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파티 짜기 (2)
펄럭!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지역 특성 – 습지.
출현 마물 – 이하 기술.
사자수인(死者獸人) 부패저인(腐敗豬人)
수급장수(首級將帥) 환사기사(幻死騎士)
이하 생략.
“…난 아닌데.”
“후우.”
독립 작전권을 배정받은 것이 심히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3학년은 지도 한 장과 주의할 몬스터 요약 한 장만 덜렁 넘기고 가 버렸다.
작전 지역에 대한 주의 사항도, 필수 지침도 알려 주지 않은 채로.
그래서 머리를 맞대고 모인 9명은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잘됐네. 잔소리하는 꼰대들이 없어서.”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상황에 대해 말했다.
너무도 태연자약한 그를 보고 마법사 이경은 고민했다.
‘이거, 예감이 좀 안 좋은걸… 지금이라도 철회하고 다른 파티로 가야 하나?’
엘리트 파티라는 말에 두말할 것 없이 달려온 참이다.
독립 작전권이 주어진다는, 즉 선배인 3학년의 갈굼 없이 마음 편하게 2학년끼리 짜는 파티라는 게 얼마나 좋았었는지.
하지만 직접 와 보니, 선배들의 투명 인간 취급은 극심했고, 그조차 알아먹지 못하는 이한이 까불어 대고 있었다.
서문영이나 운소령과 달리, 천마와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다.
이전에 4반과의 전투 때 나름 활약했다지만, 그런 요행이야 천무학관 출신이라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법.
그로서는 고민하는 게 당연했다.
“이봐, 이한. 너는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냐?”
혼자서 고민하던 이경과 달리, 마법사인 하백운은 대놓고 그에게 인상을 썼다.
천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내가 뭐?”
“3학년이 아무 지침도 알려 주지 않고 가 버렸잖아. 전혀 모르는 미지의 지역인데, 고민하는 게 정상 아냐?”
‘당연히 그게 정상이지.’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강력한 한 방을 가진 대신, 접근전에 절대적으로 취약한 포지션.
준비된 마법사는 전사 열 명도 무섭지 않다.
하지만 기습당해 쓰러질 경우, 마법사는 짐꾼 하나만도 못하게 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나, 파티의 안전한 전력을 위해서나, 마법사는 거리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러니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비슷했던 것이다.
“머리가 빈 건지. 아님 그렇게 보이려는 건지…….”
천마의 말에 하백운이 발끈했다.
“너, 뭐라고 했냐?”
“시작하기도 전부터 꼰대들 뻥에 넘어간 녀석이 있네, 그려.”
천마는 그런 그들의 긴장감을 역이용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뭘 시작하기도 전부터 쫄고 있어? 그렇게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안 말려.”
쉿. 쉿.
개 쫓듯 내젓는 손. 하백운은 그 모욕적인 비아냥에 지팡이부터 와락, 움켜쥐었다.
“쫄아? 너 지금 말 다 했…….”
“하백운. 이한의 말은 우리 배당 지역이 험지는 아닐거라는 말이야.”
스윽.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 같아지자, 서문영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무슨 근거로?”
서문영이 하는 말이다 보니, 하백운도 조금 멈칫했다.
“어둠의 나무. 이 지역은 3학년도 경험이 없어. 우리나 선배들이나 낯설기는 매한가지지. 어차피 줄 정보도 없을걸.”
“맞아. 그리고 완벽주의 월산 교두님이 언질하셨을 테니, 우리 선에서 대처 가능한 지역이 할당되었을 거야.”
뒤이어 운소령이 첨언했다.
“…운소령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학년 차석과 수석이 동시에 들고 나오자, 하백운도 조금은 듣는 척을 했다.
던전학과 교두 월산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안전제일 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엘리트 파티라고 한들, 2학년에게 배정할 지역이라면 크게 위험한 곳은 아니리라.
만에 하나 3학년들이 엿 먹으라고 2학년에게 넘긴 지역에서 위험 요소가 있어, 자칫 사상자라도 발생하면?
