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3)
“잘됐다. 이제 속 좀 풀겠네.”
메시지 마법을 종료하고 하백운은 피식 웃었다. 조금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광경이 웃겨서였다.
언데드 1천.
딴에는 간을 배 밖에 놓고 사는 서문영, 저 골수 무투파도 정면에서 보고는 주춤주춤 물러서는 숫자다.
무인으로서는 참 면구스러운 장면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언데드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모습은 제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니까.
“솔직히, 그동안 조금 자존심 상하는 게 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하백운은 하얗게 웃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다르게 말해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에 가까운 이였다.
그 미친놈이 진심으로 분노해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마법사가 그냥 약한 줄 알더라고?”
스르륵.
섬뜩한 기세가 풍겼다.
비록 하백운이 내공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 살기까지는 뿜어내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에게서도 피어나는 기운이 있었다. 바로, 살의(殺意)였다.
따지고 보면 대상은 언데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 살의로 칠 수는 없을 테지만.
“사실 근접전에서는 좀 약하지 않아?”
운소령이 응대했다.
하백운의 말꼬리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더 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하백운은, 마법사로서 전의가 충만한 상태로 보였기에.
“딱히? 근접전이라기보다, 정확히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약한 거야. 마법사는 원래 ‘준비하는 자’이니까.”
“준비하는 자?”
“그래. 이를테면 이런 거.”
스륵.
하백운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파바바밧.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전면 1미터가량에 하얀 빛이 어렸다.
“……!”
운소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얼핏 보기엔 그저 반짝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서너 개의 날카로운 섬광이 하백운의 손 앞에서 휘둘러지는 것을 보았다.
“방금 뭐야?”
“오러 플레어(Flare: 방사). 1초에 여섯 번 정도 후려갈기는 거. 어때?”
“…….”
운소령은 침묵했다.
그녀는 쾌검수였다. 극한에 이른 동체시력을 가진 무인이었다. 그런데도 방금 전 알아차린 공격은 서넛에 불과했다.
달리 말해.
운소령조차 여섯 번 중 두 번은 놓칠 정도로 빠른, 그런 공격 마법이었다.
하백운은 그걸 보이며 으스대고 있는 거였다.
내가 이걸 쓰면 너도 못 막는다, 라고.
“…어떻게?”
운소령이 물었다.
하백운이 자만할 만큼, 방금 전 보인 마법은 설령 그녀라도 당해낼 수 없다.
오러 플레어. 저건 그런 마법이었다.
근접전에서 마법사가 전사를 당해낼 수 없다고 하는 상식을 깨뜨리는, 초근접전에서 난사가 가능한 마법.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인지. 애초에 이런 게 가능했다면, 지난 중간고사 때는 왜 쓰지 않았던 것인지.
“말했잖아.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라고… 발현, 작성된 진지 개방.”
말을 알아들은 것인가. 씨익 웃으며 하백운이 두 손을 과장스레 교차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영기의 펌프(Spiritual pump)여!”
우르릉. 우르릉.
그와 함께 반투명한 구조물. 십여 개의 관 같은 것이 하백운의 주위에 나타났다. 그건 마치 생물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굼틀. 굼틀.
“헉.”
명백히 이질적인,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구조물.
저절로 입이 벌어진 운소령에게, 하백운이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를 더했다.
“혹여나 해서 ‘준비’해 뒀거든. 이 땅에 흐르는 영맥과의 연결관을. 잘 기억해 둬. 나든, 아니면 적으로 만날 누군가든, 준비된 마법사는 악몽이라는 거.”
“…유념해 둘게.”
운소령은 끄덕였다.
어떤 절차나 과정을 거치는 ‘준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하백운은… 중간고사 때 상대했던 하백운이 아니라고.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한없이 위험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좋은 자리에서 안전을 확보한 궁수와 같았다.
화살만 충분하다면 혼자서 수십, 어쩌면 수백도 쏘아죽일 수 있는 것이다.
“으아… 좀 딸리는데? 이경, 엠파워 좀 준비해 줄래?”
다행히 상황 파악은 하고 있는 것인지, 하백운의 자랑질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보조 마법사인 이경을 부르며 두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있는 대로. 부탁해.”
