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어둠의 나무, 외곽 지역 (9)
툭. 퍼걱.
소리는 적었다. 기의 장막으로 둘러싸, 가급적 소음을 일으키지 않게 했기 때문이었다.
“처리 완료. 주변 정찰에 들어갑니다.”
휙. 휘릭.
제운비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수신호로 주변을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
휙. 탁.
-숙지. 이동하겠음.
고룡 토벌조. 하나하나가 화경, 혹은 그에 근접한 인물들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는 뇌천벽도 있었다.
“이거야 원…….”
그는 조금 기분이 미묘했다. 근래 들어 제운비의 행태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것? 없어졌다. 스스로를 과하게 믿는 것? 그 또한 줄어들었다.
어찌보 면 예전보다 성격이 유해지고 조심성이 많아졌다고 할 수 있는 변화였는데… 그걸 달갑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도 결국 속물인가…….’
타앗. 탓. 파삿!
도약과 더불어, 뇌천벽은 또 하나의 언데드의 머리를 쪼갰다.
아무리 죽음을 모르는 육체라도, 강기라는 초월적인 파괴력에는 버티지 못한다.
반면 화경의 고수라 해도 강기를 아무렇게나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숫자가 문제. 하나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이 땅에는, 곳곳에서 사체들이 버섯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크르륵. 크르르륵.
타닥!
괜히 어둠나무 지대를 죽음의 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지대는 인간에게 해롭다. 당장 들이마시는 공기부터가 진득하고 불길했다.
그렇기에 이번 토벌이 끝나면, 천무학관은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게 될 테지만.
피잇! 파각! 콰아아앙!
“씁.”
폭음이 일었다. 잠시 잡념이 들어갔더니 손대중을 못 했다. 상급 언데드 정도로 생각했더니, 이번에 설친 놈은 듀라한급 정도는 되었나 보다.
크오오오!
“어딜.”
퍽! 파삭!
뇌천벽은 집중해서 다시금 소리를 죽이고, 목 하나를 겨우 들고 있는 언데드를 세로로 쪼개 버렸다.
뭉클뭉클.
진득한 사기를 연기처럼 뿜어내며 소멸하는 언데드.
타닥!
뒤이어 근처에 있던 다른 초절정의 교두 하나가 달려왔다.
“뇌 교두님?”
“괜찮소. 잠시 잡념이 들었던 모양이군.”
부웅!
검강을 돋워 건재를 과시하고, 뇌천벽은 잠시 숨을 돌렸다.
우선은 임무. 임무가 우선이다.
“제운비 교두가 신경 쓰이시나 봅니다.”
“…흠.”
그렇게 집중하려는데, 정작 상대가 흐트러진 뇌천벽의 심기를 지적했다.
“신경 쓰고 말고 할 것이 무에 있소?”
“요즘 들어 사람이 변했으니 말입니다. 뇌 교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흠…….”
타닷!
뇌천벽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발을 박찼다.
딱히 친하지도 않은 인물이, 이쯤 들어 슬금슬금 친한 척을 해 오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것도 예전에는 연대하자고 먼저 말을 걸었던 인물이기에 더욱 심사가 복잡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사람이 흔들리는 걸 보고 등을 돌리는 것은 천박하기만 했다. 그런 식이라면 자신은 뭐가 되는가.
퍼걱! 파삭!
퍽! 우드득!
팔이 넷 달린 놈. 머리가 셋 달린 놈. 이형의 언데드를 하나하나 도륙하며 그는 비틀린 심사를 풀었다.
제운비와 경쟁하게 된 것은, 애초에 그가 지나치게 독단적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무인으로서는 뛰어나다 할 수 있지만, 뇌천벽은 제운비의 젊음을 경계했다.
대개의 젊고 강한 고수들이 그러하듯, 제운비는 실패를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결정이 항상 옳다고 믿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세력으로 이어지게 되니 당연히 문제가 생겼다.
‘개인의 덕망과 우두머리의 덕망은 다르게 마련.’
쉬익! 퍼걱!
제운비는 교두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뇌천벽이 여러 번 지적해도, 그는 그저 무인이 본인의 강함에만 힘쓰면 되는 것 아니냐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사당, 파벌, 정치 문제.
화경에 일찍 진입한 고수는, 별생각 없이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챙겼다. 비록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라 해도, 자연스럽게 충성 경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학관은 한쪽만 강해서는,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된다. 애초에 리그웨더가 기존의 구대문파와 무림맹 체제를 학관 연합으로 바꾼 까닭이 무엇이던가.
쉭! 쉭! 파삭!
무인이 무예만 닦아서는 예전의 실패를 답습할 뿐이다. 학관은 무예만이 아니라 마법, 상식, 지식, 그리고 연구와 후대 양성. 심지어 학관 주변의 안정 등을 고려하는 다각적인 기구다.
‘언제까지 인간도 아닌 존재에게 중원의 명줄을 맡길 셈들인가.’
뇌천벽이 유독 천무학관의 학과장, 리그웨더와 날을 세우는 까닭은 그것 때문이었다. 한쪽에만 치우친 무력은 권력과 다름없다.
결국은 스스로 무뎌지고 부패한다. 뇌천벽 역시 제운비 못지않은 명가의 출신이지만, 섬서 출신의 뇌가는 옛 실수를 잊지 않았다.
항시 인의 장막에 갇히지 않으려고 애쓰고, 기존의 상식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현시의 주도층이 독단적으로 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을 가했다.
한데 그러다 보니 되도 않은 정치 놀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섬서 뇌가가 가장 경계하는 상황을 뇌천벽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타닥! 타닥!
피잇! 피릭!
“…음?”
복잡한 심사를 언데드 파괴로 누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신호탄이 터진 것이 보였다.
