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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73화 (174/310)

173화.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5)

천마 일행은 그렇게 두어 번을 더 돌았다.

방식은 여전히 몰이 사냥. 한 지역의 언데드 몬스터를 끌어와 일시에 마무리 짓고, 그 지역을 안정시켰다.

물론 앞의 교훈을 참조했다.

방윤이 사자후 신공으로 어그로를 미친 듯이 끌어 그 난장판을 벌이고 난 후로는 백 이백 정도로만 언데드들을 모아서 소규모(?)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퍼억. 퍽! 크르륵!

“다 잡았다… 후우.”

숫자만 조심하면, 언데드는 위협적인 몬스터가 아니다.

일반인이나 어중간한 무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겠지만, 천마의 일행에게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이미 2학년 수준을 아득히 넘긴 엘리트 파티.

서문영, 운소령, 방윤은 명성 자자한 천무학관의 2학년. 그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무인들이었다.

하백운과 이경은 학년 내 탑을 달리는 마법사였고, 필리아는 그들에 못지않은 중급 정령술사다.

거기다 아이템 빨로 석궁수 역할을 착실히 하는 소진. 독과 암기가 잘 안 먹혀 빛이 좀 바랬지만, 양민 학살로 유명한 사천당문의 당무련까지.

다 모아서 생각해 보면 2학년이 아니라 3학년, 그것도 중상 정도는 될 수 있는 전력이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면 경험뿐. 하지만 그 경험이 지금 착실하게 쌓여 가는 중이었다.

“치욕이다.”

따가다각… 퍽!

서문영이 중얼거리며 발길질을 했다.

상체만 남아 허공을 깨물던 언데드는 머리가 박살 난 후 잠잠해졌다.

하나하나 때려잡을 때는 잡졸에 불과한 것들. 그것들에 기가 질려 도망친 게 새삼 창피해진 모양이었다.

천마는 그런 서문영을 격려했다.

“괜찮아. 수가 너무 많아서 도망칠 수도 있지.”

“도, 도망이 아냐! 후퇴해서 재정비하려던 거였다고!”

“아, 그래?”

그거나 그거나 결국 같은 거지, 하고 천마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서문영의 얼굴은 쥐어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그러는 동안, 방윤은 한쪽에서 시체 더미를 수습한 후 염불을 외고 있었다.

“반야바라밀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감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아이템이 있나 없나 살펴본 후, 딴에는 팔다리를 맞추어 그나마 사람 형색을 갖춘, 이제는 재생이 불가능해진 언데드들.

그 앞에서 경을 외는 방윤을 보고 천마는 좀 웃겼다.

애초에 살아서든 죽어서든, 저주받은 마물이자 몬스터가 불경 좀 왼다고 극락에 가기나 할까?

-이 부처님의 손에 죽었으니 극락에 갈 것이니라.

본인이 맞아 죽은 몬스터들 입장이라면, 저런 말에 열 받아서 벌떡 되살아나지나 않을까 싶은데?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흐음.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색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각도 법도 없으며, 눈에 보이는 것도 의식의 경계도 없도다… 흠, 심오한데.”

천마의 생각과 달리, 하백운은 그 내용을 듣고 뭔가 심오한 철학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마법은 애초에 심오한 고찰의 영역. 불경에서 말하는 공(空)이라는 것도 대단히 현기가 어린 가르침이니까.

“이거 나중에 불경 좀 읽어 봐야 할까…….”

“어허, 선재로다! 하 시주가 불가에 귀의하시겠다면…….”

“아니, 그건 아니고!”

들이대는 방윤과 질겁하는 하백운. 둘을 보다 말고 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식생이 기묘해. 마라니. 이런 곳에서 자랄 것들이 아닌데.”

거기엔 소진이 운소령과 함께 정찰 중에 발견한 것들을 기입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대단히 진지하고 어두웠다.

“식량일까?”

“아마도. 별도의 생태계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아는 게 많고 머리 좋은 것들이니 글 몇 줄 적는 데도 어려운 말을 마구 쓰고 있었다.

먹이사슬. 자급자족. 피식자, 포식자. 사기 농축. 분명 들으면 아는 말인데 왜 굳이 거기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는 말들이었다.

“그건 무슨 말이야?”

“아, 보고서 내용.”

천마가 묻자 아, 하고 소진이 허섭스레기들을 잔뜩 모은 것을 가리켰다.

