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유장위의 관록 (7)
척!
“2학년 3반 ‘반장’ 방윤 외 1명. 지통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지휘통제실에 들어선 방윤은, 경례부터 올려붙였다. 일부러 ‘반장’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면서.
덕분에 가까이 있던 교관 하나가 응대했다.
“어……? 음, 쉬어.”
그러고는 마뜩지 않은 표정이 되었다.
어중간하게 편히 선 천마를 본 것이다.
회색 돌은 하얀 조약돌 옆에서 검게 보이게 마련. 몸 전체에 예절이 밴 방윤 옆에서, 천마는 그저 편하게 있기만 했는데도 뭔가 불량스러워 보였다.
그에 뭔가 잔소리를 한마디 하려고 하던 차에.
“2학년 엘리트 파티, 정비 및 휴식 끝났습니다. 저희는 다음 임무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달하실 사항 없으십니까?”
“음? 음… 그래… 어디 보자…….”
투두둑. 파락파락.
교관은 급히 자리로 가서 서류를 뒤적였다.
스르륵. 툭.
“거봐, 내 말 맞지?”
“응? 어어…….”
천마가 따라가며 한마디 하자 방윤이 끄덕였다.
방윤은 2학년 3반의 반장이었다. 다른 반 학관생들은 그걸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는 그 직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애초에 기본 성품이 담백하기도 하거니와, 같은 반에 2학년 전체 수석 운소령과 차석 서문영이 있기 때문이다. 거만해지고 싶어도 거만해지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저 다들 반장이라는 책무를 하기 싫어하니 수행자인 자신이 맡은 것뿐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반장의 주된 일은 학관의 행정이다. 과제 나눠 주기, 같은 반 학우 챙기기, 문제의 소지가 생겼을 때 학관의 조교나 교관들에게 보고하기 등.
권력을 휘두를 줄 아는 이에게야 반장이라는 게 좋은 감투지만, 방윤은 그런 성미가 아니었다. 그냥 이름이 번듯한, 실제로는 잔심부름을 전달하는 심부름꾼.
-그러니까. 들어가면서부터 일단 ‘저 반장입니다’라는 티를 팍팍 내라고.
그래서 그는 천마의 다그침이 불편했다. 거만이나 자만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다.
소박하고 세속적이지 않게 살아온 불가의 승려에게, 그런 건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다.
“있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것도 미련한 짓이다. 물론, 실력 없이 이름만 내세우는 놈들은 허풍선이지만, 네가 실력이 없는 놈은 아니잖아?”
덕분에 천마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방윤이 뭘 고민하는지는 알 만했다. 전생에 소림승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저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다.
실상이야 어떻든, 일단 학관 지휘부에서 볼 때는 반장은 중요한 신분 아닌가? 당장 천마 자신도 교주로 있을 때, 더 센 놈을 대원으로 두고도 대주 일을 하는 놈의 보고를 듣곤 했다.
무공의 고하와 조직의 체계는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 강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천마신교에서도 그랬었다. 그러니.
-아니면 그냥 땡중 소리 듣든가. 완장질도 제대로 못 해 먹는 놈이 뭐든 제대로 하겠어?
-하. 할게!
어째 긴 설명보다 짧은 협박이 더 잘 먹히는 기분이었다. 천마는 새삼 느꼈다. 아, 정파 놈들의 뼛골이란 답이 없다고.
“음… 당장은 임무가 없구나. 다들 바쁜 터라.”
한참을 펄럭거리며 서류를 뒤진 끝에, 교관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임무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우뚝.
방윤의 얼굴이 굳었다. 찰나간에 그의 시선이 천마에게로 향했다.
피식.
천마는 그에 엷게 웃었다.
“그래. 너희는 2학년이지 않니. 2학년 독단으로 출진할 자리는 지금 없구나. 참관인을 할 3, 4학년이 다들 교관들과 외부 원정 중이라서…….”
“어, 저희는 엘리트 파티입니다. 단독 작전권을 보장받았습니다만.”
방윤이 항의해 보았다. 다들 경험자만 원한다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안 주면 어쩌자는 건가?
엘리트 파티는 던전학 교두인 월산이 보장을 한 파티다. 이들은 충분히 3학년만큼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도 2학년이지. 여기는 그냥저냥 실습 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현장이다. 필드라고 레이드를 우습게 보지 말도록. 실력이 자신 있다 해도 너희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
하지만, 마침 이 교관은 상당히 까탈스러웠다.
그는 잔뜩 수척해진 얼굴을 부비며 긴 한숨을 쏟아 냈다.
“안 그래도 3학년 몇 조가 실종이라 걱정이 많아. 무슨 뜻인지 알겠나, 반장?”
“……!”
학관에서 주최한 레이드 공격대에서, 실종이라는 말은 곧 사망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방윤은 납득했다.
실제 3학년이 여럿 사망한 상황에서, 3학년급 전력을 가진 2학년? 절대 안심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지도를 해 줄 교수님은…….”
“일단 당장은 여유가 있으신 분이 없네. 너희들은 우선 대기하면서 정비하도록.”
“어… 제출한 전과가 있는데요? 전략 전술 분석관께서는……?”
“없다니까. 돌아가서 쉬고들 있어.”
훠이훠이.
교관은 매사 피곤하다는 얼굴로 쉬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제 방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툭툭.
“어떻게 딱 예상한 대로 흘러가냐. 정말.”
