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눈먼 돈 먹기에 눈먼 놈 (2)
부스슥. 스슥.
마른 풀들이 소리를 냈다. 저 멀리 밝아 오는 새벽녘의 하늘.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의 열기는 저 산 너머에서부터 공기를 데울 터.
따듯해져 부피가 커진 공기는 바람이 된다.
휘이이익-.
산바람이 불어왔다. 낙엽과 풀들이 다시금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미세한 소음에 맞춰, 천마는 낮춘 몸으로 발을 옮겼다.
바스슥. 자박자박.
바사사삭. 자박자박.
“흠…….”
바람을 읽는다. 불어올 바람이 일으킬 소리에 맞춰 발소리를 숨긴다.
탈마에 도달한 신체는, 탈마의 두 번째 경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극히 말랑말랑한, 딱 한 꺼풀의 벽.
하나 당장이라도 뚫릴 것 같은 그 벽은, 여차하면 십 년을 고행해도 여전할 수도 있었다.
혹은 갑작스레 거짓말처럼 사라져서, 예전처럼 호풍환우의 신통력이 몸에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참 별의별 짓을 다 해 보는구나, 하고 천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객 흉내라니. 생전에 암습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던 천마다.
어디 싸우고 싶은 놈이 있으면, 일단 그 집 대문부터 박살 내고 정정당당하게 들어갔었으니까. 당연히 이런 쥐새끼 같은 행동은 낯설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지금의 이 잠입은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후르르륵. 파사삭. 자박자박.
피이잇!
“음…….”
한계에 가깝게 벼려 낸 감각에, 미세한 기파가 잡힌다.
천마는 잠시 숨을 멈추고, 심상을 가다듬었다.
한없이 차갑고 고요한 어둠.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를 상상하자, 심장박동이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휘이익. 부스스슥.
새벽의 바람이 요란하게 낙엽과 마른 풀들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그러기를 잠시.
“허어.”
부스슥.
지척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거리는 일 장. 마른 풀이 밟히는 기척에 경각심을 돋운, 화경의 고수였다. 그저 몸만 돌리고 이쪽을 향하던 그는, 하나 곧 고개를 내젓고 혼자 투덜거렸다.
“기분 탓인가……? 분명 누가 있는 것 같았는데… 괜히 긴장했군.”
‘…….’
저벅저벅.
천마는 멀어져 가는 그의 기척에도 마음을 풀지 않았다.
뭐 하러.
기분 탓인가, 괜히 긴장했나 하는 소리를 왜 입 밖으로 낸단 말인가?
마교의 극마 정도의 화경쯤 되는 고수라면, 아무리 순박한 성정이라도 속에 구렁이 하나는 품고 있는 법이다.
“스…….”
그래서 마치 거북이처럼, 천마는 온몸에 기를 둘러 혈행을 느리게 하고, 체온까지 낮춰서 무정물의 흉내를 냈다.
그러기를 한참.
스스스슥!
요란하게 마른 풀을 짓이기며 달려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천마가 이동했던 바로 그 자리가 지척이었다.
두리번두리번.
“…크흠.”
그리고 한참 사방을 둘러보던 화경의 고수는, 뭔가 겸연쩍은 헛기침을 내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터벅. 터벅.
조금 전 부러 소리를 낸 발걸음과 달리, 적당히 가볍고 조심스러운, 고수 특유의 걸음걸이였다.
그렇게 그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자.
“크흐……!”
천마는 내력을 돌려 몸을 풀었다. 강제로 굳혀 버렸던 혈맥이 부드럽게 변하고, 살갗이 저릿저릿하게 반응한다.
두근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그 느낌이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어째 중독이라도 될 것 같은 쾌감이다.
‘죽이는데, 이거……?’
들키면 안 된다. 그런 부담을,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행위. 경지에 오른 고수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속여서 농락하는 재미라니.
‘이한, 이 녀석 어쩌면…….’
제대로 된 무인이 아니라 살수나 자객이 적성에 맞았던 것 아닐까. 생각해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유달리 연약하고 둔한 몸. 딱 보아도 무골처럼 생기지 않은 신체. 그런 반면, 겁은 많고 생존 욕구는 지독하게 강하다.