흙덩이, 짓이겨진 나무뿌리, 뭔가에 씹혀서 부서진 동물의 유골 등을.

이게 어쨌다고? 하는 눈으로 물어보자, 소진이 착잡한 얼굴로 운을 뗐다.

“쥐들이 많아. 아주.”

“쥐?”

“응, 그리고 그것들이 식량이 되는 모양이야.”

마. 뿌리에 양분을 저장하는 식물. 그것들이 이 습지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캐내서 갉아먹는 작은 동물들, 쥐 같은 것들이 많다고도. 더 위험한 것은 그런 쥐들을 잡아먹는 소수의 육식동물도 있다고.

“그게 왜 위험해?”

“왜냐하면… 여기는 지대 전체가 언데드의 사기에 물들어 있는 지역이야. 생명이 움틀 수 없는 곳이지.”

운소령이 이어서 설명했다.

언데드는 기본적으로 죽음의 기운에 물든 사체다. 그래서 가만히 두면 사체가 부패되는 속도가 느리다.

파리나 구더기, 송장벌레 등 시신을 갉아 먹어야 할 곤충들이 알을 까기도 전에 그 지역의 사기에 오염되어 죽기 때문이다.

“아, 참. 그랬지.”

천마는 그 말을 듣고 떠올렸다. 지난번 데몬즈 루인 던전에서 만난 청명 진인과 수많은 해골들을.

확실히 지하 무덤이라고 하는 곳은 쥐나 두더쥐, 혹은 뱀들이 들끓기 좋은 지형이다. 그러나 지난번에 흑객과 함께 들렀을 때, 그는 거기서 그런 놈들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나쁜 공기가 가득해서 다 죽었나 보다 하고 여겼었지만, 글쎄.

“언데드의 사기는 미세한 독과 같아. 벌레 같은 곤충들은 금방 중독되어서 죽어.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소형 포식자. 쥐 같은 것도 살 수 없어야 해. 그런데…….”

“이건 쥐, 그리고 이건… 개인지 고양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훨씬 큰 놈이야. 몸길이는 한 척(30㎝)가량. 쥐를 잡아먹고 사는 놈들이지.”

“…….”

천마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운소령과 소진의 말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을 안 것이다.

“죽음나무… 이 지역이 자라나고 있다는 거지? 살아 있는 것처럼?”

“어둠나무야. 그리고 맞아. 아마 그런 것 같아.”

운소령이 스윽, 소진에게 턱짓했다.

으으으음.

소진이 한쪽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세피로트의 생명 나무. 삼음절맥인 그가 저장해 둔 수많은 기억의 도서관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기를 한참, 소진이 눈을 깜박거리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들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없어, 확실히 없어. 예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었어.”

“그러네…….”

“기록?”

“응, 선행자들의 기록.”

천마가 되묻자 소진이 한숨 쉬었다.

천무학관이 아무리 강력한 무력 집단이라지만, 보스 몬스터가 있는 필드 던전에 사전 정보도 없이 소중한 전력을 밀어 넣지는 않는다.

레이드는 공격대다. 보스나 던전을 토벌하기 위해 전술 전략을 짠다.

그리고 어느 전술 전략이든, 가장 기본은 정보다. 보통은 그 정보를 ‘선행자’들, 즉 먼저 다녀온 자들에게서 얻는다.

탐색자, 추격자, 모험가 등등으로 불리는 이들.

태생이 자유롭고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용병들은, 새롭게 발생한 던전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던전을 탐험하고 아이템, 몬스터의 부산물 등을 수집해 가져온다.

“이 지도도 선행자들의 정보가 있으니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거야. 출현하는 몬스터도.”

지도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도 없었다면, 이번 천무학관의 공격대는 최소 1년 이상을 조심조심 탐색해서 들어갔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격변의 날 초반부처럼, 괴멸적인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그런데 그 선행자들의 정보에는 이곳의 식생이라든가 그런 게 없었다고.”

“그게 왜? 땅에 널린 풀뿌리니 쥐 뼈다귀니 하는 거에 누가 신경을 써?”

당장 몬스터 잡기에 급급한데 말이다. 그렇게 천마가 되묻자 소진은 묘하게 찡그린 얼굴이 되었다.

“아니, 신경 써. 선행자들 중에서 ‘탐색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특히 그런 걸 분석하는 일을 맡는 사람들이야.”

