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1)
촤락! 타닥.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지역 특성 – 습지.
출현 마물 - 이하 기술.
사자수인(死者獸人) 부패저인(腐敗豬人)
수급장수(首級將帥) 환사기사(幻死騎士)
이하 생략.
“계획대로야. 대충 이런 식으로 가면 될 것 같아.”
운소령이 지도에 죽죽 붉은색 표시를 그려 넣었다.
이제껏 정리한 곳은 배정받은 작전 지역 중 1할.
하지만 고작 오늘 1시진 동안 처리해 버린 걸 감안하면, 놀랄 만큼 광대한 범위다.
“후우… 참.”
방윤이 펼쳐진 지도와 참조 사항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한때는 이걸 다 어떻게 하나, 하고 막막하기만 했는데 막상 해 보니 어찌어찌 해결이 되어 가는 것이다.
특히, 나오는 몬스터의 속성이 속성인지라 방윤 앞에서 말 그대로 박살이 났기에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별것 아니네. 생각보다 쉬운데?”
“바, 방윤… 그런 말 하지 마.”
“…응?”
방윤의 말에 소진이 질색했다.
“이야기나 경극에서 보면, 꼭 그런 말 하고 나서 엄청난 일이 터지더라고…….”
“푸하하하! 뭘 그런 미신을 가지고 그래?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어떤 놈이 나오든, 이 부처님이 다 성불시켜 줄 테니까!”
방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불시켜 준다. 소림사식 ‘죽여 버리겠다’는 자신만만한 엄포였다. 하지만 괴기담, 무서운 경극을 많이 본 소진은 왠지 그것도 찜찜했다.
‘보통 저런 말 하는 애들이 꼭 제일 먼저 죽어 나가던데…….’
뭐,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꼭 보면 저런 성미의 사람은 ‘너 조심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문제없어!’ 하고 더더욱 과하게 설치는 법이니까.
“소진? 확인 사항 점검 좀.”
“아, 알았어. 그러니까…….”
패스 파인더이자 리더인 서문영의 말에, 소진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사사삭. 사각사각.
삼음절맥. 무예에 한해서는 젬병인 체질이지만, 머리 회전만큼은 누구보다 빠른 소진이다.
특히, 필기와 서술에 대해서는 원래 능했던 데다, 천무학관에서 수많은 갈취(?)를 당하는 처지여서 우필이 한 번 잘게 움직일 때마다 수십 개의 글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미 알겠지만, 사자수인과 부패저인은 확인했어. 그러면 참조 목록에 있었던 대로 수급장수나 환사기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거겠지.”
“으음.”
사자수인은 코볼트 언데드. 부패저인은 오크 언데드다. 던전 보스가 본 드래곤인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지역은 전형적인 언데드존.
그렇다면 다른 몬스터들도 예상할 수 있다.
수급장수는 제 머리를 들고 다니는 듀라한, 환사기사는 아마 데스나이트일 터.
앞으로 출현할 적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심히 유리한 입장이다.
“데스나이트는 추정 위험 등급이 평균 11이야. 우리 수준에는 버겁지 않을까?”
“글쎄… 어떨까.”
하백운이 신중하게 위험도를 재었다. 마법사다운 태도였다.
운소령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전면을 맡은 방윤이 탱커를 해 준다면 문제없을 것 같아.”
“음.”
방윤은 소림사 출신이다. 다시 말해 승려, 서역식으로 보면 몽크나 팰러딘에 해당한다.
그라나다 대륙에서의 신성력을 펑펑 뿜어내는 엄청난 사제는 아니지만, 그가 불경을 읊으며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퍽퍽 부서져서는 재생도 못 했다.
그런 반면 언데드가 물려고, 덮치려고 할 때마다 방윤의 몸에서는 은은한 금빛 서기까지 서려서 피해를 방지했다. 이쯤 되면 사기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하긴, 성(聖) 속성이라… 이 까까머리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으니까.”
하백운이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불가의 승려, 혹은 도가의 도인들은 무림인이나 마법사들과 전혀 다른 힘을 사용하곤 했다.
