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82화 (183/310)

182화. 어둠의 나무, 기사 대장 (2)

솨아아아!

수백의 천마가 달려들었다. 파도처럼.

-크르르륵!

노도와 같이 쏟아지는 신형을 향해, 검은 기사의 검이 휘둘러졌다.

퍼어엉. 퍼어엉. 퍼어엉!

베이고, 터진다. 박살 난다.

한 번의 공격에 다섯, 여섯의 신형이 지워진다. 방어는 그대로 뚫리고,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간 풍압에 휘말려 찢겨 나간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

-크워어어어!

검은 기사의 공격은 거대한 거인의 주먹질과 같았다. 애초부터 단순한 근력과 완력만큼은, 천마 자신도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파사사사삿!

하나, 아무리 강맹한 주먹이라 해도 거인이 휘두르는 주먹으로 쏟아져 오는 파도를 다 막아 낼 수는 없는 법.

터지고 베이면서도 수십의 천마가 달려들었다. 검은 기사의 거검이 쓸고 지나간 직후, 비어 버린 몸통에 다섯의 인형이 달라붙었다.

떠떠떠어어엉!

촌경을 작렬시켰다. 기묘한 충격음이 울렸다. 검게 물들어 있던 거인의 몸에 다섯 군데의 흰 반점이 생겼다.

휘청하고 검은 거인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체구가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 천마가 가한 일격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절정 고수를 즉사시킬 일격이었다.

-…크륵.

하나 그는 물러섬과 동시에 다시 일검을 뿌렸다.

패애애액!

타격과 동시에 천마의 신형 다섯이, 그리고 뒤따라 달라붙던 신형 일곱이 즉각 증발했다.

퍼어엉! 콰드드득!

퍼벅. 퍽!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군.”

“대체 얼마나 단단한 몸뚱아리인지.”

타다다닥!

기백에 가까운 천마의 신형들이 거인의 주위를 돌며 말했다.

적은 강하고 빠른 데다 금강불괴다. 검기, 검강을 쓰지 못할 뿐, 이 정도면 외가 기공으로 현경에 오른 고수와 다름없었다. 범상한 일격 일격이, 화경 고수의 필살기에 버금갔으니까.

천마 역시 검강을 쓰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힘에 제약을 걸어 둔다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상대.

“좀 궁금하긴 하잖아?”

“그 단단함이 어디까지인지.”

하나, 그렇기에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쉬쉬쉬이익!

천마의 신형이 소용돌이치며 검은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 감당할 수 없는 적.

그건 벽이다. 넘을 수 없기에 벽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설 수 있다면,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서 강해질 수 있는 법.

아니, 강해지지 않아도 좋았다. 그 벽을 넘어서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애초부터 천마는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세상에 종종 있는, 공부가 재미있다고 하는 정신 나간 놈. 그런 부류 중의 하나였다. 손에 물집이 돋고, 살이 벗겨지는 고통스러운 수련과 단련을, 그는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그런 수련 후에 만나는 적수는, 그리고 그와 겨루는 싸움은, 세상의 어느 쾌락보다 짜릿했으니까.

-좋은 친구도 찾기 어렵지만, 좋은 적수를 찾기란 더욱 어려워라.

전승에 내려오기로, 화산에 독고구패라는 절대 고수가 있었다.

실제로 그런 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천마도 몰랐다. 아쉽게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하나 그놈이 남겼다는 말만큼은 극히 공감했다.

좋은 적. 친구가 아닌 적.

나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도 되는 존재.

살면서 그런 놈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패애액! 펑! 펑! 쉬쉬쉬쉭!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온몸을 뻐근할 정도로 혹사하면서 천마는 속으로 고함질렀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이던가.

‘좋아! 이거 좋아! 너무 좋아!’

고수가 절대지경에 오르면 오를수록,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진다.

어지간한 놈들은 눈에 차지도 않고, 세상 보는 눈이 딸려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다.

천마가 교주가 된 후로 교단에 신경을 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도무지.

하나같이 교주님, 교주님 하고 떠받들기만 할 뿐, 당최 이야기 상대가 되었어야지?

-네가 느끼는 검이란 무엇이냐? 무란 무엇이냐?

-…….

경지에 오르기 전부터 천마의 관심은 무, 그 자체였다.

경지에 오르고 난 다음에는 더욱 갈증과 궁금함이 심해졌다.

그래서 수하들에게 그 답답함을 토로해 보면…….

누구는 무기라 하고, 누구는 몸을 지키는 것이라 하고, 누구는 천지간의 도리라고 했다.