기존 정보에 글 한 줄을 더하는 것으로 금자 몇 냥을 더 받고 덜 받는 이들. 그들은 당연히 주변 상황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기록한다. 그래야 돈을 더 받으니까.

그리고 어둠나무 근처의 식생에 대해서는, 최초의 선행자가 증언한 기록이 엄연히 있었다.

-그곳은 죽음의 땅.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이거야. 아직 살아 있는 건 채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진이 다시금, 짓이겨진 풀뿌리와 반쯤 쪼개진 쥐의 두개골을 가리켰다.

이건 틀림없는, 생명의 흔적이었다.

천마 일행 이전에 들어온 선행자가 보았다면, 분명히 보고서를 올렸어야 할 사항이었다.

“정리하자면… 최근에 일어난 상황이라는 거지. 갑작스러운 급변. 그래서 우리 이전에는 보고가 올라오지 못했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최초 발견자야.”

운소령도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어둠나무 지역에서 일어난 변이를 감지해 낸 최초 발견자. 이것만으로도 이번 학기 기말고사 성적은 따 놓은 당상이다.

개인으로서는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학관을 다니는 무인으로서, 그녀는 무시무시한 흔적을 보게 되었다. 그로 인한 막연한 두려움이 섞인 것이다.

“언데드… 죽음밖에 없는 지역에, 적응을 한 생명이 나타나다니. 대체…….”

“그 선행자란 놈이 빠뜨렸던 걸 수도 있지. 마지막 선행자의 보고 기록. 언제야?”

물론,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체가 기어 나오면 뽀개 버리면 그만이고, 시체 굴에서 산 놈이 기어 나오면, 역시 뽀개 버리면 그만이니까.

“음… 반년 전이야. 정확히는 5개월 하고도 3일.”

“…언제라고?”

하지만 기억을 더듬은 소진의 말. 거기에는 천마마저도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왜? 뭐 짚이는 거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천마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게 그냥 우연인 걸까, 어떨까. 5개월 하고도 3일 전. 그날은 하필이면.

이한의 몸을 통해 천마 자신이 되살아난 날이었다.

“우연이네. 정말로.”

멀리, 슾지의 안개 저편에 서 있는 거대한 어둠 나무. 검은 세계수를 보고 천마는 중얼거렸다.

* * *

“부대 전개.”

사삭. 사사삭!

교관 매소봉(梅少鳳)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인들은 기계처럼 정확히 움직였다.

“1조 7장 이동. 전방 주시. 2조, 3조 좌우 경계. 4조는 후방 확인.”

“숙지.”

“숙지. 완료.”

“대기 시간 1각.”

차자작. 차자자작.

전후좌우, 사방을 경계하던 무인들. 그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휘이익. 스으으윽.

습하고 악취 나는 기분 나쁜 바람.

어둠 나무 지대 특유의 썩은 냄새가 안개를 타고 잔뜩 퍼져 있었다. 무인들은 내기를 일으켜, 그 냄새에 저항했다.

나쁜 냄새는 대개 독을 품고 있다. 별 이상이 없다고 방심했다가, 어느 순간 일정량 이상 쌓인 독이 갑자기 마각을 드러내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로 1각가량이 지나자.

사위를 매의 눈으로 살피던 교관 매소봉이, 왼 손목을 입가로 가져다 대고 중얼거렸다.

“…선발대로부터 보고. 이상 없음. 반복한다. 선발대로부터 보고. 이상 없음.”

툭툭. 그러고는 손목에 낀 팔찌를 두들기자, 잠시 뒤 팔찌에서 소리가 났다.

-확인. 후발대 들어간다.

두우우웅. 터벅터벅.

그리고 멀리서,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안에 탄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여기가…….”

“으윽, 냄새…….”

발소리는 무겁고, 조심성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기척을 숨기지도 않는 모습에 흑객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에.’

하기야 저들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사가 아니니 당연한 것인지도. 들은 대로라면, 그들이 맡은 일만 제대로 해 줘도 엄청난 활약을 할 것이다.

“마법 사단 도착했습니다. 목표 확인했습니다.”

사삭. 사삭.

조용히 소리 죽여 다가오며, 마법사들을 인도해 온 남궁호가 보고했다.

탑 파괴단. 그중 1조가 어둠 나무 파괴를 위해 집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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