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눈먼 돈 먹기에 눈먼 놈 (3)
“당무련, 너, 당문에서 뭐 배웠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한?”
“널 보고 있으면… 어째 당문 사람 같지가 않아서. 한참 모자라서.”
“뭐어?!!!”
울컥하는 당무련. 그런 그녀를 보고, 천마는 다시금 혀를 찼다.
이러니, 이렇게 쉽게 격동하는 걸 보니, 그 음습하고 예리하던 사천 당문의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는 게다.
책략, 심계, 이런 것들은 어따 갖다 버렸단 말인가. 당문의 무서움은 독이랑 암기가 다가 아니다. 이 녀석은 가주에게서 독심(毒心)을 안 배웠던가?
* * *
음모는 기본적으로 차분함을 기반으로 한다.
흔히 계략을 기(바둑)에 비견하는데, 이는 치밀한 수 싸움이 바둑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사고력을 요구하는 바둑은, 자신의 수와 상대의 수. 그리고 한 수를 두고 나면 상대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를 예상해야 좋은 승부를 낼 수 있다.
때문에 여기서 전제되는 것이 냉정.
격정에 찬 사람의 책략은 성공하지 못한다. 흥분이나 욕심은 스스로의 눈을 가린다.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만은, 무례함으로 바뀐다. 만들지 않아도 될 적을 만들어, 스스로의 입지를 좁힌다.
“유 대협,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지금 누가 본좌를 걱정하는 겐가?”
“예……?”
날이 선 말투에 천무학관의 교관들이 굳었다. 유장위는 아차 싶어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 아니오. 미안하외다. 잠시 딴생각…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소. 실례를.”
“허… 흠.”
“허허… 그, 그럴 수도 있지요. 근자에 심려가 많으시겠습니다.”
“…….”
꾸욱.
‘그 심려가 누구 때문인데?’
유장위는 내뱉고 싶은 말을 참고 내면을 다스렸다.
흥분에 찬 사람의 책략은 반드시 실패한다. 뻔한 일에서 실수를 하고, 상대의 의도를 의심하다 과하게 반응하고, 그렇게 초조해져서 더욱 손해를 본다.
이런 악순환은 유장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한번 건드려진 상처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울컥울컥!
새벽에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와서 비웃음에 찬 처신을 남긴 자. 대체 누가, 감히 내게 누가? 그런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자꾸 튀어 오른다.
누구일까? 분명 공격대 중에서는 자신의 기감을 숨기고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없을 텐데? 아닌가? 내가 천무학관 교관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인가?
“음… 그래서 오늘의 보고는…….”
“현재까지 소모품의 잔량은…….”
울컥울컥! 부글부글!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놈들 중에, 자신을 비웃고 있는 자가 있지 않을까? 겨우, 고작 화경에 지나지 않는 버러지들이, 감히 이 나를?
닫아 두려 해도 자꾸만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부글부글. 찌리리릿!
끓어오르는 속을 억지로 누르다 보니, 머리에 난 상처가 지독하게 아파 왔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그만.”
척.
유장위가 더 참지 못하고 손을 내저었다.
천무학관의 교관은, 그의 살벌한 눈에 움찔 굳어 버렸다. 한참 중요한 보고를 하고 있던 중에, 일방적으로 중단당한 것이다.
“본… 인이… 미안하오. 아무래도 가벼운 심마가 든 거 같소이다. 송구하오.”
“…….”
“제운비 대협, 본… 아니, 이 유모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이후를 진행하도록 하시오. 맡기겠소.”
“…알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유 대협.”
“음.”
유장위는 잔뜩 굳은 얼굴로 급히 몸을 뺐다. 그가 사라진 후, 회의는 당연히 어수선하게 난잡해졌다.
“아니, 저, 저… 너무 무례한 거 아니오? 이렇게 일방적으로?”
유장위의 갑자기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난 이들과.
그래도 이제까지 관계가 좋았으니 작은 실수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이들.
“크흠… 몸이 좋지 않다 하지 않았소.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하, 몸이 안 좋아? 현경의 고수가?”
