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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90화 (191/310)

190화. 유장위의 관록 (5)

“…음흉한 녀석이네.”

“어?”

혼자서 중얼거렸더니 소진이 갸웃했다. 천마는 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무것도.”

참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녀석이었다. 기껏 손발을 맞춰 둔 애들을, 뭐 하러 괜히 건드리는지.

딴에는 시험해 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궁금하다고 남의 마음을 함부로 열었다가 상처라도 생기면 어쩔 생각인가?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심성은 한 번 비틀리면, 바로잡기까지 오래 걸린다. 심마는 파고들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며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하여간 정파의 맥을 이은 놈들은, 그놈의 사필귀정이 진리라고 믿어서 문제다. 근성이 만병통치약인 줄 아는 것들.

천마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놈을 호되게 혼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한.”

문득, 서문영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전과를 축소해서 보고했다.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냐?”

“어쩌긴 뭘 어째.”

천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휙, 앞을 가리켰다.

“제일 중요한 것부터 해야지.”

“제일 중요한 것?”

“어, 밥.”

천마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뜀박질하고 난 후, 든든하게 불린 배. 피와 땀과 먼지로 끈끈해진 몸을 정갈히 씻어 내는 것.

대저 이 안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해지고, 심사 역시 바로잡히는 법. 천마는 자신만의 철학에 항상 충실했다.

“안 가?”

“…….”

“…….”

다만, 그의 드높은 깨달음을 아직 어린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거무죽죽해진 애들을 이끌고, 천마는 혀를 찼다.

와구와구!

레이드 원정대의 식사는 기본적으로 현지 조달이다.

식량은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큰 보급품이다. 그러니 원정대는 가급적이면 줄이고, 화살이나 폭약 같은 고가치 장비를 먼저 챙기는 법이다.

하지만 어둠의 나무 지대. 주변이 온통 언데드인 지역에서는 현지 조달을 할 수 없다.

몬스터고 짐승이고 죄다 죽어서 썩은 것들을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천마가 먹어 치우는 것들은 죄다 페미컨이었다.

후루룩! 후루루룩! 와그작.

페미컨 죽. 구운 페미컨. 그나마 밀이 든 비스킷 같은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건량. 거칠고 먹기 힘든 음식들이었다.

그럼에도 천마는 잘도 먹어 댔다. 평소에 미식을 즐기기는 하지만, 그는 맛없는 음식도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으아…….”

호쾌할 정도로 음식을 비워 대는 천마를 보고, 일행들은 질린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안 먹냐?”

“아니… 음…….”

“남길 거면 줘. 내가 먹지.”

천마는 혀를 차며 깨작대는 이들이 남긴 음식을 죄다 쓸어 담았다. 그렇게 혼자서 5인분을 다 먹어 치운 다음, 그는 지저분하게 트림을 했다.

끄르륵-!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라. 여차하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니까.”

전생에 수도 없이 싸움판을 겪었던 천마의 경험담이었다.

“특히 땡중. 너는 몸을 많이 쓰잖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약해진다.”

“아니… 음, 나는 비린 것을 먹을 수 없는 몸이라.”

지목받은 방윤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는 소림승. 엄연히 승려였다. 그리고 페미컨에는 곡물 가루는 물론, 육고기도 들어간다. 당연히 먹기 꺼려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도 천마가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였다.

“경전을 귓등으로 읽었구만. 먹으려고 일부러 죽이지 마라. 피 흘리고 고통받으며 죽은 것을 먹지 마라. 불가의 3불이, 이미 음식으로 나온 고기도 먹지 말라고 한 건 아닐텐데?”

“어?”

뜻밖의 말에 방윤의 눈이 커졌다. 설마하니 상대가 자신에게 3불의 구절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불경을 알아?”

“당연히 알지.”

상승의 무예는 혼연일체다. 소림 무예의 대표적인 절기인 칠십이종 절예에는, 역대 고승들의 철학과 사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법이다.

‘그거 깨부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천마가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상대 중의 하나가, 바로 소림과 아미였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하는 법.

천마신교의 초창기 때, 유달리 끈질기고 강했던 소림을 상대하기 위해 천마는 머리에 쥐가 나도록 불경을 암송하고, 오의를 탐구해야 했었다.

