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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85화 (186/310)

185화. 어둠의 나무, 기사 대장 (5)

“만족하냐?”

비틀.

전력을 뽑아낸 천마가 진한 피로감을 느끼며 웃었다.

내력을 쓰지 않고 순수한 외공만으로 싸우는 것. 오랜만에 탈진에 가깝게 몸을 혹사한 까닭이다.

스스스슥.

-만족하오. 심히 아쉽군. 살아생전에 당신 같은 강자와 겨루어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투둑. 투둑.

롤란드의 몸이 검은 진흙처럼 변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죽지 않는 언데드라 해도, 근원을 파괴당하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는 법.

천마가 내지른 초진동의 검은, 내력을 담지 않고도 데스나이트가 세상에 현현하는 근원을 분쇄해 버렸다.

“죽어서라도 만난 게 어디야. 어쨌든, 재미있었다. 덕분에 배운 것도 많았고.”

천마는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그냥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상대가 비록 고대의 무인이라 기도 마나도 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평생 몸에 익혀 사용했던 절기는 천마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다.

‘의념이라… 바다 건너 동영 검법을 쓰는 애들과는 또 다른 방식이군.’

살아생전에 천마는 많이도 싸움을 찾아다녔다. 강한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강하지 않은 놈이라도 특이한 구석이 있으면 일단 붙고 보았다.

그중에서 기존 구파일방의 무예와 궤를 달리하는, 해남파의 무예를 견식한 적이 있었다. 중원의 검법에 왜도술이라는 동영의 섬나라 검법을 접목해서 새로 발전시킨 무예.

내공보다는 외공에 치중한, 그러고도 상승의 무예에 오른 지독한 실전 검법. 듣자 하니 그 나라는 일년 내내 사시사철 전쟁이 끊이지 않아, 검귀들이 넘쳐 난다던가.

‘확실해. 그저 체만 단련하고도 경지에 오르는 방식이 있다.’

내력을 쌓지도 않고, 그저 수십 수백만 번 휘두르고 피를 보며, 강자라기보다 아귀에 가까운 것들이 넘쳐 나는 동네.

아쉽게도 그때는 귀찮아서 동영까지 가 보지는 못했지만, 엉뚱하게도 서역의 고대 검사에게서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롤란드는 내공을 운용하지도 않고, 잘도 신검합일까지 스스로의 경지를 올린 강자 중의 강자였다.

“어쨌든, 내가 이겼다. 앞으로 잘 쓰도록 하지.”

철컥. 턱.

롤란드의 검은 검을 집어 들었다.

두웅.

검은 검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반절이 부러진, 원래라면 양손 대검이었을 거대한 검.

덕분에 일반적인 검의 모습보다 다소 두텁고, 칼자루가 대단히 길었다.

웅웅웅웅.

“오우.”

천마가 두 손으로 잡자, 검은 검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검으면서도 살짝 푸른 기를 띠는, 스산하고 무거운 느낌의 기파.

-부디 조심하시기를.

“응?”

투둑. 투두둑.

롤란드가 흙으로 돌아가며 한마디를 더했다. 근원이 파괴된 그의 몸은 어느새 가슴 어림까지 사라지고 있었다. 소멸이 가속화된 것일까. 조금 후엔 목까지 흙으로 변하고 있었다.

“뭘 조심해?”

-나는 애초에 이 시대도, 이 세계도 아닌 곳에서 존재했던 몸이오.

-하지만 불려 왔지. 아무 인연도 연결도 없는 이 땅으로. 나는 배움이 깊은 편이 아니라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저 나무만이 아니오. 이 땅에는 아직 많은…….

-…위험한 구멍이…….

푸스스슥!

“야! 야! 진짜!”

그리고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천마가 황급히 뭔가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후드득.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해도,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는 법. 심지어 이미 죽은 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리 천마라 해도 방법이 없었다.

완전히 흙더미가 되고 만 머리통을 잡고, 천마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정말, 왜 이것들은 꼭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죽어?”

철컥. 철컥.

그르르르.

“이한!”

아쉬운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운소령의 부름에 돌아보자, 이제껏 둘의 대결에 끼어들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가만~ 히 서 있던 듀라한들. 머리가 없는 죽은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우어어어!

크르르르르!

“아이고, 가지가지 한다.”

다만, 그 위세는 현격히 초라했다.

검은 데스나이트 롤란드.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저들은 공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삼엄한 예기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지금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지만, 어딘가 조잡하고 야만스러웠다. 지능이 떨어진 건가. 아무래도 수장이 죽고(?) 난 뒤에 많이들 급이 추락한 모양이었다.

“듀랜달이니까… 어, 듀라한의 검인가?”

철컥!

천마가 검은 검을 어깨에 둘러메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야, 나머지는 니들이 상대해라.”

“이, 이한?!!!”

“미쳤어!”

그냥 본척만척 애들에게 밀어 버렸다.

좀 전에 모처럼 기껏 손맛을 제대로 본 천마로서는, 저런 잡다한 것들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 * *

피이이잇! 팡! 팡!

하늘에 신호탄이 터졌다.

하나는 적색. 또 하나는 녹색.

팡! 팡! 팡!

그리고 얼마 후, 또 한 번 청색과 적색의 신호탄이 터졌다.

까닥까닥.

손가락을 꼽으며 하늘을 보고 있던 4학년 통신 마법사가 씰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철퇴 명령이다.”

“뭐? 말이 돼? 이제 좀 있으면 레이드인데?”

와락.

호위이자 짝인 무림인이 암호 표를 들고 확인했다. 혹여나 뭘 잘못 보았나 싶어서.

하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무림인은 허탈하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내저었고, 마법사는 커다란 수정구 위에 두 손을 놓고 정신을 집중했다.

