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파티 짜기 (3)
다각다각. 다각다각.
학관에서 어둠의 나무 던전까지는 대략 1주 거리였다.
무인들이 경공을 발휘했다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싸움은 병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식량, 보조 무기, 투사 무기, 야영 물품 등, 공격대를 운용하는 데는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다.
특히 이번 던전은 적 개체의 대부분이 언데드인 데다 사기(邪氣)로 오염된 지역이 많았다.
그런 만큼 필수적인 물자가 있었다.
쿠르릉! 콰가각!
“바퀴가 빠졌다!”
“성수 통 조심해! 부적 묶음도!”
바로 성수와 부적이었다.
신성을 품은 성수는 언데드에게 상극으로 작용한다.
그저 뿌리기만 해도 효과가 탁월하다. 극독에 맞은 듯 지글지글 녹아 들어가니까.
“야! 야! 다들 붙어!”
“제기랄, 대체 이게 몇 번째야…….”
하지만, 성수는 결국 신성력을 품은 물일 뿐.
물통을 가득 담은 수레는 엄청 무거웠다. 그렇다 보니 길이 조금만 허술해도 푹푹 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흙탕에 빠진 수레를 끌어내는 것은 잡일.
다르게 말해, 이번 공격대에 참가한 2학년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끄으응! 으으윽!”
과가각. 과가가각.
2학년들 십여 명이 모여 막중한 무게의 수레를 끌어냈다. 진땀이 삐질삐질 나고 손이 벌겋게 부르튼 2학년들. 그들은 서러웠다.
“동작 봐라, 동작! 던전이 장난이냐?”
“아닙니다!”
“손 보이지? 빨리빨리 안 움직이지? 당장 출발하지 못해?!”
“알겠습니다아!”
그런 2학년을 더욱 서럽게 만드는 건 선배들. 3학년이었다.
마차를 수렁에서 끌어내는 데는 반각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지만 정작 3학년에게 잔소리를 듣는 데 자그마치 2각이 넘게 걸렸다.
“제기랄…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하…….”
3학년이 떠나가자 언규가 이를 박박 갈며 서러움을 토해 냈다.
제발 좀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다. 잔소리를 듣는 동안.
이렇게 조금씩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다간, 정작 도착이 늦어 평점이 감점될 수도 있었으니까.
거기에 욕지거리, 그리고 사람 자존심을 박살 내는 인신공격은 얼마나 가혹한지. 조금 전에는 정말 선배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그냥 들이받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흐흐흐… 걍 미친 척하고 달려들까…….”
“아서라, 아서. 작전 중에 하극상은 엄벌이야.”
살짝 눈이 풀리려는 언규를 종천도가 붙잡아 말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작전은 작전. 던전 보스를 공략하는 공격대는 군율에 입각해 움직인다.
작전 중 하극상은 참형… 까지는 아니지만, 즉각 제압되고 사지를 꽁꽁 묶어서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며칠이고 감금된다.
“정 못 참겠으면 혼자 탈주하든가, 자식아. 쟤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질퍽질퍽.
온몸이 땀과 진창에 젖어,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난 양미.
그리고 옥애. 이 생고생을 여학생들도 이를 악물며 참고 있는 중이었다.
종천도가 가리키는 쪽을 보고 언규는 이를 갈았다.
“…제기랄.”
여학생 몇몇은 3학년의 잔소리에 흑흑 흐느끼고 있기도 했다.
여기서 성미를 못 참고 폭발해 버리면, 기껏 참고 있었던 다른 학생들의 의지까지 덤터기를 쓰게 될 뿐이다.
“가자, 가. 다음 기착지까지 오시(午時)까지는 도착해야 돼.”
“…그래, 가자.”
덜컹덜컹. 다각다각.
성수와 부적, 무기와 각종 장비들이 실린 수레는 무거웠다. 그것도 끔찍하게 무거웠다.
생각해 보면 수레가 길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2, 3학년이 함께 쓸 보급품 중에서 무거운 것들만 모아 왔으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무게를 한껏 덜어 낸 수레를 혼자서 쓰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달각달각. 타다닥.
경쾌하게 달려오는 발소리. 짐칸이 거의 비어 있는 수레가 다가오자, 종천도가 언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조심. 또 온다.”
“…시발.”
처억. 처억.
수레가 지나갈 때까지 일렬로 도열해서 기다리는 2학년생들. 그런 그들에게.
