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눈먼 돈 먹기에 눈먼 놈 (1)
한때 천마신교의 총군사였던 흑제갈.
별호가 어둠의 제갈공명이었지만, 그의 본성은 제갈 씨가 아니었다. 독고 어쩌고였다.
애초에 제갈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사마 외도라 불리우는 천마신교까지 흘러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문에서 삼음절맥으로 태어나 무예 한 가닥 배우지 못한 불우한 몸이었다.
하지만 삼음절맥은 몸이 허약한 대신, 천재적인 오성을 그에게 주었다.
만약 그가 관직을 얻거나 상계에 뛰어들었다면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하였을 인물이었으되… 그가 선택한 곳은 도산검림이 가득한 무림이었다.
어쩌면 무문에서 태어나 무예 한 자락 이루지 못한 몸이었기에, 가문에서 홀대받은 기억이 그를 강호에 집착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 하도 속이 검은 놈이라 제 사연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천마는 그에게 교의 일 전반을 죄다 맡겼다.
신뢰라고 하기엔 감정의 농도가 좀 옅었을지 모른다. 그때 그는 수만에 달하는 교인들을 돌보기엔 귀찮음이 더 컸었으니까. 어쨌든, 시키는 일은 잘하니까 어디 한번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보라고 맡겼던 것일 뿐.
한데 사람은 그 손에 권력이 쥐어졌을 때 밑바닥을 드러낸다 하던가.
교의 전권을 맡기자 흑제갈은 천천히 본색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돈줄이었다. 수하로 붙여 둔 한 개 대대를 바깥으로 돌리며, 제법 짭짤한 수익을 가져왔다. 교단의 살림살이가 나아졌고, 교인들의 마음에 여유가 깃들었다.
나무를 파서 만든 그릇 대신, 자기로 만든 밥상을 받았고, 냄새나는 가죽옷 대신 폭신하고 부드러운 면화로 옷을 지어 입었다. 엉성한 움막들은 기와집으로 변해 갔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니까.’
처음에는 갈 곳 없어 천마신교에 몸을 의탁한 교인들이, 점차 돈에 이끌려 차츰차츰 천마가 아닌 흑제갈의 심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교내의 신임을 쌓아 가는 와중에도, 녀석은 처신을 조심했다. 그건 천마에게도 약간은 경탄스러웠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 녀석이 10년을 넘게 의뭉을 떠는 것도 보통은 아니었으니까.
‘뭐, 삼음절맥 때문이었겠지만.’
그러나 그 인내도 10년을 두 번 넘기자 바닥이 났다. 골골하던 몸이 귀천할 때가 되자 녀석은 역천을 획책했다. 욕심이 눈을 가렸을까, 일부러 보인 틈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착각하고 분란을 일삼았다.
그래서.
때려잡았다. 철저하게.
“유 대협이… 아니, 유장위가 공격대를 휘어잡고 있다고?”
방윤이 모두가 있는 자리로 돌아온 뒤, 울분을 토해 내며 진상을 알렸다. 당연히 아이들은 쉽사리 믿지 않았다.
“아니, 그분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증좌는?”
한데, 무인들은 믿기 어려워 하는 반면 마법사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따져 보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고, 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청화상단은 아마 유장위와 연줄이 있을 거야.”
흑제갈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유장위 역시 그럴 것이다.
돈으로 사람을 낚는 방식.
대외적으로는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그건 밖에서 볼 때 공정하고 중립적인 가면을 쓰기 위한 것. 아마 분명히 긴밀한 관계일 것이다. 즉, 이런 때에 쓰기 위한 연줄이다.
“너, 너무 억측하는 것 아니야? 그분이 그래야 할 이유가…….”
“소진, 레이드 공격대를 소규모 부대로 쪼개서 외부 원정으로 몬스터를 토벌하면 그 수익이 얼마나 될까?”
당무련이 빽빽대는 것을 무시하고, 천마는 소진에게 얼굴을 돌렸다.
“나, 나한테 그걸 왜 물어? 모른다고! 몰라!”
소진이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돈 많고 힘없는 상단의 자제로서, 그는 이런 때 말을 함부로 흘리면 큰일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몰라? 이거 원, 큰일이네…….”