“불도를 닦는다는 몸이 음식에 귀천을 따지냐? 지금 네 앞에 있는 페미컨은 어느 생명이 제 몸을 사른 결과고, 어느 장인이 공들여 만든 공양이라고.”

“…….”

“불타의 본산인 천축에만 해도 승려들이 고기를 먹는다. 인마, 너는 불자라는 놈이 공양을 거부하고 앉았냐? 그것도 죄악이다?”

“으으으음…….”

방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천마는 한때 주화입마를 참으며, 금강경과 다라니경을 백 일간 암송한 전적도 있었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인 방윤 따위, 혼란하게 만들기란 우스운 수준이었다.

“끄으응…….”

방윤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천마가 지적하지 않아도, 그 역시 격한 움직임 때문에 심하게 허기가 든 상태였다.

눈앞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고기죽이 있고, 거기에 천마가 슬슬 꼬드기며 이걸 안 먹어도 죄라고 하니, 정말 먹어 버릴까 하는 고민도 든 것이다.

“크크크.”

“배 좀 채웠으면 이한, 이제 슬슬 말해 줄 때인 거 같은데.”

툭툭. 타악.

천마가 소림승 놀리는 재미에 빠진 터에, 서문영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말해 줘? 뭘?”

“그 검은 거인, 왜 숨기라고 한 건지.”

-너희들, 일단 이 녀석은 없었던 셈 쳐라.

듀라한들이 폭주하고, 그들을 처리했을 때 천마는 롤란드가 남겨 준 검은 검을 들고 말했다.

-아니… 왜?

데스나이트.

2학년 수준에서 놈을 잡았다는 것은 대단한 전과다. 이번 레이드가 2학년에게는 기말고사 성적으로 반영되기에, 소상하게 알리면 큰 점수를 받을 거였다.

그래서 다들 불평으로 눈살을 찌푸릴 때.

-어차피 니들이 잡은 건 아니잖아? 보고서에 뭐라고 올릴 건데?

-…….

일행은 사실로 싸다귀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사정없이.

동급생이 혼자서 데스나이트를 때려잡는 동안, 뒤에서 구경만 했다? 절대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냥 기존에 있었던 전과만 보고하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굉장한 소득이니까. 그래서 일단 따르기는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은 것이다.

“뭐, 일단은… 기껏 좋은 검을 손에 넣었는데, 뺏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쓰윽. 척.

천마가 롤란드의 검을 들어 올리며 트릿하게 대꾸했다. 덕분에 서문영의 눈이 부릅뜨였다.

“진심이냐? 고작 그런 이유? 야! 이한!”

그가 버럭 할 만도 한 것이, 몬스터를 처치하며 얻은 아이템은, 원래 습득한 사람의 소유다. 당장 소진만 해도 카르삭 왕릉에서 얻은 석궁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검, 보통이 아니라서. 어이, 방윤.”

“어… 어?”

고기죽을 노려보고 있던 방윤은, 먼저 천마가 자신을 땡중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에,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검은 검을 건네준 것에 당황했다.

“그거 한번 꺾어 봐.”

“…꺾으라고? 이걸?”

“그래, 전력을 다해 봐. 아마 절대 안 꺾일 거다.”

“……?”

방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하지만 곧 그 얼굴은 오랜만에 호승심으로 가득 찼다.

그렇지 않아도 언데드가 들고 다니던 검은 검. 보기만 해도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부러져도 모른다?”

“하, 할 수 있으면.”

“좋아. 이 부처님이…….”

우드득. 꾸우우욱!

방윤이 검은 검을 두 손으로 쥐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근육이 불끈거리고,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반으로 쪼개… 주……!”

꾸드드득! 우드드득!

엄청난 소리가 났다. 검이 아니라 방윤의 관절에서.

그는 힘을 쓰고 있었다. 시작부터 오 할, 솔직히 그것도 많이 봐준 거였다.

천마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꺾어 보라고 건네줬으니, 분명히 뭔가 있긴 하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방윤은 쉽게 보았다.

“우으으읍……! 이이이익!”

본시 검이라는 병기는, 정면에서 강하고 옆면에서의 공격에 약하다.

