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84화 (185/310)

184화. 어둠의 나무, 기사 대장 (4)

퍼엉! 퍼엉! 푸아아악!

진공의 칼날. 포환들이 쏘아져 왔다.

하나하나가 천마의 몸으로도 경시할 수 없는 위력. 하지만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방향은 직선 일변도. 공격 방식도 단조롭다.

본능에만 맡긴 움직임으로는 흐름을 유도해서 갈기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힘은 세졌지만 머리가 둔해졌는지, 기교라곤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대다.

타악!

천마는 공중에서 도약하여 상대의 어깨 어림을 강하게 베어 냈다.

스칵! 푸하악!

크오오오!

단단하긴 하다. 지금 공격은 단순히 천마 본인의 힘만이 아니라, 상대의 힘에 더해서 거꾸로 찔러 넣는 공격이다.

결을 제대로 노려서 찢어 버린 살점을 헤치며 천마는 혀를 찼다.

‘어마어마하게 질기군.’

저 육체, 대체 뭐 하는 물건인지 모를 일이다. 비록 상대의 무위 수준에 맞춰 검기도 검강도 쓰지 않다 보니, 쓸 수 있는 검술의 위력이 제한된다.

하나, 탈마가 어디 마작 해서 딸 수 있는 경지이던가. 내력을 불어넣지 않은 검이라 하더라도, 천마의 검술은 하나하나가 극상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힘이면 힘, 속도면 속도. 화경의 고수가 극한의 기예를 담아 휘두르는 일격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크와우아아아!

저렇게 징글징글하게 달려든다.

일각? 이각? 얼추 반 시진 가까이 드잡이질을 한 것 같다. 분명히 패서 죽이고 있는 쪽은 천마인데, 오히려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부숴도, 찢어도, 베어도, 갈라도 되살아나는 괴물.

‘이거 만만히 봐선 안 되겠는데.’

아무리 언데드가 죽지 않는 존재라지만, 천마가 이제껏 입힌 치명타 횟수는 백을 훌쩍 넘어간다. 같은 데스나이트라 해도, 방어력과 내구력만 놓고 보면 이전에 상대한 청명진인이 부리던 것들보다 훨씬 피곤했다.

그냥 강기로 조져 버릴까 하고 짜증이 날 정도다. 아까 뱉은 말이 아니라면. 그리고 저 반절짜리 양손 검, 듀랜달이라는 검이 아니었다면 진즉 그랬었을 터.

후욱! 부르릉. 패액!

다시금 검은 거인이 충격파를 일으키며 일격을 가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천마는 안력을 돋워 보았다.

“흐읍…….”

구우우웅.

세상이 느려진다. 충격파를 일으키던, 눈에 보이지도 않게 빠르던 거인의 몸이 느릿하게 멎는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 앞서 보조 마법사 이경에게 받아 봤던, 헤이스트 마법의 흉내다.

두근! 두근두근!

천마신교에도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방법은 있었다. 주로 약물이나 심법으로 내력을 몸 곳곳에 퍼뜨려, 반사신경과 민첩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마가 겪어 본 헤이스트 마법이란 놈은, 엉뚱하게도 심장을 이용했다.

쿵쿵쿵쿵!

심박을 극도로 빠르게 하여, 머리로 가는 혈류의 양을 늘린다. 동시에 상단전을 개방시킨다. 그로 인해 지각력이 크게 늘어난다.

평소보다 몇 배 많은 혈류를 공급받은 뇌는, 평소보다 몇 배나 빠르게 생각을 처리한다. 그래서 헤이스트 마법을 받은 전사는, 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흠, 이런 식으로?’

이는 원래 주마등, 생사를 가늠 못 할 결전 중에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검 좀 잡아 본 고수라면 본인이 겪었거나 남의 이야기로 한 번쯤 들어 본 경험이 있다.

치열한 전장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던 중에, 세상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자신의 머리는 명료하게 돌아가는. 평소에는 발휘되지 않던, 극한 상황에 발휘되는 인간의 잠재력.

헤이스트는 그걸 인위적으로 쓰는 방법이다.

