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어둠의 나무, 기사 대장 (3)
퍼억! 투학!
뼈와 살이 터졌다. 죽은피가 꿀럭거리며 쏟아져 내렸다.
천마가 뚫고 나간 거인의 몸통에는, 빠끔하니 찢겨 나간 구멍이 나 있었다.
꿀럭! 울럭!
하지만 곧, 그 뚫린 구멍에서 시커먼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촉수가 촉수의 손을 마주 잡았고, 하나로 연결된 촉수가 점차 두터워지고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는가 싶더니.
부르르륵.
죽은피가 왈칵 솟아올랐다, 뼈가 돋아 오르고 살이 채워졌다. 사람 하나가 뚫고 지나간 구멍이, 다 메워지는 데 걸린 시간은 끽해야 반각 정도.
거머리 저리 가라 할 만한 재생력이었다.
-쿠오오오오!
거인이 포효했다.
생명체라면 일격에 죽었을 부상이었다. 하지만 언데드. 이미 죽어서 다시 죽지 않는 자에게 부상이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이 녀석은 죽여 봤자 실시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사, 사람 맞아?”
“…아닌 거 같아. 저거 봐.”
검은 기사의 몸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이미 거인이라 할 만했던 체구는 이제 진짜 어떻게 보아도 거인, 그 자체로 변이하고 있었다.
꿀럭꿀럭!
키가 더 자랐다. 1장에 가까웠던 거체가, 이제는 4장, 5장에 육박했다.
“…트롤 아냐?”
“그렇게도 보이네.”
몸집도 커졌다. 아까만 해도 크긴 했어도 사람 같던, 길고 유려했던 인간의 체형이 지금은 검은 바위를 뭉쳐 놓은 사각형에 가깝게 굵어졌다.
퍼엉. 퍼엉. 퍼엉.
그러고도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졌다.
휘두르는 일격 일격은 이미 진공의 칼날을 넘어, 진공의 폭격에 가까웠다.
하아아아…….
천마의 파티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당무련과 소진이 체념했지만, 이제는 서문영과 운소령까지 체념하게 되었다.
“저걸 어떻게 상대해……?”
사람만 해도 몸이 커지면 움직임이 둔해지는 법이다. 아무리 개인 차가 있다 해도, 이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걸 넘어서게 하는 것이 내공, 내력이다. 하나 그조차 한계가 있었다. 기가 아무리 초월적인 힘이라 하나, 그 근간은 신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화경의 고수라 하더라도 단신으로 십만 대군을 상대하지는 못한다. 내공이 등봉조극에 올라, 의념으로 신체를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 팔다리가 없다면?
허공에 둥둥 떠서 어검술 몇 번 화려하게 펼치고, 곧 진력이 다해 골골거릴 뿐이다.
퍼엉! 피잇! 퍼엉! 파각!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뭔가. 검은 거인은 십만이 아니라 백만 대군도 시간만 있으면 쓸어 버릴 힘이 있었다.
힘도 힘이지만 그는 언데드.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니까 영원히 싸울 수 있다.
그리고 천마는…….
꽈르르르릉!
그는 검은 거인을 때리고, 후려 패고, 다시 박살 내고 있었다.
핏! 핏! 핏!
천마의 신형이 사라진다. 그리고 거인의 몸 어딘가가 터져 나간다. 다시 거인이 수복되고, 그러기 무섭게 천마가 부수고 지나간다.
그런 상황의 무한 반복.
이건 그냥 보면서도 허허 웃을 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퍼억! 퍼걱! 바각!
검은 벼락은 이제 더 이상 뻗어 나가지 않았다. 천마의 검에 담기더니 이제 그의 검 역시 거인의 부러진 검과 색이 비슷해졌다.
그런 뇌전의 기운을 담아 휘두르니, 살이 찢기고 뼈가 드러난다. 보기만 해도 상대할 엄두가 안 나는 괴물을, 떡 자르듯 자르고 부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크오오오오!
거인의 흉포함이 더해졌다. 이제까지도 괴물 같았는데, 그 괴물 같음이 더 심해질 수 있음을 보고서야 알았다.
“퓨리…….”
“응?”
문득 필리아가 중얼거렸다. 운소령이 퍼뜩 반응했다.