“…후훗. 크극……!”
마부석에 앉은 투실투실한, 허연 얼굴의 2학년생이 비웃음을 흘리며 수레를 몰고 지나갔다.
빠드득! 까득!
그에 백무룡이 발작적으로 벌컥 했고.
“저 새끼가 진짜……!”
“아, 인마. 정신 안 차릴래?”
짜악.
종천도가 그의 등을 후려갈겼다.
“으악! 무슨 짓이야! 종천도, 너 저놈 몰라? 기부금 입학인 거!”
“알고 있어, 이 새끼야! 그리고 그놈 뒤에 3학년이 타고 있다는 것도!”
백무룡이 화를 냈지만 종천도는 단호했다.
그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얼굴의 백무룡, 그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대체 우리 반만 이 꼴이 뭐야? 상황 파악 좀 해라! 그러게 말했지! 기부금들 작작 좀 갈구지 그랬냐!”
“윽……!”
“너, 말 잘했다. 지금 3학년들 대신 보고서 써 줄 놈이 기부금들 말고 누가 있는데!”
종천도에 이어 언규도 버럭버럭 화를 냈다. 덕분에 백무룡의 얼굴이 치욕으로 떨렸다.
부들부들. 푸들푸들.
한때, 발바닥의 때만도 못한 놈들이라 여긴 기부금 입학생들. 그들은 지금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때 그들을 괴롭히곤 했던 백무룡은, 그 기부금들의 복수로 인해 지금 반 아이들 전체에게 차갑고 험한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제기랄. 꼭 나 혼자 나쁜 놈인 것처럼… 지들도 같이 해 놓고!’
속에서는 천불이 올라왔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백무룡이 덜덜 떨고 있자, 언규가 투욱,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지나갔다.
“가자… 가. 지난 일은 할 수 없지. 다~ 우리 업보다. 어쩌겠냐…….”
“그러게…….”
푸우욱.
긴 한숨과 함께 다시 수레를 끌고 행군을 개시하는 2학년 3반. 그 와중에 누군가가 푸념처럼 투덜거렸다.
“하… 앞으로는 소진한테 잘해줘야겠어. 이제 보니 그 녀석은 양반이었다고.”
“그러게…….”
다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부금 입학생 소진. 그라면 아마도 저런 어설픈 권력을 쥐었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마구 휘두르진 않을 터였다.
든 데는 몰라도 난 데는 안다고, 평소에는 관심도 무엇도 주지 않았던 같은 반 학생에게 새삼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종천도가 인내, 인내를 되새기며 한숨 쉬었다.
“서문영, 이 배신자 녀석.”
“그러게.”
“저 혼자 잘나간다고 우릴 내팽개쳐? 제기랄. 끝나고 돌아와서 보자. 그땐…….”
“그땐?”
“…….”
언규가 되물었지만 종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각달각. 덜컹덜컹.
복수하겠다느니, 때려눕히겠다느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그냥 빈 소리임은 누구나 알기 때문이었다.
“아… 소진 그 녀석 보고 싶다.”
“그러게. 나는…….”
종천도의 한숨 섞인 말에 언규가 되받아서 말했다.
“지금 이한 그 새끼라도 그리울 지경이야.”
“흐으…….”
백무룡은 그 옆에서 괜히 움찔거렸다.
* * *
“푸엣취!”
“이한?!”
천마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 바람에 서문영이 놀라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검을 내밀었다.
퍼억! 쾌액!
얼굴이 반쯤 썩은 언데드 오크가, 반으로 쪼개져서 데굴데굴 첨벙! 물웅덩이에 빠져 버렸다.
“아, 미안… 어디서 누가 내 말 하나……?”
코를 훌쩍이며 풀어 내는 천마.
지척에 적을 두고 한 방에 날리려던 게, 갑자기 코에 감당 못 할 간지러움이 찾아든 것이다.
“넋 빼지마! 이한!”
“너 이런 데서 실수하면 죽어도 모른다!”
부이이잉! 쏴아아악!
마법사 둘이, 한참 캐스팅한 끝에 냉기 마법을 쏘며 험한 말을 날려 댔다.
꽈드득! 꽈드드득!
시허연 냉기가 물웅덩이를 통째로 얼려 버렸다.
막 첨벙첨벙 물을 헤치며 달려오던 좀비니 언데드 오크니 하는 것들 수십 마리가 일제히 굳어 버렸다.