“철퇴 명령입니다. 현 시간부로 즉시 위치를 이탈. 을호 집결지로 이동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대단위 메시지 마법으로 동시에 지령이 하달되었다.

철수, 그리고 후퇴.

“아니, 무슨… 레이드가 장난도 아니고.”

무림인들은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쓸어내렸다.

천무학관 전체가 동원된 작전이다. 그런데 작전 개시를 2각(30분)가량 앞두고 전원 철퇴라니?

이 일이 나중에 알려지면 경쟁 학관들이 신나게 씹어 댈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마음이 영 무거웠다.

“장난이 아니니까 그렇지. 죽으면 다 끝이라고.”

반면 마법사들은 재빠르게 결단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준비만 충분히 되면 드래곤에게도 지팡이를 휘두를 수 있는 자들이다.

달리 말하면 준비가 안 되면 일개 검사에게도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자들.

그렇기에 그들은 후퇴에 익숙했다. 명예도 위세도,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다. 살아만 있으면 수치도 모욕도 갚을 수 있는 법.

“좀 잡아 줘.”

“이거 들어 줘.”

“나 좀 업어 줘.”

“젠장, 마법사들이란!”

이런 곳에서 냉철한 자와 열혈인 자의 차이가 갈렸다. 마법사들은 무인들에게 탑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플라이 마법이나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도 굳이 마법으로 이동하려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두두두!

“적 접근. 추격대로 추정.”

그들은 마나를 아껴야 했다. 아군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파도처럼 몰려오는 언데드 대군을 보고, 마법사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사전 준비대로 퇴로 확보.”

“에어리얼 슬로우(범위 속도 저하).”

팟! 팟! 팟!

푸른, 혹은 녹색의 섬망이 땅 위로 뿌려졌다.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사람은 무림인에게 업혀 가면서 자세 제어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잠시 자리에 멈춰서 마나를 있는 대로 다 쏟아 냈다.

구워어어어-.

크으으으으!

대저 기습이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에 성사되는 법. 의도가 노출되면 추격당해서, 후퇴가 일패도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급속 후퇴는 급습보다 더 위험한 군사 행동이었다. 퇴각하는 적군만큼 공격하기 쉬운 것이 없으니까.

“팬텀 스티드다!”

“데스 나이트! 고속 접근 중!”

아니나 다를까, 대규모 철퇴를 하는 중에 유령마를 탄 데스나이트가 천무학관의 후미를 노리고 돌격해 왔다.

“에에라! 새끼들이! 잘 걸렸다!”

정예병과 잡졸의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가, 철군을 얼마나 침착하게 하느냐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천무학관의 공격대는 최정예라 할 수 있었다.

“삼재진으로!”

“천망회회!”

콰드드등! 콰각!

마법사들은 버프와 디버프를 걸고, 무인들은 추격해 오는 적 기병, 데스나이트를 상대했다. 그것도 반드시 3인 1조로 유기적으로 조를 짜서 상대했다.

크에에에…….

크루루루루…….

덕분에 후퇴 중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위험 등급이 낮은 언데드는 마법사들에게 발이 묶여서 추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데스나이트 같은 고급 병종이 신속하게 추격해 왔지만, 울분에 찬 무림인들의 전력에 별 손을 쓰지 못하고 부서졌다.

“제기랄, 이 힘으로 때려 부쉈 었으면…….”

“이리 부숴 봐야 반나절이면 도로 살아날 것들인데…….”

공격대는 아쉬움에 눈물을 머금고 일단 작전대로 뒤로 물러났다. 대부분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일부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발생했기에 전원 철퇴라는 명령이 떨어졌는지 두고 보자며.

* * *

“자칫하면 존재 자체가 오염될 수 있습니다.”

을호 집결지는 어둠의 나무 인근에서 백 리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완전히 철수해서 재집결한 공격대의 각 조장은 입을 떠억 벌렸다.

“어… 제운비 교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오염이라니. 흑마법의 저주 같은 거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조장들의 질문에 제운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스윽.

시선을 받은 매소봉. 왠지 모르게 안색이 파리한 그가 쿨럭, 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필드 던전, 어둠나무 지역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일각가량 그가 경험한 것을 설명하자, 공격대의 대원들은 술렁거렸다.

“그저 보기만 해도 정신이 뿌리째 흔들린다고?”

“그게 가능한가? 아니,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으음… 이론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외다. 당장 석화의 저주만 해도…….”

웅성웅성. 시끌시끌.

난상 토론이 벌어진 공대 수뇌부.

주로 지식이 많은 마법사들이 서로서로 의견을 내고, 무인들은 골똘히 그 말을 챙겨 들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대로 철군하는 것이 좋을지도…….”

“그게 무슨 소리요! 공격대가 장난인가! 이번 원행에 물자가 얼마나 소모되었는데!”

“허어, 소모된 물자를 아까워할 때가 아니외다. 애초에 상정했던 것과 상황이 크게 달라졌어요.”

“달라져 봐야, 뭐가 달라집니까? 공격대는 군사행동입니다. 그리고 군대에는 사기와 시기라는 것이 있어요!”

대개의 의견은 신중파와 강행파였다.

주로 마법사들은 피해가 클 수 있으니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인 반면 무인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어둠나무가 괴이한 열매를 맺어 내고 있다, 그 외에는 기존의 정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퇴각하면서 상대한 데스나이트도 전략 때문에 셋이서 상대했지, 혼자서도 썰고 남았소!”

“맞소이다. 언데드 따위. 노~~~력이면 안 될 게 무에 있습니까!”

“방금 말씀 하신 분 누구시오?”

다소 이상한 소리를 하던 교관 하나가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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