‘이거 쓸 만한걸. 본 교에 마법 배우는 애들도 좀 따로 둬야겠어.’

천마는 초급이나마 마법에 손을 대어 두길 잘했다 싶었다. 가면 갈수록 이 길이 아니다 싶어져서 접긴 했지만, 일단 무공으로 마법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기를 마나로 쓰는 방식을 이해하게 되면, 향후에 도움이 크게 될 터. 그리고 그건 천마처럼 무공이 아득히 높은 고수가 아니라면, 오히려 익히기 쉬울 것이다.

쿵쿵쿵쿵. 투욱! 투욱!

심장이 거세게 뛴다. 혈류의 가속을 약물 대신으로 하여, 천마는 원래 천마신교에 있던 뇌정경을 자극하는 심법에 새로운 묘리를 섞어서 썼다.

두두두둑!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헤이스트 흉내를 더욱 강하게 끌어낸다. 그러자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구우우웅.

느리게, 먼저 검은 거인 롤란드의 발이 땅을 디딘다.

후욱! 후우욱!

다음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거대한 몸이 일으키는 근육의 움직임. 시작은 하복부였다. 복강을 움직여 흉강에 공기를 강제로 주입한다. 그러고는.

우트트트특!

전신 근육이 경련하듯 거세게 떨렸다.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천마는 그에 혀를 찼다.

‘세상에나. 이 정도였어?’

지금 그의 세계는, 거의 시간이 정지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빠르게 경련을 일으키는 롤란드의 근육. 내력의 수발 없이 이런 힘을 내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쿠드드득!

근육이 경련하며 뼈를 끌어당긴다. 두터운 거체가 보이는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한 움직임. 최고조까지 끌어당겨진 팔이, 급격하게 팽창하며 휘둘러진다.

빠우우웅!

기묘한 소리가 난다. 듀랜달. 칠흑처럼 검은 대검이 크게 휘둘러지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충격파로 이어질 귀를 찢는 폭음을 느리게 들으면 이런 것일까.

푸아아악!

충격파가 진공의 칼날로 변해 날아든다. 천마는 궤도를 읽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더욱 집중했다.

투둑. 으드득!

검은 거인, 롤란드의 팔에서 근육이 찢겨졌다. 예상대로다.

애초에 인간의 신체로 초음속 충격파를 발생시킬 위력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과도한 힘을 억지로 쓰게 되면, 당장 본인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지는 것이 당연.

천마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저런 힘을 몇 번만 쓰면 공격하다 말고 제 몸이 터져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지이잉. 투둑.

“……!”

거기서 중요한 것을 보았다.

무언가 짙은, 색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기류. 그건 한없이 끈질기고, 두드려도, 두드려도 부러지지 않는, 오래도록 단련된 의념(意念).

추르르르륵!

그 의념이 죽은 몸의 기혈을 자극하고, 터져 나간 살을 끌어모았다. 그 모습을 본 천마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내력도 내기도 쓰지 못하는 서역 검술로 진공의 칼날을 써 대나 했더니 그 비결은 이것이었는가. 이것이 애초에 인간의 몸으로 저런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였던가.

쓰으으윽!

“아차.”

방심했다. 상대의 지독한 의념에 감탄하던 천마는, 자칫 옷이 죄다 뜯겨 나갈 뻔한 걸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공격이 느리게 오는 걸로 보인다고 피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생각해 보니, 지금 가속(헤이스트) 중이었지 않은가. 거리를 더 벌려야지.

확!

폭풍이, 폭음이, 충격파를 담고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천마는 검은 거인의 몸을 보며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두둑. 두두둑.

그냥 터지고 부서진 신체. 천마의 반격을 받지 않아도 롤란드의 몸은 부상과 회복을 반복했다. 저 정도면 방식은 다르지만, 소림의 육신갑에 버금가는 회복이다.

그런데 내공도 아니고 외공으로 저런 몸을 갖추기까지 대체 얼마나 수련을 한 것인가.

“하, 정말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군.”

천마는 피식 웃었다.

역시, 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놈,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싶었다.