생각해 보니 이한, 원래 이 몸의 주인은 하나하나 다 들어맞았다.
일류 자객으로서의 요건에.
어쩌면 전생과 달리, 지금 이 몸으로 탈마의 경지에 오르는 길은 전혀 달라서 이제까지 그렇게 고생했었는지도 모른다.
“살왕이었나… 그놈의 술수는 잘 모르는데…….”
나중에 곰곰이 각 잡고 떠올려 봐야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천마는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사각. 사각. 파스슥.
자박자박. 펄럭.
‘음…….’
몇 장을 더 접근하자 목표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을 받아, 천막의 문이 나부낀다. 등불이 켜진 안쪽으로 미세하게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스르륵. 깜박!
‘……?’
그 순간, 극히 미세한, 육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기파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스슥.
천마는 그대로, 아주 느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바닥에 누웠다.
‘이게 탈마, 아니, 현경의 기감인가.’
갑자기 기척을 감추면, 되레 경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천마는 야생의 들고양이 정도의 움직임. 딱 그 정도로 느껴질 만큼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스르륵. 휘릭.
얼마 후,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느껴지던 기감이 곧 다른 쪽으로 향했다. 천마는 살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빛냈다.
간만에, 식은땀이 다 났다.
‘시간상 분명 잠들어 있을 때일 텐데…….’
몸이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자연스레 경계에 돌입하는 것인가? 역시 정종 무공을 익힌 고수의 수준은 방심하기 어렵다.
잠입에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일 터.
아쉽지만 더 기어들다가는 위험할 수 있다.
그렇게 조심스레 판단을 내린 천마는, 소리 없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한데, 그때였다.
피이잇! 키리리릭!
“……?”
실낱처럼 미미하고 가늘게 흐르던 경계의 기가, 갑자기 크게 출렁이며 주변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도 요란했다.
파스슥. 파스스슥.
마치 ‘지켜보고 있다!’는 기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노골적인 기감은 알고 있으면 피하기 더 쉬운 법이다.
‘뭐야, 이거?’
사삭. 사삭.
천마는 기감과 기감 사이의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소리 없이, 은밀하게.
드르릉.
그러자 막사 안에서 반쯤 등을 기대고 잠든 유장위와
그 앞에 놓인 작은 서탁이 눈에 들어왔다.
“…….”
‘하하.’
기뻤다. 짜릿했다. 천마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스륵. 탁.
여러모로, 소기의 목적은 물론, 부가적인 이득도 쏠쏠한 날이었다.
* * *
“크…….”
새벽 나절에 유장위는 잠을 설쳤다. 얕은 잠의 끝은, 항상 그놈의 지독한 악몽.
온몸이 찌뿌드드하게 굳은 것을 느끼고 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운기조식을 했다.
“후으읍…….”
쿠드드득.
강대한 내력이 전신 혈맥을 타고 흐르며 불편한 자리에서 선잠을 자던 피로감을 몰아냈다.
하지만 활력이 솟아난 것은 몸 자체일 뿐.
욱씬!
“크…….”
백회를 타고 오른 기가 상단전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유장위는 급히 내기의 방향을 비틀어, 상단전을 우회해 인중 쪽으로 돌렸다.
드드드등.
좁은 샛길을 통해, 거대한 기의 물줄기가 굽이치며 중단전으로, 하단전으로 흘러내렸다.
본래 대맥으로 지나갈 내력을 좁디좁은 세맥으로 흩트려 목적했던 방향으로 모았다. 현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이르러 있기에 불완전하나마 소주천은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후우…….
한숨이 나왔다. 문제가 되는 곳은 다름 아닌 뇌정경이었다.
“그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
위험한 던전을 토벌하던 중, 갑자기 난입해 들어온 네임드 몬스터들.
그중 한 놈의 공격에 유장위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도 때맞춰 구하러 와 준 리그웨더가 아니었다면, 그는 차가운 던전의 바닥에 몸을 누인 채 삶을 마감했으리라.
욱씬욱씬!