제법 아는 놈들이었다. 하나, 그저 듣기에 그럴듯할 뿐.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 보면 결국 남의 이야기. 책을 보고 읽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왱알대고 있는 것이다.

-에라이, 니들이 유생이냐? 먹물이야? 이 정파만도 못한 새끼들아!

당연히 그들은 천마에게 쳐맞거나, 아니면 쌍욕을 들어 먹고 쫓겨났다.

천마는 외로웠고, 동시에 갑갑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내가 그때 진짜!”

울컥!

갑자기, 그 당시에 느낀 갑갑함이 떠올랐다. 천마는 전력으로 암흑벽력도를 전개했다.

콰르르릉! 콰르르릉! 콰르르릉!

검은 벼락 수십 개가 휘몰아쳤다.

치지지직! 콰드드득!

숫제 암흑의 용오름처럼 허공을 찢어발기는 광범위 타격. 그러자 거인의 몸이 드디어 찢어발겨지기 시작했다.

낙숫물도 계속되면 바위를 뚫는다고, 이제껏 수백 수천 번을 두드려도 금강석처럼 단단하던 몸이, 어느 순간 붉게 달아오르더니 기어코 찢기고 있는 것이다.

-크우오오오오!

흉성을 터뜨리며 포효하는 검은 거인.

푸와아아악!

찢겨진 육신이 터져 나간 죽은피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솟구쳐 벽력탄 터진 후의 폭풍처럼 쏘아져 나갔다.

“우왁!”

“어억!”

퍼버벅!

그 검은 기운에 백에 달하는 신형이 일제히 사라졌다.

방심했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가까웠다. 덕분에 천마는 속이 뒤집어지고 내상으로 두들겨 맞는 기분을 맛봤다.

울컥!

“끄아… 이거 오랜만인데.”

쿨럭. 퉤엣.

각혈을 뱉어 내고 제법 비틀거리는 천마.

천마군림보로 일으키는 환영은 그냥 환영이 아니다. 환영이면서 실제, 실제이면서 환영.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 극강의 공격력을 수 배에서 수십 배까지 끌어올리는 비기.

하지만 그런 만큼, 자신을 투영하여 만든 환영이 소멸되게 되면 그 타격을 고스란히 자신이 받게 된다.

단 일격에 백에 달하는 환영이 사라졌으니, 천마는 그 순간 백의 공격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크르르르르!

“우와. 제법…….”

비척대는 천마에게 검은 거인이 달려들었다. 반절 남은 대검에 맺힌 끔찍한 기운. 창백해진 천마가 막 방어로 태세를 돌리려 할 때.

찌잉!

-크륵!

“…엇?”

-주인이시여, 제가 돕겠습니다.

뭉클뭉클!

갑작스레 그림자에서 흐릿한 천마의 모습이 피어올랐다. 다름 아닌 그림자의 정령, 페이탈리스트였다.

-크르르르!

검은 거인, 롤란드는 녀석이 나타나자마자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마치 천적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반면 페이탈리스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흐. 언데드 주제에 정순한 혼돈이라니.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나 당장…….

“야.”

-예, 주인…….

퍼억!

대답하는 페이탈리스트를, 천마는 후려 갈겼다. 어느새 염화공을 가득 돋운 채로.

퍼석! 퍼걱! 화르륵!

-컥. 주, 주인이시여……?

그림자의 상극은 빛. 거기에 애초에 마공으로 일으킨 불이다. 단 몇 대의 주먹질로 페이탈리스트는 존재가 살짝 흐려졌다.

“누가 나서래. 어? 누가, 맘대로 끼어들라고 했냐고?”

까득.

천마가 이를 갈며 멋대로 나선 수하를 노려보았다. 이놈이 무슨 의도로 나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대체 얼마 만인데! 꺼져 이 새끼야!”

-검이라니. 하아… 속하가 우둔하여 감히 말씀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수하들 중에 볼 만한 놈도 있기는 했다.

그나마 겉치레가 아닌 솔직한 놈들.

아직 수준 차이는 너무 나서 말은 안 통하지만 그럭저럭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놈들.

-그래… 네 경지에서는 할 수 없지. 그래서 뭣 때문에 보자고 했다고?

-아, 예. 교주! 천하를 정벌할 기회가 왔습니다! 제게 삼개전단을 내어주시면!

-…….

그런데 정작 시간을 내달래서 말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정벌이니, 지배니, 정말 시시껄렁하기 짝이 없는 소리만 떠들어 대곤 했었다.