월산 교두의 극대노는 당연하다.
그러면 작전 지역을 배당한 3학년도 최소한 제대로 된 졸업은 하지 못할 터.
툭툭.
서문영이 이어서 지도를 두들겼다.
“본제로 돌아가지. 보다시피 지역은 습지야. 정상적인 기동이 크게 제한돼. 이 경우 마법사, 탐지 방식은?”
패스파인더로서 마법사에게 ‘지형 수정’이 가능한지를 전략적으로 묻는 질문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마법사는 강한 화염을 불러내어 습지를 마른 땅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음…….”
습지는 방사형으로,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퍼져 있었다. 수십 수백의 물웅덩이. 그리고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높이 자란 물풀과 나무 그루터기도 빽빽할 터.
곰곰이 지도를 들여다보던 하백운이 까닥하고 이경에게 눈짓을 했다.
스윽.
외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이경이 짧게 말했다.
“고속 기동. 타초경사.”
“흠.”
“과연.”
서문영과 하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에서 고속 기동?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물론 짐작 가는 게 없는 사람도 있었다. 방윤이었다.
“습지니까. 기동에 제한받는 건 우리만이 아니라는 거지. 위험 등급 12급 이상이 아닌 이상, 적의 기동 역시 느리고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백운이 풀어서 설명했다.
“습지에서의 전투는... 솔직히 꺼려지지. 발판은 무르고, 중갑을 착용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지는 늪도 있다. 그러니 방법은 둘이야. 하나는 철저히 느리게. 조심조심 신중을 기해서 가거나…….”
“아니면 재빠르게 치고 지나간다고? 희한하네. 여기에 위험한 적이 없다는 보장이 있어? 등평도수로 달리다가 적습이라도 받게 되면?”
당무련이 손을 들었다.
당연한 물음이었다.
애초에 습지. 수면 아래 뭐가 있는지 모를 지형이다.
거기에 물풀처럼 시야를 제한하는 지물이 있을 경우, 제 발로 적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인간과 달리, 몬스터의 감각은 지독하게 예민하니까.
“그래서 타초경사라고 했잖아. 예를 들어 이 웅덩이 같은 경우…….”
쿡.
운소령이 지도의 물웅덩이 하나를 짚었다.
폭이 약 4장. 등평도수로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내력으로 수면을 딛고 달릴 수 있을 거리다.
“여기. 이쪽의 가장자리에서 이쪽으로 바로 건너뛰는 거지. 주변에 몬스터가 있다면 우리가 움직이는 걸 보고 대뜸 달려올걸? 하지만 여기는 지역이 충분히 넓어. 발판을 확보하고 사격 개시.”
“…아.”
당무련이 뒤늦게 알아차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타초경사의 계.
풀숲을 두드려서 뱀을 튀어나오게 한다는 말로, 이 경우에 딱 들어맞았다. 물웅덩이 주변에는 풀숲이 즐비할 테니까.
‘이걸 생각 못 했다니. 바보같이!’
당무련은 대충 어떻게 돌아갈지 예상이 되었다.
일격 이탈. 그리고 또 일격 이탈.
경공으로, 혹은 마법으로 물 웅덩이를 뛰어넘으며 요란하고 시끄럽게 이동한다.
소음과 요동에 이끌린 몬스터들이 모여들면 파티원 전원이 모여서 일제히 공격 개시.
이런 식으로 여러번 반복하면 그냥 끝난다. 투사 무기, 암기를 쓰는 원거리 딜러로서 가장 이상적인 전장이다.
“좋군! 그때는 당 소저가 엄청나게 활약할 기회가 되겠어. 기대하고 있을게.”
툭툭.
혼자서 기분 상한 당무련의 어깨를 두들기며, 방윤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다들. 4장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지? 문제 있는 사람?”
“어… 나… 좀…….”
스르륵.
유일하게, 얼굴을 들지 못하고 손을 든 사람.
소진이었다.
“…….”
“…….”