하지만 천마는 그 큰일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큰일에 대한 전망, 상인이 가지고 있는 시각이 말이다.
“소진, 너한테 걸었던 기대가 조금 사라지려고 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 주면 좋겠네.”
“아니, 그, 그게……!”
데굴데굴!
소진의 눈이 격하게 돌아갔다. 그의 영민한 두뇌 역시.
“벼… 변수가 너무 많아서…….”
여기서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 큰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근하게 멸시하는 표정의 천마. 그의 얼굴과 평소 성질머리로 보아서는 말하지 않았다간 소진의 몇 안 되는 줄 또한 끊어지게 생긴 것이다.
툭툭.
천마가 제 손목을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틀려도 괜찮으니까 대충 잡아 봐. 궁금하잖아? 이런 거 추측 한 번 한다고 무슨 일 생기겠냐. 고작 2학년의 설레발일 뿐인데?”
“으윽…….”
분명히 무슨 일 생길 것 같다. 하지만 왠지 그 모습이, 딴 수작 부리면 손목을 날려 버리겠다는 압박으로 보인 소진.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긴 한숨을 쉬었다.
아, 약한 자의 비애여.
“편차가 많은데… 아마 천무학관 예산의 한 달에서 넉 달 정도의 어딘가가 될 거야…….”
“학관 예산? 그게 얼마인데?”
방윤이 되물었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림사의 돌중 녀석. 소진은 눈을 질끈 감고 결국 입을 열었다.
“아마… 최소 금자 50만 냥에서 최대 200만 냥까지.”
“무어엇!”
“말도 안 돼!”
아이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학관의 운영 예산이라는 말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다가, 실제적인 금액을 듣게 되자 천문학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뭐가 말이 안 돼? 지금 당장 구성된 공격대의 면면을 보라고. 현경의 고수 하나, 화경의 고수 다섯.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천무학관의 교두와 교관들… 한 달에 받는 월봉이 얼마이실 것 같은데?”
소진이 불퉁스레 투덜거렸다.
평소에 무예나 마법에만 몰두하는 다른 학관생들은 이런 가치 판단에 서투르다.
하지만 소진은 아니었다. 그는 소가상단의 2공자이자, 현역으로 지금도 소가백화점의 운영에 한 손 걸치고 있는 처지였다.
그랬기에 천무학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무수한 무인들과 마법사들이 외부 몬스터 토벌에 들어갈 때 어떤 전력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고룡 쉐이크를 토벌하러 모인 천무학관의 최정예들이잖아. 5개조로 나뉘었다고 그랬지? 각 조가 모르긴 해도 중급 던전 하나는 그냥 쓸어버릴걸…….”
또한, 소진은 삼음절맥의 기억력도 있었다.
그는 어둠나무 지역 인근의 자잘한 필드, 혹은 던전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취미 삼아.
상단의 입장에서 보기엔, 모든 것이 돈이다. 무인의 무력 또한 우수한 상품이었다. 그걸 활용한 몬스터의 사체와 자잘한 아이템의 습득 역시 곧 돈이다.
그래서 그냥 재미 삼아, 혼자 공상하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댄 것뿐이었다. 놀이로서.
그렇게 그냥 놀이로서 그쳤어야 했는데…….
“최소가 금자 50만 냥… 어마어마한 돈이네. 진짜.”
“뭐, 그래 봤자 천무학관에 들어갈 돈은 20만 냥이나 될까 말까 할 테지만.”
얼이 빠져 중얼거리는 당무련, 그런 그녀에게 천마가 툭 하고 한마디를 더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당초의 목적에 대한 소리야. 말했잖아. 유장위와 청화상단은 밀접한 관계일 거라고.”
당황하는 일행들에게 천마는 혀를 쯧쯧 차 보였다.
천무학관이 갑작스레 토벌한 던전의 가치. 그걸 누가 감정할까? 청화상단이다.
다르게 말하면, 청화상단이 쳐 주는 값대로 천무학관의 교두, 교관들은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이, 소진?”
“…가능해, 충분히. 애초부터 일회성으로 그럴 관계를 만들어 둔 거라면.”