그만큼 위중한 상처였고, 치료받은 후에도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운기조식하느라 고작 소주천 따위를 돌리는 데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다니.
크음!
그는 부글부글 끓는 살심을 헛기침으로 풀어냈다.
뇌정경에 입은 상처. 흔히 전두엽이라 불리는 곳의 부상은, 자칫 사람의 인성을 비틀어 버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 기억의 소실이나, 망상에 시달리게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유장위는 그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다.
뇌정경에 입은 부상은 심각했으나, 현경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육체는 초인적인 회복력으로 육신을 재생시켰다.
그러니 원래라면. 심기의 흐트러짐 또한 없어야 했다. 한데…….
“…답답하구나.”
아니, 정확히는 답답함이 아니라 분노가 들끓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유장위는 충동을 자제하는 것이 힘들었다. 차분한 이성의 목소리 대신, 불쑥불쑥 일어나는 욕망에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하곤 했다.
후우…….
다행히, 아직까지는 치명적인 허점을 보인 적은 없었으나, 이대로라면…….
“아니, 아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는 얼핏 떠오르는 불길한 심상을 잠재웠다. 이 정도야 무얼. 충동에 휩싸이기 쉬운, 그저 가벼운 심마를 안고 사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었다.
유장위의 나이는 세수 오십.
현경의 위치는 노름판에서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니다. 그 역시 불굴의 초인이었고, 그가 이제껏 살아온 세월 속에서는, 만전일 때보다 위태위태한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니 이 정도쯤, 조금만 조심하면 괜찮다… 그렇게 다시 한번 자신을 다독거릴 때.
팔락. 푸스스.
“……?”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의 바로 앞, 반 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시선을 돌려 보니 업무를 보는 탁자 위에 작은 모래시계가, 그리고 그 아래 눌린 작은 종이 조각이 바람에 팔락이고 있었다.
푸스슥.
때마침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했다. 유장위는 오싹한 가운데 모래시계를 들어 올렸고.
-어설프군.
“……!”
종이에 적힌 한 줄의 문구에, 이성이 삽시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쿠르르릉!
유장위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이성으로 눌러 놓았던 충동이 미친 듯이 되살아났다.
누군가가.
경계를 최대로 돋운 채로 잠든, 현경의 고수. 그의 지척까지 다가왔었다.
자는 동안 모가지를 따였어도 할 말이 없는 암습. 초일류의 자객이, 그의 서탁에 흔적을 남기고 갔다.
‘죽을 수 있다고? 내가? 이 유장위가!’
-캬아아아아!
악몽이 되살아났다. 감정이 미친 듯이 널뛰었다.
그 분노와 충동의 근원은 한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 머리에 꽂혀 드는 마수의 어금니.
바로 두려움이었다.
* * *
우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소리. 아니, 현경의 고수가 내지르는 노갈에, 천마는 혀를 찼다.
“끌끌. 말이 현경이지 아주…….”
빈틈투성이였다.
이제 갓 탈마에 올랐긴 하나, 자신이 반 장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모를 정도로.
‘아니, 근데 이 정도면…….’
이 몸도 제법 쓸 만한 것 아니야? 하고 천마는 자신의 마른 몸을 훑어보았다.
부족한 체력. 허약한 혈맥. 조금의 위기에도 온갖 경종을 울려대는 신경.
하나 그 몸에 의외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천마는 하얗고 가느다란, 이한의 손가락을 보며 웃었다.
전생한 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보인 것이다.
“어, 이한? 일어났어?”
“어어.”
서문영이다. 푸석푸석한 얼굴이, 밤새 앞으로의 대책을 고민하느라 잠을 설친 모양.
그는 살짝 멍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간밤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유 대협… 아니, 유장위가 그런 생각이라면 스스로 마각을 드러내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래서… 뭐야?”
까닥까닥.
서문영은 말을 멈췄다. 그의 앞에서 좌우로 흔들어대는 천마의 손가락에.
“그거, 이미 하고 왔어.”
“…뭐?”
피식 웃는 동급생의 얼굴에, 서문영은 그냥 얼빠진 표정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