덕분에 일행은 잠시, 사정 없이 침묵에 잠겼다.
“신발… 빌려줄까?”
“…아니, 나도 어떻게든 해 볼게.”
운소령의 말에 소진은 더욱 죽고 싶어졌다.
* * *
사흘 뒤.
“페미컨, 식수, 금창약, 포션, 그리고…….”
턱, 턱, 구깃구깃.
짐 가방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총 9명이 먹을 음식과 갈아입을 옷.
기타 여분의 병장기나 암기까지. 들고 갈 짐이 한참이나 되다 보니, 다 챙겨 넣은 가방은 사람 하나만 한 크기가 되었다.
“저… 이한, 괜찮아?”
“뭐가?”
“그러니까… 모두의 짐을 너 혼자 맡아 든다는 게 기분 상하지는 않느냐고…….”
소진이 쭈볏쭈볏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머지 일곱이 죄다 대단한 전력인 만큼, 원래라면 그 역시 천마만큼 어마어마한 짐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파티에서 짐꾼이라는 게, 어떻게 봐도 좋은 자리로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천마는 그런 자리를 생각보다 중히 여겼다.
“짐꾼이라는 게 뭐, 꼭 나쁘지만은 않지. 모두의 보급을 책임지는 자리이니까. 상당한 중책이지 않나?”
“그렇게 봐준다니 다행이다.”
서문영이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던 걸 풀며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천마의 이어진 말에 곧 입을 쩍 벌리며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뭘? 물건을 담당한다는 게, 전리품에서도 마찬가지잖아. 아냐?”
그랬다.
2학년과 3학년이 담당하는 외부 지역 정찰. 그 정찰은 실제적으로는 위력정찰로, 주변의 특이 사항을 살피는 가운데 자잘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한데 단독으로 혼자 사냥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천마의 파티원 모두는 다 함께 사냥을 하는 셈이고, 그런 만큼 몬스터를 잡아서 나온 아이템도 공동 분배를 거친다.
“아이템을 손에 넣자마자, 바로바로 정산할 만큼 돈 가져온 게 아닌 이상, 그건 죄다 내 손에 있는 거라고. 봐, 싫어할 게 뭐가 있어?
“……!”
“…천잰데?”
먼저 입을 벌린 건 서문영.
다음으로 입이 벌어진 건 소진이었다.
“그리고 짐꾼인 이상, 내가 전투에 전면으로 나서야 할 이유도 없고. 여차하면 너희들이 나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잖아. 특히나 당무련? 쟤는 나 없으면 두어번 싸운 뒤에 개털이라고. 그만큼 극진히 받들어 모실 텐데, 이런 꿀보직을 내가 왜 마다해?”
“…하아.”
당무련이 천마의 말을 듣고 멍청한 얼굴로 신음했다.
발상을 전환해 보니 분명 그렇다.
당무련은 새삼 천마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를, 그리고 이제까지 왜 기묘하게 불편함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는 명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극에 달한 실리 위주의 성격이다. 이런 건 위험하다.
그리고 그건 가문에서 늘 교육을 받던 방식과도 맞닿아 있었다.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녀석!’
당무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짐꾼’이라는 자리가 넘겨졌다면 격분해서 차라리 파티를 탈퇴하고 말지,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한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짝 눈썹을 꿈틀하는 것 같더니, 대번에 저렇게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더 대단하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여차하면 자신의 생각 자체를 바꿀 수 있다니.’
소리장도(笑裏藏刀)라고 했던가.
흔히 이런 이를 일컫어, 효웅이니 이빨을 숨긴 맹수니 하고 부르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사천 당문에서 태어나 자란 당무련이었기에, 그녀는 동족(?)의 심리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녀석의 진짜 실력도 볼 수 있겠고.’
당무련은 이한을 누구보다 눈여겨 보았다.
이 파티에 참가한 가장 큰 이유.
과연 그가 정말로 운소령과 서문영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실력을 쌓았는지, 라든가.
머지않아 곧 알게 될 거라 생각하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