“아니, 조금 전에 그것 못 느끼신 게요? 뭔가 트집 잡을 것 없나 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게…….”
“그만.”
탕탕.
제운비가 단상을 두드리며 소란을 잠재웠다.
“유 대협도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지. 이유도 없이 공연히 저런 모습을 보이실 분은 아니외다.”
“음…….”
“크흠…….”
“감정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잠시 자리를 파합시다. 2각(30분) 후에 다시 회의를 열겠소.”
땅! 땅! 땅!
나무망치를 두들겨 휴의를 선포하는 제운비. 그의 귀에 천무학관의 교관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사람이…….”
“어쩌면 처음부터…….”
“허어, 그렇게는…….”
다들 불쾌감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만큼 아까의 유장위의 행동이 급작스러웠던 것이다.
이제껏 예의 바르게,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던 사람이 갑자기 폭압적으로 굴었으니 온도차가 더욱 심했다.
‘다들 놀랐군. 그럴 만도 하지.’
제운비는 아까 유장위가 뿜어낸 기파를 떠올렸다.
회의 중에 갑자기 싸늘하게, 송곳으로 살을 찔러 오는 듯한 기감. 그건 거의 살기에 가까웠다.
‘유 대협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실상은 새벽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난데없이 위협을 느꼈기에, 초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장위가 본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뿜어낸 것이었다.
하나 유장위는 이 공격대에서 단 하나뿐인 현경의 고수.
차마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제운비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생각나는 것이라면, 결국 어제의 회의.
내색하지 않았지만 뭔가 유장위의 심기가 크게 상할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가운데.
“어이, 제운비.”
“음.”
뇌천벽이 그를 불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가 대뜸 물어 왔다.
“이거, 계속 이렇게 둘 거냐?”
“갑자기 무슨 말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냐. 유가가 아주 공격대를 쥐락펴락하고 있잖아?”
유가. 유 대협이라 부르지 않고 아예 노골적으로 척을 지는 발언이었다. 심기가 잔뜩 상한 뇌천벽은, 얼굴을 왕창 찌푸리며 제운비에게 물었다.
“아니, 우리가 무슨 용병이야? 지금 돈 벌려고 원정 온 거야?”
“음.”
뇌천벽의 말에 제운비가 끄덕였다.
제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는 해도, 유장위는 어디까지나 객인. 천무학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학관의 공격대를 마치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멋대로 부리고 있었다.
필드 던전, 고룡 쉐이크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 천무학관의 최정예들이 계획에도 없던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소득을 유장위가 자신의 임의대로 배분하는 등, 완전히 자신이 대장인 것처럼 매사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월권도 보통 월권이 아니라고. 이제까지는 깍뜻하게 저자세로 나오더니, 아까 보니까 알겠더라. 완전 구밀복검이고 양두구육이지. 느꼈지?”
“음.”
제운비는 침음했다.
뇌천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유장위가 회의 중에 뿜어냈던 살기였다.
확실히, 현경의 고수나 되는 이가 갑자기 회의 중에 전방위로 살기를 뿌리는 것은 보통 결례가 아니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 살기는 그냥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경멸, 혹은 무시.’
회의에 모인 천무학관의 교관들을, 마치 같잖은 벌레처럼 보고 있는, 언제라도 처죽여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심상이었다. 그것이 기파에 실려 왔다.
천무학관의 교관들은 기본적으로 순박한 것이지 멍청한 것이 아니다. 기파에 실린 감정 정도는 당연히 느낀다.
아마도 이제껏 열렬하게 유장위를 신봉하던 교관들이 갑자기 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처음부터 속이 시커먼 녀석이었어. 예절 바른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애초에 우릴 제 발에 낀 때만도 못하게 보고 있고. 이거, 이대로 둘 생각이냐?”
“흠…….”
제운비는 뇌천벽의 노골적인 불만에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유장위의 본심을 느꼈다. 이제까지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던 만큼, 배신감은 훨씬 컸다. 뇌천벽이 왜 저렇게 반발하는지도 공감이 갔다. 그럼에도.