“퓨리를 불러들였어……. 저 거인.”
“그게 뭐야? 아, 정령?”
필리아는 정령사다. 그녀가 굳이 입을 연다면 아마 정령과 관계된 것일 터. 운소령이 그렇게 생각해서 되묻자 필리아는 멍한 얼굴로 끄덕였다.
“퓨리… 라면 그거네. 분노의 정령? 그럼 저건 버서크(Bersk)라는 말인데…….”
“…소진?”
“아, 그러니까…….”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소진이 침음했다.
운소령도 제갈세가의 방계라 학식이 많은 편이지만, 넓고 얕게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가 훨씬 지식이 많았다.
삼음절맥은 그냥 보고 읽으면 기억하니까. 특히 소진은 기억법을 따로 배워서 그 지식의 망각이 거의 없었다.
“쉽게 말하면 폭주야. 퓨리는 분노의 정령. 무인이 분노의 극에 달해서 모든 잠력을 폭발시키는 태세……? 그런 것 비슷하달까. 신체 능력을 엄청나게 강화시키는데, 대신 대가를 치러.”
“세상에.”
“…아미타불.”
운소령과 방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끔찍하게 강한 괴물이, 저기서 더 강해진다고?
어쨌든 소진의 말대로였다. 처음에는 어딘가 이지적인 구석이 있던 검은 기사는, 이제 야만 거인처럼 변해 허공을 베고 땅을 할퀴었다. 그러면서 더 빨라지고 더 강해졌는데.
핏! 핏! 핏!
천마의 공세 역시 더 빨라졌다. 이제는 눈으로 두 사람의 공방을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나는 이미 보통 언데드가 아닌 데스나이트, 그리고 또 하나는 그걸 때려잡는 학관생 2학년이다. 마법사건 전사건, 다들 눈앞에서 상식이 부정당하는 상황이었다.
“야, 당무련? 이한 쟤, 대체 뭘 처먹은 거야? 그리고 너네는 이제까지 무슨 괴물이랑 같이 학관 다닌 거고?”
“…내 말이.”
하백운의 기막혀하는 말에, 당무련이 한탄했다.
저런 애가 1학년 때 반에서 왕따였다고? 힘을 숨겼다고?
아니, 그건 말도 안 되었다. 지금 이한이 보이는 힘은, 손 한 번 휘둘러 2학년 전체를 때려잡을 만했다. 그런 힘이 있는 녀석이 괴롭힘을 왜 참겠는가.
차라리 1년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나중에 힘을 얻었다는 편이 말이 된다.
거기서 문득, 당무련과 방윤이 몸을 떨었다.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빈승도 비슷하군…….”
사람은 힘을 가지면 행동도 생각도 변한다.
이한이 힘을 숨긴 게 아니라 기른 거라면.
1년 동안 받은 모멸과 수치에 대해 이 악물고 칼을 갈았다면.
왜 이제껏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았던 건가.
‘혹시 모아서 한 번에 터뜨리려고?’
이 두 사람은 1학년 때의 이한을 몰랐다. 그가 백무룡 등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그냥 소 닭 보듯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2학년 때는 적지 않게 충돌이 있었다. 아니, 충돌이 아니라 괴롭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한이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부터다. 소문처럼 마교의 신공을 절치부심해서 단련했다면…….
이제껏 그를 무시하고 냉대했던 학관생들은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힘이 없으니 차별하고 무시할 수 있었던 자신들이, 똑같이 돌려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당무련은 거기서 힐끗, 소진에게 눈을 돌렸다.
‘뭔가 좀 방법을 찾아봐야겠는데…….’
“…은 두께가 없다…….”
불쑥.
거기서 누군가가 흘린 한마디.
“…서문영?”
“어?”
바짝 긴장하고 있던 파티원들의 시선이 서문영에게 몰려갔다.
왠지 모르게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멍한 눈으로, 서문영은 천마와 검은 거인의 격돌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듣고’ 있었다.
콰르르릉! 피잇!
폭음과 함께 휘둘러지는 공격.