색은 자색, 그리고 청색.
그 의미를 해석한 뇌천벽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중요 정보? 즉각 철수?’
타닥! 파앗!
뇌천벽은 즉각 몸을 박찼다. 뭔가 예감이 불길했다.
사전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고룡 처치를 위한 본대가 진입하기까지 2각가량.
여기서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신호탄이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 * *
수군수군. 두런두런.
“대체 무슨 일이오?”
집결지에 도착하자, 본대의 인원들이 소리를 죽여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눈을 감고 있던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 하며 목례했다.
“뇌 교두, 오셨습니까.”
“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평대를 하던 제운비.
좋은 말로 해도 사이 좋다고는 할 수 없던 상대가 존대로 자신을 받는다. 뇌천벽은 복잡한 심사로 얼굴을 찌푸렸다.
“새로운 중요 정보라니. 대체 뭐길래 공격대의 철수까지 논할 일이오?”
“조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전원이 모인 다음에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이다.”
“…음.”
뇌천벽은 주위를 돌아보고 끄덕였다. 확실히, 보스 처리조의 인원 중 3분의 1이 아직 모이지 않은 상태였다.
“뇌 교두님, 오셨습니까.”
“아.”
아까 부르는 걸 뿌리치고 떼어 냈던 다른 교두가 아는 척을 했다. 뇌천벽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얼굴을 풀고 두 손을 모았다.
“황보 대협이었지요. 아까는 실례했소.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서…….”
이번에도 외면했다간 대놓고 척을 지자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 황보선, 아니 황보성이었나? 그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금 가까이 왔다.
“하하, 그럴 수 있지요. 그보다, 들으셨습니까?”
“무얼?”
“제운비 교두가 아무래도 적을 옮기려나 봅니다. 홍매학관으로 말입니다.”
“……?!”
뇌천벽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운비는 명실상부한 천무학관의 큰 기둥. 학과장 리그웨더나 교무처장 구용천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던 탓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홍매학관? 어째서?”
“글쎄요… 저도 건너 건너 들은 터라… 저보다는 뇌 교두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지난번에 뭐 보신 것 없으십니까?”
“음…….”
본 것이라.
생각해 보니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했었다.
홍매학관의 교두, 천극태의 죽음에 제운비가 마지막으로 함께했었던가.
그러고 보니 제운비는 원래부터 홍매학관에 여러 가지로 동경을 품고 있기는 했다. 사문이라면 사문이다.
홍매학관은 옛 구파일방 중 화산파의 유산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색채가 강했다. 그런 와중에서 학과장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던 천극태가 죽었으니, 예전의 성세를 유지하기는 아득할 터.
‘일이 또 이렇게 되기도 하는 건가…….’
뇌천벽은 힐끗,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제운비를 살폈다.
조용하고 고고한, 그리고 가진바 무위에 비해 시야가 좁은 인물.
이제껏 자신과 여러 차례 충돌했기에 좋은 말로 선의의 경쟁자였지, 호감과 악감이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라 해도, 천무학관에 비해 벽지나 다름없는 홍매학관, 그곳으로 가게 된다고 하니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꽤나 고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의 천무학관은, 뇌천벽이 조정하기에 좀 더 쉬워질 것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번져 있다고 하면…….’
아마 되돌리기란 힘들 터.
제운비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학과장과 교무처장이 논의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견고했던 천무학관의 세력 구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마 그 때문에 황보선 또한 자신에게 새로 줄을 대려고 하는 것일 터였다.
‘좋은 일로 봐야 하나. 나쁜 일로 봐야 하나…….’
타닥. 휘익! 탁!
반각가량 지나자, 인원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그제야 제운비의 입이 열렸다.
“다들 주목해 주시길. 사전에 예상했던 것과 다른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레이드는 어둠나무가 아니라 고룡부터 먼저 처단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고 합니다.”
수군수군.
“그게 무슨 소리요? 갑자기?”
“아니, 제압까지 고작 1각 남겨 두고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직격타에 토벌조 대부분이 동요했다. 제운비는 손을 들어 소란을 가라앉힌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탑 파괴조에서 어둠나무의 새로운 양태를 보고해 왔습니다. 다름 아닌…….”
제운비가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을 이었다.
탑 파괴조장 매소봉 교관의 발견. 흑객이 소속되어 있는 1조의 보고였다.
내용인즉 고룡이 동서남북에 위치한 어둠나무의 지원을 받는 양태가 아니라, 실은 네 그루의 어둠나무를 지키는 가디언으로서 고룡 쉐이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어둠나무가 생성하는 ‘무엇’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 어지간한 사람은 그 나무가 만들어 내는 어둠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먼저 가디언을 처리하고, 다음으로 위험 요소인 어둠나무를 순차적으로 파괴한다. 이렇게 방침을 바꾸어야 되게 생겼습니다.”
수군수군. 두런두런.
제운비의 말에 다들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드. 공격대의 구성.
던전 보스 토벌이라는, 대단위 작전은 갑작스레 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십 수백의 인원이 모여서 공격대를 구성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벅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보의 신뢰도는 어떻소?”
“나중에 다시 판별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상급입니다. 교관 매소봉의 무위는 초절정. 화경 직전의 단계입니다. 그런 그가 간신히 생존하여 제공한 사실입니다.”
“…제 교두, 그 말은 곧.”
술렁술렁. 웅성웅성.
본대의 고수들이 자기 위치조차 잊고 시장 바닥의 사람들처럼 떠들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고룡의 처치, 그리고 어둠나무의 파괴는 전원 최소 화경급의 고수가 아니면 참가하지 못한다는 말 아니오?”
“맞습니다.”
공략의 난이도가 지극히도 상승해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