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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99화 (200/310)

199화. 그가 기연이다 (2)

-…해서 우선 식량을…….

-…래 봐야 어차피 시기가…….

귀가 멍멍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둔하게 울렸다.

분명 중요한 이야기인데, 요즘 들어 계속해서 멍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암흑벽력도… 라…….’

툭툭. 찌릿!

“아?”

한참 멍한 황홀경에 빠져 있는 가운데,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느껴졌다. 이한이었다.

“아, 왜?”

“왜긴. 자꾸 심마에 빠져 있으니까지.”

피식 웃으며 내가 다아~ 안다는 얼굴을 하는 천마.

“이건 심마가 아니…….”

“실마리와 심마는 한 끝 차이야. 무지개처럼 아른아른거려서 자꾸 현실을 잊게 만들거든? 홀리지 마라. 그런 거에.”

서문영은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 녀석은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혼란함. 자꾸만 떠오르는 벼락의 줄기. 거기에 매몰되는 느낌. 경험까지.

“조언하자면, 이제껏 네가 배운 거에 집중해라.”

“…이제까지 배운 것? 그건…….”

“새 칼을 들려면, 지금 손에 쥔 칼보다 더 좋은 걸 쥐어야 할 거 아냐? 네 칼이, 네 몸이, 네 정신이 어느 방향으로 왔는지부터 확인해. 새 경지 개척은 그다음이다.”

“……!”

어찌 보면 뻔한 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서문영은, 정수리에 냉수를 한 바가지 부은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서문영?”

“어, 음. 미안. 잠시 딴생각에 빠져서…….”

짝짝!

운소령의 부름에 그는 두 손으로 뺨을 때려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평소에 그가 싫어하던, 채신머리없는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즉각이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어… 뭐 별거 아니고, 사전 계획이야. 진입 경로랑 시간, 그리고 예비품 등등.”

집중을 되찾은 그의 눈에 소진이 펄럭, 약도를 내밀었다. 그는 빼곡하게 쓰고 그려 놓은 계획표를 한 뭉치나 들고 있었다.

“잠시 보여 줘. 음…….”

파라락. 척.

서문영은 작은 책자처럼 두툼한 계획표를 건네받았다.

그 와중에 보니, 소진의 손은 먹과 잉크로 살짝 변색되어 있었다.

‘…진짜 열심히네.’

소진은 아 파티에서 실질적인 무력이 가장 약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한 필기와 세세한 변수 등을 예상하며 여러 가지 대안을 짜 두곤 했다.

파락파락. 스르륵.

물론 지나치게 다양한 변수와 사례까지 다 기입해 두었기에 실제로 지난번만 해도 계획표의 절반은 내버려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강박에 가깝게 필기를 해 둔 덕분에, 서문영의 파티는 보고서 쓰기가 수월했다.

“음, 일단 방향은 이대로 가면 되겠어.”

“저, 정말?”

서문영의 간단한 한마디에, 소진은 엄청나게 기뻐했다.

파티 리더이자 패스파인더로서, 서문영이 소진의 루트를 인정한 것이다.

“응, 정말. 내가 진입로를 짜도 이렇게 가겠는데. 어디보자, 남은 곳은…….”

서문영은 지도의 여백, 아직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은 부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습지대의 지형 탐색은 8할 가까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지난번에 전부 탐사를 완료했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 정체 모를 데스나이트만 아니었다면.

“이한, 이번에 또 그런 놈이 나올까?”

서문영은 여상스럽게,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파티의 실세에게 물었다.

다시 그런 괴물과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이 엘리트 파티이지, 이들은 어디까지나 2학년이다. 그런 놈, 그때의 데스나이트. 그런 규격 외의 괴물을 상대할 전력은 없었다.

천마 외에는.

“나도 모르지? 가 봐야 알 일 아냐.”

어깨를 으쓱하며 의뭉을 떠는 천마.

“그렇군. 알겠어.”

서문영은 그런 그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 괴팍한 동급생이, 대충 어떤 성격인지 그도 이제는 파악한 것이다.

