 수업에서 월산 교두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전례 또한 충분했다.
“그렇다곤 해도…….”
“저 두 사람에게는 미안할 수 있겠지만, 좀 더 대승적으로 보라고. 이번 평가에서 충분한 자격을 증명받으면, 나중에 네가 끌어 주기에 더 편할 텐데?”
“…틀리지 않는 말이군. 좋아. 이야기를 하고 오지.”
조금 망설이는 서문영에게 몇 마디를 보태주자, 그는 곧 납득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소진은 혀를 내둘렀다.
“…이한, 악마 같애.”
서문영이 종천도와 언규, 두 사람에게 뭐라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크게 화를 내고, 이제껏 거만했던 서문영이 고개를 꾸벅꾸벅 해 보이는 모습이 차례로 비쳤다.
“뭘, 이 정도로.”
천마는 크크 웃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한때는 악마가 아니라 천마로 불렸던 몸이다.
* * *
“엘리트 파티? 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방연과 당무련이 합류하고, 파티 전원이 찾아가자 월산 교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군들이라면 3학년의 감수를 받지 않아도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운소령에 필리아, 서문영에 당무련, 방윤이라…….”
힐끗.
하나하나 이름이 쟁쟁한 파티원들을 돌아보며 교두 월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게 두엇 끼어 있기는 해도.”
참고로 이때 바라본 두 사람은 천마와 소진이었다.
그러자 서문영이 슬쩍, 둘의 앞을 막아서며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이한은 최근 무예가 급상승했고, 소진은 여러 지식이 많아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인원입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교두님께 추가 영입 인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추가 영입? 누구?”
“4반의 하백운과 이경. 두 사람을 함께 넣어 주시면 어떨지요.”
“…오!”
월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법사 반이라 불리는 4반, 그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 하백운과 이경이다.
천마도 천마대로 나름 강자들로 인선을 짰었지만, 서문영은 그보다 더한 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반과 4반의 최강자들이라… 이 정도면 일개 파티를 짜기에는 과잉 전력이 아닌가?”
스윽.
시험하듯 월산이 바라보자 서문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던전은 생물이다. 과한 전력으로 가볍게, 다치지 않게 놀다 올 전력을 짜야 한다’라는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하하핫!”
월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서문영이 한 말은 월산이 수업 중에 늘 하던 말이었던 탓이다.
장래가 유망한 학생이, 자신이 가르친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걸 주창하는 것. 교수로서 가장 기쁜 때가 이런 때일 것이다.
“좋아, 좋아, 훌륭해. 무투파인 제군들이니 마법사가 필요하단 말이지? 내 책임지고 데려오지.”
월산은 흔쾌히 서문영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2학년에서 가용한, 최고의 엘리트 파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학년 3반 엘리트 파티.
파티장 서문영. 부장 운소령. 이하 7인. 총 9명
서문영: 패스 파인더. 부탱커. 뇌천벽력도(무)
운소령: 근접 딜러. 월녀검법(무). 무당 제운종(신).
당무련: 트래퍼. 원거리 딜러(암). 당문독공(무)
방 윤: 메인 탱커. 소림칠십이종절예(무)
필리아: 정령사 (중). 사대속성 (지)
하백운: 원거리 딜러. 중위 마법사 (풍)
이 경: 원거리 딜러. 저위 마법사 (무)
소 진: 원거리 딜러. 학술사. 맵퍼.
이 한: 근거리 딜러. 서포터.
펄럭.
“흐음…….”
원상은 팍 삭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월산 교두의 직인이 찍힌, 협조 공문을 보고서였다.
한 명 한 명이 분명, 무시 못 할 인재들이다. 원래라면 이들 한 명만 그의 아래에 들어와도 쾌재를 불렀을 터.
하지만 그 인재들이 작당해서 선배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들이받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엘리트 파티? 독립 작전권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서문영이 담담하게 대답하고, 원상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좋아… 다 좋다고. 다른 일곱은 다 인정해. 그런데 제일 아래의 두 놈은 뭐야?”
스윽.
대놓고 경멸하는 눈이, 소진과 천마를 향했다.
안 그래도 제풀에 쫄아 있던 소진이 고개를 숙이자, 원상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기부금 입학생! 이런 짐을 두 개나 달고도 그렇게! 돌아 다닐 만큼 만만하냐! 어? 던전이 장난이야?”
“소진은 단순한 기부금 입학생이 아닙니다. 그는 학술사로 충분합니다. 삼음절맥이니까요.”
학술사.
카르삭 왕릉에서처럼, 던전 내의 유물이나 벽화, 혹은 여러 가지 단서들을 찾고 실마리를 분석하는 직종이다.
대개는 고고학자나 학술적 지식이 높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문 직종이며, 유적이나 고대 유물이 발굴되는 던전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고급 직업군이기도 하다.
“시발, 그럼 이 새끼는 뭐야? 서포터? 너, 뭐 돈 먹었냐?”
“…그건.”
뒤이은 원상의 호통에, 서문영조차 이번에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서… 성실합니다. 아주, 네…….”
서포터, 지원 담당. 좋게 말해서 보급 책임자.
그걸 나쁘게 말하면… 그냥, ‘짐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