“당장 뭘 어떻게 할 상황은 아니다.”
“…뭐?”
“조금 전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제껏 유 대협은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줬다. 학관생 교습만 생각하고 있던 나도 이번에 깨달은 바가 많았고. 배운 바가 많다.”
“너…….”
“표면적으로 보자. 이제껏 일을 잘해 온 사람이다. 본심이야 어떻건, 큰 잘못을 한 적은 없어. 그렇다면 당장 자리에서 몰아낼 이유는 없다.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이상, 당장 반목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아.”
애초에 어둠나무 지대의 필드 보스, 고룡 쉐이크를 처단하는 데에 현경의 고수의 협력은 필수 불가결이다.
제운비의 말은 정론이었다.
“…야.”
하지만 뇌천벽은,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분명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뭔가 모르게 불안했다.
“그래서, 유가 놈이 이 원정대를 마음대로 부리는 걸 손 놓고 보겠다고? 계속 질질 끌려다니게 두겠다고?”
“그의 본심을 우리만 느낀 것이 아니다. 다른 교관들도 다 느꼈을 테니 앞으로 무작정 끌려다니지는 않을 터. 서로서로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제운비도 내심 생각은 해 보았다.
유장위는 아마도 남의 공격대를 멋대로 외부 원정 돌리면서 얻는 어떤 이득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은, 이제껏 천무학관의 교관들이 겪어 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한 클랜의 공격대를 운영해 온 경험, 관점, 시점, 이것들은 학관 운용에도 큰 도움이 될 터.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경의 고수다. 속내야 어떻든, 그에게 여러 가지 요령이나 무예의 심득을 얻은 교관들도 적지 않아.”
그러니 조심하면서, 함부로 끌려가지 않도록 하면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제운비였다. 하지만 뇌천벽은 여전히 불편했다.
“어이, 제운비.”
말을 나누면서 깨달았다. 눈앞의 제운비가 염려스럽다고.
언제부턴가 말수가 부쩍 적어지고, 혼자 생각에 빠지는 일이 많아진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에 들었던 황당한 소문 역시 이런 기분에 기여를 하고 있었다.
“너… 떠날 생각이냐?”
“갑자기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홍매학관, 거기 다녀온 뒤부터 이상해졌잖아. 너.”
뇌천벽이 이를 갈아붙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 이후로, 제운비의 행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학관의 중요한 안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등, 뇌천벽으로서야 오히려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지만.
이번처럼 학관의 인물도 아닌 유장위가 공격대를 휘두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는 것은.
“어차피 떠날 생각이니까. 그래서 아무래도 좋은 거냐? 예전처럼 예산 분배나 인물 선정 등, 학관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더군. 뭐냐, 마음이 완전히 가 버린 거냐? 홍매학관에?”
“…….”
“대답해라. 제운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침묵하는 제운비의 태도에, 뇌천벽은 더욱 울화가 터졌다.
두 사람은 이제까지 앙숙이었다. 또한 경쟁자였다. 같은 화경의 고수이기도 했고, 천무학관의 제한된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견제하거나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천무학관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선의의 경쟁이었다. 적어도 뇌천벽 자신은, 제운비를 사적으로 싫어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나름 너를 인정해 왔다… 네놈이 밉살스럽기는 했어도, 너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뭐야? 지금 그 낯짝은!”
이제껏 십여 년을 몸담았던 학관을,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그렇게 바라보는 것? 그게 참을 수 없었다.
꺾어도 내가 꺾는다. 눌러도 내가 누른다. 대가리가 딱딱하지만 성실한 놈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앞서 왔던 놈이.
이겨 놓고 떠난다? 그건 뇌천벽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대답해! 제운비!”
“…나도.”
격정에 찬 뇌천벽의 말에, 제운비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 저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도…….”
천무학관에 대한 애정은 아직 있었다. 소속감도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돈에 팔려 가는 경험, 해 본 적 있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이 와서 바꿔 봐… 돈에 물든 홍매학관을, 예전의 고고하던 화산파로…….
죽어 버린 홍매학관의 고수, 천극태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