그는 절대 친절하지 않다. 뭐라고 물어보면 건성이고, 답변을 해 주지 않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서는 ‘너네들로는 무리다’라며 마치 애늙은이처럼 혀를 쯧쯧 차곤 했다. 그러면서 일 터지면 앞에 나가서 막아 주는 성격.

살짝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믿음직스럽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만이 한 것이 아닌 듯, 다른 파티원들도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으흥…….”

묘하게도, 그들의 얼굴에는 질투나 반감 같은 것은 없었다.

질투도 비슷한 상대에게나 생기는 것이다. 지난번 검은 거인과 천마의 사투를 목도한 후, 운소령은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 이제까지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드러낸 걸 보면.

-……!

그 말에 모두가 느끼는 바는 제각각이었다.

왜 숨겼을까. 뭘 숨겼을까. 이제 와서 제 실력을 드러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하나는 합의를 했다.

‘더 이상, 어떻게 된 건지는 묻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강해지게 된 건지,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아.’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1학년 때만 해도 성적은 바닥이고, 성격은 거의 눈에 띄지 않던 동급생 이한. 그는 2학년 1학기부터 갑자기 성격이 급격하게 변하고, 무예는 아마 그때 이미 급상승해 버렸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려고 들었었지만… 이번에 천마가 보인 무위를 보고 다들 그냥 궁금함을 덮어 버렸다.

‘비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 할 수는 없을 거다.’

‘알아 봐야 의미도 없고, 애초에 말해 주지도 않을 테고.’

그간 실력이 급상승한 동급생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실마리를 캐내려고 했던 학관생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거의 학관생 전원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얼토당토않은 괴상한 소리만 하며 답을 피했다. 현재 확실한 건, 갑자기 사람이 변해 버린 이한이 자신들에게 불쑥불쑥 도움이 되는 것을 해 준다는 것.

‘암흑벽력도. 뇌천벽력도의 복원에 대한 실마리.’

서문영은 천마가 보인 무위를, 그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심득을 얻었다. 운소령은 시종일관 천마의 행동을 보고 가만히 눈에 담고만 있었다.

방윤과 당무련은 이따금씩 티격태격하다가, 뭔가 현묘한 말 몇 마디를 얻어듣기도 했다.

이쯤 되니, 이 파티의 중심은 이미 그에게 가 있었다.

무위는 아득히 높아졌고, 같이 있기만 해도 성적을 올려 주는 우수한 학관생. 그리고 성질은 더러운 동급생이다.

괜히 궁금함에 파고들었다가, 떨어지는 심득과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출발은 언제로?”

“음… 바로 가는 게 좋지 않나? 질질 끌다가 또 발목 잡히는 건 사절인데?”

“그럼 그러자.”

그리고 지금처럼.

바로 가자는 천마의 말이 나오자마자, 파티 전원의 의견은 그렇게 정해졌다.

“보급창으로 가자. 간단한 보급만 마치고 바로 출행. 이의는?”

“없어.”

“나는 좋아.”

“벽력탄 대용이 있으려나…….”

특제 탄을 다 소진해 버린 소진 외에는 전원 밝은 얼굴이었다.

* * *

“야, 양미? 옥애? 너희들 왜 이래?”

조금 뜻밖이었던 건, 보급창에서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같은 2학년들이었다.

“당무련! 무련아! 으아아앙!”

“이 배신자! 혼자 그리 가니까 좋았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양미와 옥애는, 당무련을 보자마자 펑펑 울어댔다. 여학우들의 얼굴은 거의 반쪽이 되어 있었고, 남학우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땟국이 자르르 흘렀다.

“조, 종천도……? 괜찮냐?”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죽고 싶다, 정말…….”

서문영과 마주친 언규와 종천도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들의 눈은 퀭했고, 거무스름한 기미가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흐어어… 졸려…….”

“…잠잘 시간을 안 줘?”

“크큭. 시간이야 주지. 주기야 하는데… 으으으…….”

서문영의 반문에 언규가 진저리를 쳤다.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천무학관은 레이드 작전 시에 준전시 태세를 갖춘다. 전력감이 되는 4학년은 교관이나 교두를 보필하고, 3학년들은 그런 4학년의 수발을 든다.

