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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88화 (189/310)

188화. 유장위의 관록 (3)

뜨끔. 뜨끔.

시야가 일렁거렸다. 바라보고 있자면 눈을 욱신거리게 하는 어둠이었다.

그럼에도 집중해서 보고 있자면, 천천히 눈이 익숙해지며 사람 비슷한 형체가 보였다.

크르르르. 췌에에에…….

기묘한 울음을 흘리는 괴물들.

키가 컸다. 대략 5미터가량. 가량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건, 머리가 ‘사슴’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뿔. 길이가 1미터를 넘는 사슴 특유의 우거진 나뭇가지 같은 뿔.

그런 걸 머리에 달고, 몸은 비쩍 마른 데다 군데군데 뼈가 드러나 있었다. 몸에는 버석거리면서 깨져 내리는 얼음이 끼어 있었고, 초점 없는 탁한 눈동자는 붉었다.

말 그대로 괴물.

그런 괴물 놈들이 어둠나무 주변에서 십여 마리 이상이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기분 나빴다. 보고 있자니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한 불쾌감.

“으윽… 큭……. 흑…….”

“그만.”

툭툭.

제운비가 두드릴 때까지, 뇌천벽은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강하게 끌어내리자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돌리고 무너져 내린 다음 한참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뭐였습니까?”

“…몰라. 처음 보는 놈들이었소.”

부르르!

뇌천벽이 본 것을 설명했다.

큰 키. 사슴 같은 뿔. 그리고 얼어붙은 썩은 몸을.

“머리가…….”

“뿔 달린 사슴이오?”

마지막은 전형적인 언데드의 특징이지만, 앞의 두 가지는 처음 듣는다. 다들 그게 뭔가 하는 얼굴이었지만 유독 한 사람, 연구직이라는 마법사 하나만 눈을 가늘게 떴다.

“짐작 가는 게 있나?”

“…확실한 건 아니라 직접 봐야 알겠습니다만. 제 교두님? 이번에는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음.”

제운비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정신 오염의 가능성은 뇌천벽이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뇌천벽은 화경이니만큼, 상당히 정신력이 강한 고수였다.

그런 그조차 조금 전의 정찰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런 것을, 일개 연구직 마법사가 해도 괜찮을까? 혹여 발광해서 고함이라도 지르면? 정찰조 전원이 위기에 처할 텐데?

부스럭.

그런데, 같은 생각을 마법사가 했던 모양이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잘 말린 나뭇가지에 가죽과 헝겊을 말아 놓은, 단검 길이의 길쭉한 재갈.

“이걸 제가 입에 물면 됩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지르지 못할 겁니다. 혹여 더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톡톡.

그가 자신의 뒷덜미를 손날로 쳐 보였다.

“기절시키시면 됩니다. 만에 하나, 손을 과하게 쓰시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제운비의 얼굴이 굳었다.

여기서 굳이 말해서 ‘손을 과하게 쓴다’의 경우는, 여차하면 죽이라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는 씨익 웃었다.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그냥.”

“음.”

그의 눈에 서린 집착. 흡사 광기에 가까운 열망을 보고 제운비는 이해했다.

그는 진심이라는 걸. 자칫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좋으니, 본인의 지식욕을 채우고 말겠다는 것이라는 걸.

각오를 확인하고 제운비는 끄덕였다.

“이름이 어찌 된다고?”

“석필입니다. 돌로 만든 붓이라지요.”

“석필. 알겠소. 기억하리다. 딱히 준비할 것은?”

“뭐… 없습니다.”

“그럼 바로 갑시다. 집중하도록 열을 세지. 뇌천벽, 수를 세어 주겠나?”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인물에게 시간을 많이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괜히 없던 망설임만 생기니까. 제운비의 그런 판단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뇌천벽이 거들었다.

하나, 둘, 셋…….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두 사람은 그의 양쪽 옆에 바짝 붙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후읍. 꽈득!