천마의 물음에 소진 또한 보증했다.
그 또한 상단의 자제. 물품의 납품 단가나 부가적으로 발생하는 이익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천무학관의 교관들이 평소에 물욕이 없다는 것도.
교사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라면 미덕이지만, 그런 그들의 청빈함을 이용해서 눈탱이를 갈기려는 자가 있으면 단단히 뒤집어쓴다. 이런 때처럼.
“애초에 너무 급박하게 다른 경쟁 상단도 없이 독점으로 맺어져 버린 거래야. 투명하지 못하니까 부당한 이익이 크지. 또 여차하면 변명거리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레이드가 중지되고 갑작스레 묶여 버린 천무학관의 전력.
그로 인한 손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외부 원정. 갑자기 와르르 쌓인 고가치 상품들.
상인으로서 보자면 이건 일확천금의 기회다. 후려치지 않는다면 줘도 못 먹는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어쩌다가 청화상단으로 거래처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장위는 자그마치 현경의 고수다. 여차하면 ‘아, 내가 요즘 무예를 파느라 바빠서 실수했소’ 하고 한마디 사과하면 된다.
상단은 상단대로, ‘매물이 너무 갑자기 쏟아져서’라든가. ‘거래처가 포화 상태가 되어서’ 라든가. 그런 변명으로 후려친 가격을 정당화할 수 있다.
“클랜이나 길드 같으면 이런 일에 자세하게 진상을 밝히라고 따져 들겠지만… 우리는 학관이잖아.”
“…허.”
즉, 천무학관의 드높은 명성 때문에, 이익 관련의 문제에서는 오히려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
아마도 유장위는 그런 점을 미리 짚고 있어서 지금 같은 상황으로 끌어왔을 터였다.
“혀, 현경의 고수가 그런 세속적인 일에 자기 이름을…….”
“그 세속적인 일에 손을 대서, 금자 10만 냥이 들어오는데?”
방윤의 낙심하는 말에, 소진이 참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본래 발생할 이익금은 금자 50만 냥.
그걸 반으로 후려쳐서 청화상단이 날로 먹을 돈은 25만 냥. 하지만 이걸 혼자 다 먹으려다간 체한다.
청화상단 역시 이 일확천금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유장위에게도 반절은 떼어 줘야 할 터.
“최소 금액이 금자 50만 냥이라고 했잖아. 혹여 대박을 터뜨려서 200만 냥까지 가게 된다면…….”
“천무학관이 100만 냥. 청화상단이 50만 냥. 유장위가 50만 냥… 그런 분배가 진짜 일어난다고?”
“그렇게 될지 어떨지, 나로서는 몰라. 그냥 쉽게 셈하면 그렇게 계산이 나온다는 거지.”
금자 50만 냥.
어지간한 견실한 중견 수준의 클랜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고도 남을 만한 돈이다. 그걸 유장위의 입장에서는 잠깐 오명만 쓰면 바로 손에 넣을 수 있다. 특히나 그는 그는 얼마 전에 던전을 토벌하다가 때 아닌 몬스터들의 난입으로 본인 소유의 클랜이 반파 당했다.
현경의 고수인 그가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 하니, 그 클랜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장위로서는 무너진 자신의 클랜을 복구하기 위해 여러모로 돈이 필요한 처지일 터.
“아니…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교관님들께 이야기하면… 그런데 들어나 주실까?”
“야야, 증좌도 없잖아. 지금 나온 이야기는 전부 심증이고 정황뿐인데…….”
상대는 현경의 고수. 이제 약관 주변의 학관생들로서는 말을 섞기도 황공한 위치다. 이런 상황에서 음모를 밝혀냈습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간, 기본이 정학에, 자칫하면 퇴학으로 넘겨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들 가슴만 타들어 가고 있을 때.
“뭐, 어쩌긴 뭘 어째?”
천마가 히죽 웃으며 뿌드득, 손목을 꺾어 보였다.
“누가 얌체 짓 하는 걸 보면, 일단 깽판부터 놔야지?”
애초에 그는 정학이니 퇴학이니 하는 것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