“…난 책임 못 진다. 알아서 해라.”
“내 걱정은 마. 으드… 득!”
말을 하다 말고 하백운이 이를 악물었다. 이경이 손을 대자마자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이다.
후우웅!
실제로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소령은 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즈즉. 파즉.
하백운의 전신에서 시퍼런 냉기가 방전되듯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현상인지는 몰랐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운소령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을… 증폭하는 마법도 있어?”
그도 그럴 것이, 하백운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퍽. 투툭. 후드득!
코에서 코피가 쏟아져 흘렀다. 하백운은 가볍게 소매로 훔친 뒤, 새파란 보석이 박힌 완드를 들어 올렸다.
“하! 당연한 소릴… 애초에 마법이라고, 마법. 물리적인 걸 증폭시키는 것보다, 같은 마력을 증폭하는 게 더 쉽지 않겠… 오, 오셨는데?”
두우우웅…….
잔잔하게, 물 웅덩이 표면에서 물결이 일고 있었다. 천마 일행, 전위들이 어그로를 끌려고 갔었던 방향을 주시하던 당무련이 신음을 흘렸다.
“…저게 뭐야.”
빠르게 쏘아져 오는 신형이 셋. 방윤, 천마, 그리고 서문영이다. 그런 그들을 쫓아.
구르르륵…….
느리지만, 한도 끝도 없이 새까맣게 몰려드는 시체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새까맸다.
원래의 때깔이야 어쨌건, 기분 나쁜 사기와 어둠을 스멀스멀 뿜어내는 언데드들. 그 숫자가 천을 넘어가니 짙은 먹구름이 땅에 깔린 것처럼 보였다.
따다닥… 따다다닥…….
소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이를 딱딱 마주치고 있었다. 당무련도 얼굴이 굳어 있을 정도니 당연한 일이었다.
운소령은 사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음, 하고 신음했다. 싸우기도 전부터 전의를 상실하다니. 아무래도 이대로는 곤란하지 싶었다.
“필리아, 지대를 좀 높여야겠어. 가능해?”
“문제없어. 땅의 정령 노움은 들으라… 이곳에 나타날 지어니. 진흙의 성채!”
구르르릉.
필리아가 정령을 부리자, 땅이 솟아났다.
너비는 직경 2장가량. 마법사와 원거리 딜러들이 딛고 있던 지면이 둥근 원형으로 1장가량의 높이로 솟아올랐다.
두두둑. 두두두둑.
심지어 가장자리는 요철(凹凸)까지 솟아 있어, 작은 성채 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덕분에 뭔가 든든한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걸까, 소진이 즉각 정신을 차렸다.
“이, 이건……? 와, 정령술이라는 게 이런 것도 가능해?”
“음, 힘을 많이 쓰긴 했지만.”
“대단해! 필리아!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흥.”
당무련은 코웃음을 쳤다. 안색에 핏기가 돌아온 소진을 보니 기가 막힌 것이다.
‘이런 토성 하나가 뭐 어쨌다고?’
사실 그녀가 보기엔 이걸로 지금 상황을 버텨 내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고작 1장 높이의 성벽에 안심?
터무니가 없었다. 적의 힘도, 아군의 힘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소진의 단순함이 웃길 뿐이었다.
찰칵. 찰칵.
“하, 짜증나…….”
하지만 그런 그녀도, 비도와 암기를 점검하는 손길이 부드러워진 것은 인정해야 했다. 솔직히, 이 토성이 일어서기 전에는 그녀도 손이 떨렸던 것이다.
일천의 언데드 대군을 보고.
“에잇, 정말.”
차라라라락!
토성의 요철 위로, 당무련은 신경질적으로 암기낭을 쏟아부었다.
평소의 비침, 세침 등은 애초에 출발할 때부터 챙겨 오지 않았다. 급소를 저격하는 작고 날카로운 무기는 언데드 상대로 별 무소용이다.
때문에 이번에 그녀가 챙겨 온 것은 비황석. 검지손가락 길이의 살짝 굽어진 돌 들이었다.
‘언데드라니, 죽다 만 것들은 진짜 싫어.’
“전원! 전투 준비!”
불평하는 당무련의 심사야 어쨌든, 운소령이 지척까지 다가온 전위들을 보고 경호성을 울렸다.