-닥쳐라, 좀.

그래서 천마는 거절했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고, 더 찾아오면 머리 빡빡 밀어서 소림사에 처넣는다고 했다.

천마신교에서 가장 강하다는 원로들조차, 천마가 보기에는 꼬꼬마들이었다. 코흘리개 예닐곱 살짜리 애들을 두고 혈기방장한 이십 대 청년이 애 보기를 하는 기분이랄까.

짜증 나고, 손 많이 가고, 귀찮다.

교인이고, 수하라서, 답답해도 처죽이지 않고 참은 것이다. 그런데 뭐?

중원 정복? 해서 뭐 하게. 천하 일통? 장난하나?

지배는 장난이 아니다. 천마신교의 애새끼들만 해도, 빼액거리는 코흘리개들이라 귀찮아 죽겠는데, 중원 전체를 지배? 애 보기 해야 하는 애새끼들이 갑절로 늘어날 뿐이었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자 천마는 점점 세상과 멀어져 갔다.

-질린다. 질려. 그냥 혼자 놀아야겠어.

친하고 가까운 존재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도 가끔은 먹거리나 생활용품이 필요해서 세상에 나가긴 했다.

무인이 아닌 양민들의 세상. 가끔은 평화롭고 자잘한, 소소한 일상들을 누리는 이들. 모르는 이와 술도 마셔 보고, 중원제일미라는 여인도 꼬셔 보았고, 자잘한 재담을 들으며 하하 웃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웃을 때마다 지독한 거리감을 느꼈다.

-약해. 너무 약해…….

따듯한 시간이었다. 인사하고, 반갑게 맞아 주고, 그런 거 다 좋았다. 좋은데… 너무 약했다.

자칫 손 한 번 잘못 휘두르면 퍽퍽 죽어 나갈 연약한 이들. 객잔에서 술에 떡이 된 누군가가 장난스레 그의 어깨를 두드린 순간, 그는 자칫 객잔 전체를 날려 버릴 뻔했다.

-…심마로군. 심각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탈마의 고수가 손대중도 못한다는 게.

하지만 천마는 그랬다. 쌓여도 너무 쌓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무인이었다.

싸움으로 성장했고, 싸움 그 자체가 삶이었다. 그래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는데, 경지에 오르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싸움을 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수십 년 동안 욕구불만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나니 더욱 그랬다.

독고구패라는 놈이 남긴 말이 공감이 갔다. 오죽하면 제 이름을 저리 지었을까.

혼자인 나를, 패 줄 사람 구합니다.

독. 고. 구. 패. 딱 네 글자. 그 정도로 천마는 목말라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이놈은 내 상대다. 꺼져라. 본좌의 흥을 잡치게 하지 말고.”

무식하고, 어리바리하지만, 겨우 손맛 좀 볼 만한, 금강석처럼 딴딴한 놈이 나타났다. 천마에게 눈앞의 검은 거인, 롤란드는 금강석보다 더 가치 있었다.

그런데 이걸 뺏어? 죽을려고?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 이미 죽어서 부담 없이 손을 풀 수 있는 그런 놈. 손맛을 볼 수 있는 적이란, 친구보다 몇 배는 더 귀한 존재다.

-…존명.

스르륵.

페이탈리스트는 반쯤 흐릿해진 상태로 다시 그림자로 돌아갔다. 천마는 휘청대는 몸을 바로잡고 롤란드, 검은 거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크르르륵…….

혼란스러워하는 검은 거인.

바닥까지 힘을 끌어내고 있는 것인가, 아까의 이지는 상실한 듯했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흉흉한 기세만 뿜어낼 뿐.

하나 그 기운 아래, 이미 죽어 버린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투지. 그것이 천마로서는 너무도 반가웠다. 그는 롤란드를 보고 다시금 검을 잡았다.

“…좋아.”

그래.

이걸 바랐다. 이런 것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문득 이한의 기억이 아닌, 천마 자신의 예전의 삶이 떠올랐다. 싸우고, 싸우고, 터져 나가고, 쓰러진 끝에 다시금 일어서던 그때의 기억이.

피이잇!

천마의 눈에 기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검은 광채. 어둠보다 더 어둡지만, 별을 품은 밤하늘처럼 청명하게 빛나는, 검푸른 기운이.

“보여 주마. 약속대로. 무의 극한이 무엇인지.”

콰라라라락!

수십이 남아 있던, 천마군림보의 신형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단 하나가 남은 천마의 신형.

쾌애애액!

그것이 검푸른 빛살이 되어 거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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