아무리 명검, 보검이라 해도 날을 세우지 않은 검대 옆에서, 작정하고 부러뜨리겠다고 힘을 주는 이상은 버티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검은 검은 이상했다.

방윤이 칠할, 팔할, 구할의 내력을 끌어내어 옆으로 꺾는데도, 심지어 무릎까지 대어서 완전히 부러뜨릴 기세로 힘을 쓰는데도, 꺾이기는커녕 구부러지는 기색 하나 없었다.

“끄으으윽! 으그으으으윽……!”

“그만, 다친다. 야, 피 나잖아.”

너무 꽉 움켜쥐었던 탓인가, 검을 쥔 방윤의 손에서 가늘게 피가 흘렀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금종조.

소림 칠십이종 절예 중 하나로, 손아귀와 관절을 극한까지 단련한 방윤의 손이 옆으로 검을 꺾다가 베이고 만 것이다.

“후우… 보통 검이 아니군.”

방윤이 착잡한 얼굴로 포기하고, 천마에게 검을 되돌려 주었다.

“…굉장한데.”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다들 놀라서 눈을 빛내자, 천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히 보통 검이 아니지. 저 검댕이가 그 힘으로 휘두르는데 멀쩡했던 검. 이게 보통이었겠어?”

생각해 보면 그도 그랬다.

데스나이트 롤란드. 그는 죽은 몸으로도 본인의 가치관을 지킨 지능 높은 언데드였다.

더군다나, 상식의 수준을 넘는 괴력을 보인 몸이었다. 어지간한 명검, 보검도 그의 손에 쥐어졌다간, 휘두르는 사람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꺾이거나 부러졌을 터.

하나 듀랜달, 녀석이 양도한 검은 그 자신의 괴력을 버티고도 남는 경악할 만한 내구도를 가진 검이었다.

“필시 어느 동네의 성검이니 마검이니 하는 물건일 거야. 이걸 보고했다간 연구소니 조사단이니 하는 데 한참 묶여 있을 거란 말이지? 마법사들은 이능을 품은 아이템에 환장하니까.”

움찔!

딱히 겨냥하고 한 말은 아니지만, 괜히 하백운과 이경의 어깨가 들썩했다. 내공이 정심한 방윤의 괴력에도 전혀 휘어지지 않은 것에 눈이 빛났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업 시간에 그런 걸 들은 적이 있어. 4학년의 남궁호 선배였던가?”

“어, 맞아. 수르트의 검.”

화염의 공능을 극상으로 담은 신검. 듣자 하니 남궁세가는 가주가 사망하는 우여곡절을 겪고도, 그 검을 확보하는 데 1년가량이 걸렸다고 했다.

수르트의 검의 힘의 근원을 파악해서 유사한 공능을 발휘하는 양산형 검을 만들고 싶다는 마법사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심지어 남궁호가 싸움터에 그 검을 들고 나갈 때마다 마법사들이 한둘씩 따라붙는다고 했다. 천마는 그런 게 질색이었다. 내가 내 걸 왜 남의 허락을 받고 써야 하나?

“…하지만 제대로 된 감정도 받지 못했는데.”

혹여 불길한 저주라도 걸려 있다면? 그렇게 걱정하는 운소령의 눈길에 천마는 코웃음 쳤다.

“애초에 모든 검은 피를 먹고 크는 법이야.”

피 먹임이라는 의식이 있다. 새로 만든 검에 주인이나 혹은 동물의 피를 떨어뜨려, 검이 멋대로 피에 목말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행위다.

딱히 정파 사파 가리지 않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풍습이기도 했다. 그럼 그런 풍습이 왜 있겠는가?

애초에 모든 검은 피를 볼 것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병기다. 병기가 두려워서 꺼리는 게 무슨 무인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천마였다.

저주받은 마검 따위, 그는 여러 번 휘둘러도 봤고 기를 꺾어 굴복시키기도 했다.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 검은 아무래도 좋다고 쳐. 하지만 저 검은 기사가 남긴 마지막 그 말은 신경 쓰이는데.”

천마의 성미를 아는 운소령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그 말…? 아아…….”

롤란드의 마지막 말.

다른 구멍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들을 끌어들여서 이 세계로 불려 왔다고.

그건 그냥 쉽게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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