“소진!”
“아. 알았어!”
투두둥!
소진이 석궁으로 벽력탄을 연발로 쏘아 댔다.
일천 대 8의 싸움. 그 시작이었다.
* * *
쿠와앙! 퍼엉! 퍼엉!
폭음과 불길이 일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던 언데드 무리에 구멍이 여럿 생겼다. 유독 뒤쪽에서 몰려오던 해골 몬스터들은, 폭발의 충격파에 산산조각 나기도 했다.
“다 왔다!”
“뛰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쏘아 댄 엄호 사격.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전위 세 명이, 원딜(원거리 딜러)들이 자리잡은 토성으로 날아 들었다. 방윤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다음이 서문영, 마지막은 천마였다.
“그새 성을 만들었네? 이건 또 신기하구만.”
“허억… 허억… 죽겠다...”
서문영은 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가 마지막에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천마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서문영의 의사와는 상관없었다.
‘귀한 패스 파인더를 죽게 놔둘 수야 없지.’
천마는 똑똑한 놈을 싫어하지 않았다. 재주가 있는 녀석은 가급적 잘 챙겨 주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본인이 귀찮지 않은 선에서.
“야아아아--!”
투웅. 투웅. 투웅!
와글와글 몰려오는 언데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벽력탄을 쏘아 대는 소진. 한때 찌질하고 겁 많던 모지리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대견하게 자랐다.
퍼엉! 쿵! 쏴아아아…….
끊임없이 사방에 쏟아지는 폭격. 폭발로 산산조각 난 언데드들이 자잘하게 흩뿌려진다. 그리고 이내, 꺼지지 않는 백린의 불길에 자글자글 타 버린다.
“벽력탄 이렇게 막 써도 돼?”
“아… 이한! 고생했어!”
그 광경을 구경하다 물었더니 운소령이 뒤늦게 치하한다. 설마? 서문영의 뒤를 막아 주며 따라온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천마는 그냥 고개만 내저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아니, 됐으니까, 너무 막 쓰는 거 아니냐고. 마법사 놈은 뭐 해?”
펑! 펑! 펑!
말하는 중에도 벽력탄은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었다.
화망(火網)이 겹치지 않도록, 여기저기 골고루 터뜨리는 것이다. 최소의 숫자로 최대의 피해를 주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써도, 벽력탄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다. 내공이나 마나처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오히려 더 아껴야 하는 것이다.
작전에 변수가 생겼다곤 하지만, 운소령이 이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그렇게 묻자, 짧고 다급한 답이 나왔다.
“고열! 급속 냉각! 온도차 파괴!”
“오!”
이번만큼은 천마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학관에서 받은 수업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폭약으로도 부술 수 없는 만년한철로 된 문이 있다면, 그걸 깨뜨리는 방안으로.
“하여간 똑똑한 놈들이로고… 하백운인가?”
“탄 다 썼어!”
찰칵! 찰칵!
감탄하는 가운데, 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진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즉각.
“하백운!”
“으오오오오오!”
무언가, 온몸에 치렁치렁 이상한 걸 잔뜩 단 마법사 놈.
녀석이 두 손을 들어 새하얀 구체를 허공에 띄워 놓고, 눈에서, 입에서, 허연 광선까지 뿜어내며 캐스팅을 완성했다.
“먹어랏! 앱솔루트 제로(Absolute Zero: 絶對零度).”
쿠와아아악!
일순,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냉기가 느껴졌다.
시허연 구체는 둥실둥실 날아가, 언데드들이 다가오는 한 중간에서 팍! 하고 터졌다.
쫘아아아악! 꽈드드득!
뒤이어 땅이, 물웅덩이가, 전부 얼어붙었다. 세상이 온통 희게 변하고, 언데드건 뭐건 다가오던 모든 존재들이 얼어붙어 극저온의 감옥에 갇혔다.
“이야…….”
그 모습에 천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비록 단 한 번에 불과하지만, 마법사의 전력을 다한 마법은.
“…소신수마공(素身秀魔功)처럼 보이는데?”
극마의 초입에서 흔히 쏘아 낼 수 있던, 빙공의 수준과 맞먹을만큼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