천마의 공격도, 거인의 공격도 비슷했다. 속도의 극한에 이른 베기와 할퀴기는 허공이든, 바위든, 인간의 육체든, 가리지 않고 도려냈다. 그 광경이, 그리고 그 소리가, 서문영의 오래 묵은 숙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되었다.
-예리함에는 두께가 없다.
“검(劒)과 도(刀). 도와 검. 도검은 날붙이인 병기라. 그중 검은 곧 만병의 왕이다…….”
서문영은 중얼거렸다.
자고로, 검은 옛사람이 만든 병기 중에 최강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든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근본은 단봉(短棒)이니.
선사시대 이후로, 사람은 작은 막대 하나 들어 휘두르는 것으로 기초를 익힐 수 있었다.
찌르기, 베기 모두 가능하며, 제 몸 지키기에 일상에서 더할 나위 없는 무기. 무인의 친구이자 그 단순함이 우주의 이치에 닿은 병기.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도(刀)는 검이 나온 뒤 한참이나 후에 만들어졌다. 한 자루 검만으로도 병기로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청출어람이라. 푸른 풀이 쪽빛(남색)을 낳는다. 두께를 더해 견고함을. 날을 하나로 하여 힘을 모은다. 무게를 더하여 둔해졌으되, 그 예리함은 더욱 치열해지니…….”
도는, 베기 한정으로는 검을 뛰어 넘는다. 애초에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병기가 바로 도였다.
검은 양날. 앞뒤에 날이 선다. 가볍기가 깃털과 같고, 쾌속함이 바람과 같으며, 영활하고 부드럽기가 독사와 같다.
찌르기를 최우선으로 하며, 그 끝에 베어 내는 연환이 일품. 그 변환이 표표하여 세상 어느 굴레에도 묶이지 않는다.
‘하나 도는 묶인다.’
그 날은 하나. 두텁고 둔하여 수발이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 제 몸을 무겁게 만들었으니, 그로 하여 필살(必殺)이라.
대저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 무거운 것은 땅에 떨어짐이 당연한 이치. 따라서 도가 행하는 가장 큰 공격은 ‘아래로 내려치며 베는’ 것.
피이이잇! 퍼억!
천마의 검이 또 한 번 거인의 몸을 가른다. 서문영은 그 모습을, 그리고 그 소리를 눈과 귀에 담았다.
‘그렇구나.’
도.
비록 그 몸은 두텁고 둔중하나, 예리함에는 두께가 없다. 무게가 곧 힘이 되고, 힘이 곧 속도가 되면, 그 예리함은 쾌검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무게를 가득 싣고, 일격 필살로 휘둘러지는 도. 그렇기에 그 최적의 살초는 오로지 베기, 그 방향이다.
‘위에서 아래로.’
뇌천벽력도. 어째서 벽력이던가. 간단했다. 벼락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천지간에 가장 커다란 힘일진대, 그조차 아래로 내려 꽂힌다.
벼락이 하늘에서 하늘로, 도의 날이 옆에서 앞으로 베어 갈 수도 있다. 하나 그 최강은 말할 것도 없이 내려치기. 무게로 힘과 속도를 더해 예리함을 더하고.
‘사선.’
휘두르는 것은 사람이라. 예리한 도를 든 이는, 다리를 뿌리로 하여 등 근육과 팔을 일거에 쓰니 그 힘은 휘영청 허공을 가른다.
그 힘이 휘우듬히 휘어지기도 하니, 이 또한 하늘을 찢는 형상이라. 그 빠름이 극에 다르면, 이것이 곧 벽력이니.
뇌(雷)는 천지간에 가장 강한 힘이며, 그 빠름이 바람보다 더하고, 막는 것을 모두 부순다. 하여.
‘예리함에는 두께가 없다…….’
암흑벽력도라.
이상할 정도로 서문영은 깊이 빠져들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왜 천마가 그를 부르며 잘 보라고 한 것인지.
어째서 암흑벽력도의 소리가 그의 귀에는 들리는 것인지.
그리고 그 소리에 서문세가의 뇌천벽력도가 왜 생각나는 것인지를.
치직. 치지직.
“어… 서문영?”
“워, 워어?”
마법사 둘이 화들짝 놀라 서문영에게서 멀어졌다.
어느새 그의 손끝에서는 희미한 벼락의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