발끝으로 땅을 차대며, 뒤에서 이한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방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한은 충분히 도리를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 맞나?
그간 이한이 하도 모난 공처럼,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때에 딱히 뻘소리를 하지 않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어째, 너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가르침이 없다고? 학관에서?’
그냥 머리가 멍했다. 보고를 마치고 지통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방윤에게 현장실습 수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당장 얼마 전의 카르삭 왕릉이 아니더라도, 1학년 때부터 소소하게 쉬운 던전 정도는 참가했었다.
그리고 그때는 어땠던가. 성과를 내고 나면 바로 평가가 따라왔었다. 실수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전과를 보고하면 냉엄한 가르침이 따랐다.
그게 학관 중의 학관, 중원에서 최고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천무학관의 운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다. 이건 그냥 클랜의 레이드라고. 그렇게 말한 이한의 말이 뚜렷하게 실감되는 느낌이었다. 지통실에 들어간 후 교관이 바쁘다고, 그냥 쉬라고 해산을 명했을 때, 방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내일 수업 좀 없어졌으면…….
-사제에게 나태가 깃드는구나. 삿되도다. 아미타불.
방윤 또한 학관생이었다. 교수가 예정에 없이 갑자기 휴강을 할 때면, 그도 자연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무리 정진과 수행을 평생의 일로 삼은 소림승이라도, 평가와 질책은 대개 아픈 법. 그렇기에 배움과 수업을 매번 즐겁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학관이라는 체제 속에서 경쟁은 당연하고 그 안에서 소림의 이름을 지키기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이제… 어쩌지? 이한?”
하지만 이제 가르침을 줄 교수가 없다. 경쟁이나 엄격한 질책이 없어진 걸 알게 되자, 불안이라는, 참으로 생경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반장은 넌데.”
“…….”
이한의 대꾸에 방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랬다. 그가 반장이었다. 아무리 같은 반에 학년 전체 수석과 차석이 있다 해도, 이제껏 학급 관리와 운영은 그가 맡아 왔고, 그가 해 왔었다.
“음…….”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학관에 적응하지 못했었던 이한에게 묻는 것도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짜내 몇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할 일이 생각났어. 좀 들어 줄래?”
“오, 뭔데?”
“일단은 세 가지. 하나, 우리가 배당받은 지역을 다시 돌아보는 것.”
지통실에서 새 임무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해결한 지역에서 언데드 몬스터가 재생성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지난 전투에서의 상황을 돌아보며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복습은 될 터였다.
“나쁘지 않네. 그건.”
끄덕끄덕.
방윤의 말에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대견하다고, 흡족해 보이는 얼굴… 로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두 번째는?”
“음… 다른 학우들의 상황을 보는 것.”
방윤이 얼굴을 바로 했다.
양미, 옥애, 백무룡 등. 이번에 파티를 구성하지 못한 같은 반의 다른 학우들이 어찌 움직이는지 보는 것이다.
“오, 설마 으스댈려고?”
“그럴 리가.”
“욕 엄청 먹을 건데. 알고 있어?”
“음, 그래도 계속 피할 수는 없으니까.”
방윤은 끄덕였다.
3학년 선배들에게 호되게 갈굼받고 있을 2학년 학우들.
그들은 안전은 하겠지만, 분명히 생활이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볼 때 엘리트 파티를 구성해서 나간 자신들은, 분명히 질시와 원망의 대상이 될 터였다.
“그저 우리가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확인하려는 거야.”
자신들이 확보한 단독 작전권.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행동의 자유가 있는 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될 테니까.
“…가식 쩌네. 그게 으스대는 것보다 더 질 나빠. 이 땡중아.”
“아미타불.”
방윤은 한 손으로 반장만 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럴지도. 하지만 나쁜 방향이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변한 흐름에서, 방윤은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세 번째는?”
“이한, 네 생각을 듣는 것.”
“…어?”
“너는 항상 계획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계획이 있겠지?”
방윤은 진지하게 이한을 보며 물었다.
학관의 공격대가 갑자기 탈선하는 것도, 지휘통제실의 교관님들이 새 임무를 내리지 못하는 것도, 탁월한 전과를 제출했음에도 분석도, 평가도 나오지 않는 것도.
다 이한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러니.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반장은 아니니까.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야지.”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허.”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걸 마기, 공격적이고 거친 상대의 성향 때문이라고 방윤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한이 곧 우리의 기연이다? 운소령은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히,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식과 지혜만 놓고 보자면 최고의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제갈세가의 여식이니까.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140년 전에 대격변을 겪고도 아직 생존해 있는 제갈유진.’
과거, 전 무림맹의 군사였던 이.
그녀가 뒤에서 방향을 알려 주고 있는 운소령, 그녀의 판단이다.
‘이한이 아니라 운소령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방윤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좀 놀랐는데… 좋아, 소림의 제자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이한이 기분 좋은 듯 껄껄 웃었다. 그에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비슷한 연배인데, 왜 이렇게 어른인 척하는 것인지.
“그래서, 네 생각은?”
“뭐, 문제가 발생했으면 그 근원부터 찾아야지.”
거북함을 누르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한.
“어디, 저 습지대?”
“아니,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뻔하잖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지통실, 정확히는 그 뒤의 작은 가건물을 가리켰다.
“지금 천무학관을 제멋대로 써먹고 있는 사람, 유장위를 보러 가야지.”
공격대 유일의 현경의 고수가 있는 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