이번 방윤의 경우에도 그가 지닌 무력과 별도로, 대언데드 파쇄력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뭔가 어이없고 이해가 안 가지만… 애초에 신성력이라는 게 그런 종류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더 이해가 안 가. 너희는 손만 휘두르면 불이고 얼음이고 막 쏟아져 나가잖아.”
“아니, 그건…….”
당무련의 불평이었다. 하백운은 그에 쓴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이대로 몇 번 더 합을 맞춰 보자. 현재까지는 어려운 게 없으니까.”
운소령이 진단했다. 서문영이 물었다.
“그러다 수급장수가 나타나면?”
“내 생각에는 딱 거기까지가 우리 수준으로 적절할 것 같아. 위험 등급 10급, 11급 이상의 몬스터는 아마 이곳에 없을 거야. 있더라도 한둘 정도일걸.”
“확신하는 이유는?”
“낭비니까. 우리가 아니라 적들 입장에서도.”
“흐음…….”
운소령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추정 위험 등급 10급과 11급. 숫자 하나 차이이지만, 실전에서 겪어 보면 차원이 달라진다.
아무리 흉포하고 사납더라도 그나마 10급까지의 몬스터들은 정해진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을 찌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반면 11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전천후 몬스터다.
딱히 결정적인 약점이 없고, 그나마 있는 약점을 찔러도 한참을 공략해야 겨우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다. 그만큼 강력한 놈들이고, 그건 적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인간의 입장에서 강적이라면, 몬스터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인적 자원인 셈이다.
“환사기사, 혹은 사망기사. 데스나이트 정도라면 던전 보스에게 중요 지대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을 거야. 그리고 수급장수 듀라한은 데스나이트의 호위 격이고.”
적도 머리가 있는 존재라면, 11급 이상의 몬스터는 요긴한 자원이고 아껴서 쓰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이번 필드 던전, 어둠의 나무 지대에서 중요한 지역이라면 뻔하기 짝이 없다. 바로 어둠 나무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맡은 지역에는 어둠 나무가 없군. 다행이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던전은 생물이다. 선행자들의 자료는 생존한 자들의 증언일 뿐이니까.”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다. 겉보기엔 수월해 보이는 습지 지형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보기일 뿐.
꼭 강한 몬스터가 아니라도, 함정이라거나 혹은 예상 못 한 변수가 나타날 경우 그게 파티의 전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서문영은 방심의 여지를 막았다.
“이한, 네 생각은 어때?”
“…….”
“이한?”
“아, 뭐라고 했어?”
한참 뭔가 생각에 빠져 있던 천마가 되물었다.
“아까부터… 뭔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걸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말해 줄 수 없어?”
서문영이 신경 쓰이던 걸 물었다.
분명 상황이 순조로움에도,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전투를 마치고 난 후, 천마가 어딘가를 향해 피식피식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 후에는, 그저 예감이 아니라 근거 없는 확신에 가깝게 변했다.
“음… 글쎄다. 이걸 말한다고 니들이 믿을지 모르겠는데.”
천마는 턱을 긁으며 고민하다가, 가볍게 툭, 하고 말을 내던졌다.
“이쪽을 보는 기척이 있어. 그것도 꽤 강한 놈의 기척. 아마 데수나이트인가 하는 그놈 아닐까 싶다.”
“……!”
“……!”
천마의 말에, 파티원들은 주변 온도가 살짝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툭툭.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지도를 두드리며 한 지점을 짚었다.
“아마도 이쪽. 습지의 중심인 거 같아. 뭐, 당장 우리가 향하는 방향은 아니니까, 딱히 말은 안 했다.”
“진짜?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는데…….”
당무련이 잔뜩 불신하는 얼굴로 따졌다.
적이나 위협의 감지를 먼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무위의 수준이 높다는 것.
은연중에 천마의 무위를 인정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너희보다 내가 낫다’라고 드러내면, 명문가의 후예로서는 반발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천마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말해도 못 믿을 거라고 했잖아? 네 수준으로는 못 느끼는 게 당연하지. 서문영이나 운소령도 감지를 못 했을 텐데.”
“이……!”
대놓고 맞은 막말에, 당무련이 울컥하자 서문영이 그 앞을 제지했다.
“당 소저는 진정해. 이한? 뭘 어떻게 느낀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흠…….”