재갈을 문 마법사가 몸을 일으켜 어둠나무를 향했다. 그러고는 툭, 툭, 몸을 경련하기 시작했다.

‘스물하나, 스물둘…….’

제운비는 수를 헤아리며 마법사의 안색을 살폈다.

빠드득. 주르르륵.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고, 재갈을 문 입가에서는 침이 흘러내린다.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이다.

“우브븝… 크르르릅…….”

이제 그만, 그렇게 생각한 제운비가 그를 내리려 할 때 뇌천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것을 보았다.

‘아직? 조금 더?’

끄덕끄덕.

뇌천벽이 말 대신 고개로 대답했다. 괜찮을까 싶었지만 제운비는 그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뭐가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본인이 겪은 것이니까.

‘마흔다섯. 마흔여섯…….’

끄르르륵…….

오십 가까이 될 즈음에, 마법사의 목에서 기묘한 소리가 일었다.

탁탁.

뇌천벽이 마법사의 가슴을 두들겼다. 제운비는 이를 알아듣고 즉각 그의 마혈과 아혈을 짚으며 몸을 내렸다.

그르륵. 그르르륵.

거품을 물고 하얗게 질려 있던 마법사는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다가 푸우, 하고 한숨과 침을 흘려 냈다. 제운비는 재갈을 물린 채로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소? 정신이 드오?”

“크윽… 으읍, 으으읍.”

마법사가 끄덕였다. 재갈을 풀어 내고 잠시 정신을 수습할 시간을 주자, 그가 긴 한숨을 토해 내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 부스럭.

들려 나온 것은 작은 병. 마법사가 코에 대고 크게 들이켰다. 에취! 에취! 하고 요란한 재채기를 한 다음,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그가 설명했다.

“웬딩고, 혹은 웬디고. 언데드 계열의 마물입니다. 문헌 자료에나 나오던 놈을 확인했습니다.”

“흐음.”

“문헌이라?”

기묘한 언급이었다.

이제껏 중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마물. 그런 것이 갑자기 나타났다. 왜? 어째서?

그리고 문헌에 존재했다는 뜻은 또 뭔가. 이제껏 나타난 적도 없는 몬스터가 문헌 자료에는 적혀 있었다고? 어떻게? 누가 보고를 했기에? 이걸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학과장님이 따로 저술하신 서적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은 다른 세상의 존재를 저희보다 많이 접해 보셨으니까요. 물론 실제로 나타난 적이 없다 보니, 저희 같은 연구직이나 좀 알고 있을, 이번 일이 아니면 가치 없을 정보입니다.”

“음.”

뭔가 찜찜함을 느낄 때, 마법사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운비는 그걸로 그럭저럭 납득은 했다.

하기야, 애초에 대격변의 날 이전부터 살아온 존재가 그녀다. 다른 차원에서 날아온 인물인 만큼, 이것저것 경험은 많으리라.

그리고 그 경험을 습득한 연구직 마법사는 이번만큼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냉기 특화의 언데드. 그렇게 보시면 될 겁니다.”

냉기 폭풍을 두르고 다니는 언데드. 약점은 불, 열기. 심장을 녹여 버리면 정지한다.

따로 다른 방어 수단은 없으나, 기본적으로 극심한 냉기를 다루는 데다 어둠나무에게서 뭔가 요상한 조치를 받았기에 시야에 담는 것 자체가 위험을 동반한다.

그 말에 뇌천벽은 한숨을 쉬었다.

“곤란하군. 이건 뭐 눈을 감고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대신에 방어력 자체는 현저히 낮은 놈입니다. 특히 화염 내성이 쥐약이죠. 그러니 화계 마법이나 열양공, 혹은 불화살로 화망을 구성해서 쏘면 저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 주변에 통째로 불 질러 버리거나요. 기름 항아리를 던져서 깨뜨리고, 거기에 점화시켜 버리면 될 텐데.”

“……?!”