승패에 관계없이 싸움을 좋아하는 성미. 그저 무예 자체를 좋아하고,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감내하는 미친놈.

이 녀석은… 수련광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수련 자체를 즐기고 단련에 탐닉하는, 정신 나간 부류다. 그 부분은 천마 자신과 많이 닮았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롤란드는 무의 방향을 신체에, 그러니까 더 강하고 단단한 몸, 더 튼튼하고 커다란 몸에 두고, 내기의 존재를 모른 채 끝없이 질기게만 만들었다는 것.

철포의 원리와 같다. 강하고 빠른 포환을 쏘아 내기 위해서는 먼저 포의 내구도가 극한에 다다라야 했다. 극한의 공격력은 결국 극한의 내구력에서 나올 수 있다.

철포의 내구도가 약하면, 화약을 많이 넣어 봐야 터져서 박살 날 뿐이다. 힘을 너무 끌어낸 강한 공격은, 공격자 자신의 육신까지 뒤틀어서 망가뜨리니까.

그러니 롤란드가 추구한 방향도 나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먼저 무한히 튼튼한 육신을 염원했고, 그 육신을 수련으로 만들며 살았다.

거기에 결코 부러지지 않는 검, 듀랜달을 얻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궁극의 방어를 통해 초월적인 공격까지 갖춘. 최고의 전사로.

“모순(矛盾)이로군. 최고의 공격을 가진 방패라…….”

철컥.

천마는 검을 고쳐 잡았다.

원래부터 인정했지만, 이제는 더 소홀히 할 수 없어졌다. 그는 이 우둔한 전사에게 맞춰 줘야 했다.

수련한 방식으로 보아 상대는 아마도 아득한 고대의 인물일 터. 기도, 마나도, 무엇도 모르는 옛 고인. 저 무식한 잘못된 수련 방식을 평생에 걸쳐 고집했던, 우직한 전사.

“그럼 내가 최고의 창이 되어 주마.”

옛 모순의 고사를 천마는 떠올렸다.

롤란드가 무엇이든 버텨 내는 극한의 방패라면, 그는 그 방패를 뚫을 수 있는 극한의 창.

성향의 차이가 있었다. 기나 마나라는 수단과 상관없이, 천마 자신의 기질이 그랬다.

부우우웅!

그는 부수길 원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모두 쓸어버리기를.

파천(破天)을 의념하며 수련하고 단련했다. 그랬기에 이 만남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몰랐다.

부르르르르!

크오오오오!

천마의 검이 잘게 진동했다. 고대의 무인 롤란드가 포효하며, 수백만, 수천만 번을 연습해 왔을 베기로 응대했다.

“잘 봐라. 이게 바로…….”

숨이 막혔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부우우우우웅!

내력도 내기도 넣지 않은, 검기도 검강도 아닌, 순수한 물리력.

극한으로 쥐어짠 힘을, 초진동으로 바꾸어 검에 담는다. 1초에 수백 수천만 번의 떨림이 일어나는 검. 심지어 지금의 천마는 롤란드와 다르게.

헤이스트의 세계에 있는 중이었다.

“암흑---벽력도!”

촤아아악!

시간이 최대한 가속된 세계에서 휘두르는 일참이 허공을 갈랐다.

패애애액! 파각!

그리고 그 일참은, 롤란드의 검격을 그대로 붕괴시키며 쭉쭉 뻗어 나갔다.

콰드드득! 콰드드득!

그리고 그 진동이 터졌다. 수천만 번의 진동이 수억 번의 베기가 되어, 무한의 방벽이었던 검은 거인. 그 가슴에서 터져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크르르르…….

그리고 심장이 터졌다. 검은 거인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슈우우욱.

거체가 줄어들어 다시금 1장 정도의 작은 몸으로 돌아온 롤란드.

-…이것이 무의 극한인가.

비척비척.

그는 완전히 뜯겨 나간 몸으로, 어떻게든 어기적거리며 한 무릎을 꿇고.

-훌륭하오. 기사여. 그대의 검에 놀라울 뿐이오.

세대도 세계도 다른, 절대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