천마는 시선을 돌려,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는 조금 골똘하게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언제까지 계속 숨기고 있을 게 아니지.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 너희들 내 사문이 어디인지 짐작하고 있지?”
“…….”
“…마교, 아니, 천마신교… 지?”
다들 입을 다문 가운데, 운소령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마가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쩌다 보니 연이 닿았는데… 마공은 그 특성상, 인간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성을 깨어나게 하지. 그리고 그 마성은, 인간보다 몬스터가 훨씬 많이 가지고 있는 거다.”
천마는 그답지 않게 상세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태상장로인 노달의 권유 때문이었다.
-제가 보기엔 제자님, 가까운 곳부터 먼저 살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천마신교의 부흥, 언젠가 만들어질 ‘천마학관’의 성립.
그걸 위해서는 교인도, 재물도,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
특히나 손을 잡을 수 있는 우호 세력이었다.
-지금의 천무학관 2학년들은, 이제껏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우수한 인원들입니다. 특히 제자님이 계시는 2학년 3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갈세가와 서문세가. 소가상단과 소림 및 당문의 후예. 사견을 제외하고 보면 기회입니다. 이렇게나 골고루 능력 있는 자가 모이기도 힘드니까요. 언제고 학관을 세우실 거면, 더더욱 신경 쓰셔야 합니다.
-같은 반의 아해들을 거두소서. 착실하게 챙겨 주면서 제자님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면, 녀석들은 제자님을 따를 것입니다.
-반드시 휘하로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고 다시금 본 교가 일어설 때, 우호적으로만 굴어 주면 됩니다.
-연대의 힘. 기실, 본 교는 진작부터 이런 작업을 했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대격변의 날, 오로지 본 교만 그 재앙을 뒤집어쓰며 멸문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겁니다.
-방금 뭐랬냐. 멸문? 뒈질래?
마지막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어쨌든. 하나하나 맞는 말이었다.
세상에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혼자서 쌓는 힘보다, 여러 명이 쌓는 힘이 더 빨리 모이는 법이었다.
귀찮다고 깽판을 치며 주변 사람을 막 대하는 것보다, 조금 신경 써서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게 길게 보면 더 큰 귀찮음을 줄일 수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조금은 체질 탓도 있는데, 여튼 간에 마공을 익힌 나는 마물들이 가까이 오거나, 강한 놈이 이쪽에 관심을 둘 때, 바로 알 수 있어. 비슷한 종류의 기운이니까.”
“아…….”
“과연, 그래서였군.”
운소령이 탄식하고, 서문영이 크게 끄덕였다.
사실 언제부턴가 반 아이들은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유독 천마의 반응이 빠르다는 것을.
그게 마공이 품은 마기로 몬스터들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여러 가지 의미로 궁금증이 풀리는 것이다.
적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대비하는 것은, 싸움에 있어 크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방윤을 납득시켰다.
“흐음, 그렇군. 그 때문이었어. 어쩐지 나를 포함해 사제들이 이한 네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 들고 불쾌했었지…….”
“원래 물과 불은 섞이지 않는 법이지. 난 뭐 한 것도 없는데 땡중이나 말코 도사들이 나한테 화내는 게 많더라고.”
“과연, 마공의 마기가 소림의 정심한 기운과 상충되기 때문이었군.”
‘아니, 그래서가 아닌거 같은데.’
두 남자는 납득했지만, 운소령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기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한이 너무 싸가지 없이 굴어서 생기는 싸움이라고.
“어쨌든. 좀 쉬었으니 다시 달려 보자. 이한, 마물에 대한 감지 능력이 뛰어나니 주변의, 특히 습지 중앙의 위험한 놈을 살펴줘.”
“어.”
서문영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지시하고, 천마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운소령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한, 짐 좀 풀어 볼래? 이제 보니 이 주변은 죄다 언데드잖아? 슬슬 써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써 보고 싶은 거? 뭐?”
짐이 줄어든다는 말에 천마가 반색했다.
운소령은 툭툭, 거기서 뜬금없이 당무련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파사부와 성수. 많이 챙겨 왔으니 부담 없이 쓰자. 당 소저. 이번에는 제대로 활약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