고민하던 가운데 누군가에게서 툭 튀어나온 말. 그에 다들 멈칫했다. 하지만 연구직 마법사는 눈을 빛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으음…….”

“왜, 안 될 문제는 없지 않나?”

“그건 그렇네만…….”

뇌천벽까지 찬동하자, 제운비는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그러면 된다. 딱히 해서 안 될 이유는 분명히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이 땅은 언데드와 위험한 마물 천지. 반드시 보존해야 할 귀한 삼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대응책이었다.

“특히나 불은, 기본적으로 파괴와 정화의 속성을 동시에 가집니다. 재생이 뛰어난 언데드를 퇴치하기 어려울 때, 화계는 자주 이용되는 주요한 수단입니다.”

“산불로 번지는 경우가 문제인데, 그건 미리 외부에서 준비를 해 두면 될 것 같습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라고 하던가. 확실히 경지에 이른 마법사와 함께 정찰하는 것이 유용했다. 몇 가지 방책을 더 꺼내 본 다음, 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각해 두지. 그럼 다음.”

“제가 하겠습니다.”

척.

차례차례, 화경급 무인이나 마스터급 마법사가 스스로 자원해서 실험(?)에 임했다. 애초에 그들이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크으으으…….”

“이것 좀 맡아 보시오. 아니, 아니, 드시지 말고!”

“에퉤퉷! 펩! 으윽, 이거 뭐야! 정신이 번쩍 드는군!”

그리고 그 와중에 다소 엉뚱한 보완법도 생겨났다.

냄새를 맡으라고 들이민 병을, 입에 들이 붓고는 헛구역질을 한 사람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금 그거 뭐요……? 식초?”

“예. 아니, 괜찮으십니까?”

“흐릅! 괜찮소. 지독하게 혀를 찌르는데… 덕분에 나갔던 정신이 바로 돌아왔소. 흐릅!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효과가 그만이로군.”

“허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기막혀하는 제운비. 그리고 뇌천벽에게 연구직 마법사 석필이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문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좀비 같은 언데드 몬스터에게 소금물을 뿌리면 극히 취약해진다고! 아하! 그러고 보니 소금 역시 정화의 기운이 있다고 하지요?”

“……!”

“여기, 암염입니다! 이번에 시험하시는 분은 이걸 입에 물고 확인해 보십시오!”

“소, 소리가 너무 크오! 좀 조용히 하시오!”

제운비가 나지막이 일갈했다.

참으로 경황없는 촌극이었다. 하지만 석필이 엉뚱한 인물이었기에 거꾸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명은, 사람이 하는 실수에서 비롯된다던가.

제운비나 뇌천벽 같은 정상적인 무인은 애초에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할 기괴한 시도였다.

“크으읍… 혀가 저려… 우에엑!”

“역시 암염이 효과가 좋군요. 신맛, 그리고 짠맛인가?”

치열한 전투를 상정할 때, 아무리 그것이 인외의 존재건 어쩌건, 싸움에 요구되는 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 등이다.

잘 보고, 잘 듣고, 잘 감지하면 그걸로 끝.

특히 전투 상황에서 시야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런데 마침 어둠나무에서 풍겨지는 정신을 혼란시키는 것은, 특히나 시야에 강하게 간섭해 왔다.

“미각, 그리고 후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군요. 하기야 맛을 보고 냄새를 맡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기능이니까요.”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살아 있는 존재는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식사라는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감각은 바로 미각, 그리고 후각이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원래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무인이라면, 혹은 전투 전문 마법사라면, 이런 어이없는 발견은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거의 평생을 연구실에서만 살던 연구직 마법사는 잔뜩 신이 났다.

“자, 다음 분? 다음 분? 이번에는 후추입니다. 아니면 고추기름으로 하시렵니까? 어느 걸로?”

“아니, 여기가 무슨 주방이냐고!”

극성맞은 연구원이 들이대자, 무인 하나가 신경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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