샤아아아! 캬아아아!
아무리 죽지 않는 언데드라고 해도 저렇게 꽁꽁 얼어붙어서야 별 무소용. 천마는 히쭉, 코웃음을 지어 보이며 엄지를 처억! 치켜 올렸다.
“소진! 날려 버려!”
“어… 알았어!”
찰칵! 찰칵! 투두둥!
기관을 움직이는 기음이 일고, 어린애 주먹만 한 탄환 셋이 쏟아졌다.
쉬이이익!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지는 탄환. 그 궤도가 아래로 향하기 시작할 때 당무련이 날카롭게 고함 질렀다.
“방윤 물러나! 전원 산개!”
“으어엇!”
파바밧!
전방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방윤, 몸이 날렵한 소림사 제자가 크게 뛰어 달아났다.
쏴아악!
그러기를 무섭게 연막처럼 흩어지는 인광. 그리고 시뻘겋게 격발되는 폭약.
“필리아! 장벽!”
“알았어! 대지여, 일어나라!”
운소령의 지시에 필리아가 손을 치켜올렸다.
드드득.
흙벽이 일어나기 무섭게 충격파가 덮쳐 왔다.
쿠구웅! 꽈릉!
카르삭 왕릉에서 선보였던 석궁으로 쏘아 낸 벽력탄이다. 심지어 그때보다 정확도도, 폭발 범위도, 5할은 더 늘어난 듯했다.
화르르륵! 치직. 치지직…….
첨벙, 첨벙첨벙.
빙결 마법에 얼어붙었던 언데드 몬스터가,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괴의 위력. 최전방에 있었던 방윤은 그 위력에 식은땀을 흘렸다.
“소이폭염탄… 소가상단답구나. 정말 굉장한 무기다…….”
“어……? 아, 그래. 하하…….”
소진이 갸웃하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소이폭염탄의 소 자는 소가상단의 소 자와 다른데… 뭐, 소림사식 농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소이폭염탄.
전에는 백린벽력탄이라고 불렀던 탄환을, 새로운 기계식 석궁에 맞춰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직접 사용해 본 소진의 경험담을 토대로 위력을 더욱 강화시킨 벽력탄이다.
카르삭 왕릉에서 얻은 검은 석궁. 그건 명실상부한 아이템이었다. 위력만 놓고 보자면 아티팩트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가볍고 단단한 데다, 내부에는 세 개의 마법진이 내장되어 있기까지 했다. 신속 장전, 사거리 증가. 심지어 가벼운 유도 기능까지.
‘분명히 살짝 빗나갔는데… 탄환이 저절로 방향을 잡았어. 틀림없어.’
하나같이 석궁 사수에게 천금 같은 기능이다.
“소진, 꽤 하는데? 제법이야…….”
“아, 고마워.”
덕분에 소진은 화력에서만큼은 4반의 마법사들 못지않은 힘을 내고 있었다.
무투파인 3반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을 경원시하는 성향이 있었지만, 4반의 마법사들은 좋은 장비 또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잠깐 모여 봐. 루팅들 하고.”
짝짝!
파티 리더이자, 패스 파인더인 서문영이 지시를 내렸다.
첨벙첨벙!
여기저기 흩어져서 언데드의 잔해를 물웅덩이에 처넣는 2학년들.
“플라이.”
“에이비테이션.”
사전에 약속된 대로 마법사 두 사람은 허공에 떠올라 주위를 경계했다.
“드라이어드 루트”
필리아는 주변에 가늘고 낭창낭창한 나무뿌리를 소환해서 둥그런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흐음… 이번엔…….”
“아냐, 방금은 좀 빨랐어. 이만큼?”
운소령과 당무련은 지도를 보며, 다음 기착지까지의 거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게 사전에 세웠던 계획대로다.
예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문영은 살짝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예감이… 기분이 좀 이상해. 뭐지?’
고도로 발달된 집중력은, 가까운 시간에 한해 예지 능력과 비슷한 성질을 발휘한다.
넓은 전장 전체를 동시다발적으로 점검하는 그의 눈은, 뭔가 까닭 모를 불길함을 감지했다.
“응……?”
대체 뭘까. 왜 이런 기분이 들까. 곰곰이 생각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서문영. 그는 곧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이제 겨우 그럴듯한 녀석이 오는구나.”
‘…이한?’
히죽.
바로 천마가 어슴푸레 피어나는 습지의 안개를 보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