그리고 이들 고학년들은, 근래 잦은 외부 원정으로 피곤함이 쌓여,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 자식들이 빠져 가지고!

-수업 시간에 뭐 했냐! 제대로 배우기나 했어?!

-큭.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하지 말고 제대로 해! 제대로!

교관들은 조교를 갈궜다. 조교는 4학년을 갈궜다. 그리고 4학년은… 3학년을 갈궜다.

먹이사슬의 최하층. 가장 연약한(?) 3학년은, 출정 인원 중에서 계륵이었다.

데리고 갔다가는 죽을까 봐 불안하고,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지엄하신 교관 교두가 무거운 짐을 지셔야 한다.

그러니 눈에 가까이 두되, 조금의 부족함만 눈에 띄어도 가혹하게 굴림을 받았다.

-실종 인원이 두 자릿수를 넘는다. 이 지역에서 실종이라는 의미는… 알고 있겠지?

-예!

예전만 같았어도 천무학관 3학년쯤 되면, 어디 가서 처지지 않는 전력이다.

하지만 이번 레이드에서 실종, 아마도 높은 확률로 사망했을 인원이 다름 아닌 3학년들이었다. 그러니 죽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굴릴 수밖에.

그리고 그 덕분에 3학년들이.

바깥에 나가서 개고생하고, 무시당하고, 반죽음 상태로 겨우겨우 돌아온 끝에.

-어, 서, 선배님?

-오, 오셨습니까!

생활관에서 눈만 멀뚱멀뚱.

전력에 도무지 도움 되지 않는 2학년. 선배들은 죽어라고 이리저리 구르다가 왔는데.

심심하다며, 일이 없어 지루하다며, 겁도 없이 나자빠져 있던 2학년들을 보게 되면 어찌 되는가.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집합! 집합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갈굼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3학년들의 짜증은 2학년들에게 고스란히 투사되었다.

“어… 혹시 때리셨어?”

모범생 방윤이 정색하고 물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갔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푸---우! 팼냐고? 때렸냐고?”

“…차라리 패라 그래라. 그럼 차마 죽이지는 않겠지. 근데 지금은 그냥 죽을 것 같다…….”

종천도도 언규도 퀭하니 죽은 눈으로 긴 한숨만 내쉬었다.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다. 그 대신.

어마어마한 갈굼과 눈치 주기. 가시방석. 이제 막 잠 좀 자려고 할 때 야간에 집합하기 등등.

직접적인 폭력은 당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매를 맞는 게 나을 정도로 지독한 정신적 괴롭힘이 이어졌다나.

* * *

“세상에…….”

“자칫하면 우리가 저렇게 될 뻔했다는 거지?”

천국과 지옥의 단면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여기가 천국이고 저쪽이 지옥이다.

철벅. 철벅.

빠르게 지난번 담당했던 지역, 습지대로 들어섰다. 이 살풍경한 곳이 안전한 레이드 캠프보다 더 마음이 놓인다니, 참 희한한 경험이었다.

“근데 뭐가 있으려나…….”

“지난번에 어지간한 건 다 쓸어버리지 않았어?”

철벅. 철벅. 푸욱. 푹.

진탕에 빠지는 발에 인상을 쓰며, 당무련이 투덜거렸다.

지난번 암기의 부족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온몸에 주렁주렁 암기 낭을 가득 감고 왔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언데드 하나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아- 젠장, 손맛 좀 보고 싶은데. 연습도 해야 하고. 몬스터가 왜 안 나와?”

“부탁을 해. 그럼.”

“응?”

당무련이 갸웃했다. 돌아보니 천마가 피식 웃고 있었다.

부탁을 하라고? 여기서? 당무련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차마 자존심 때문에,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날 왜 봐? 부나방 불러들이는 등불은 저 녀석인데?”

천마가 까닥까닥,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방윤을.

“오호.”

당무련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그녀는 곧 소림승, 항마척사의 기운을 가진 그에게 간곡하게 몇 마디 말을 넣었고.

크아아아아압!!!

곧이어 쩌렁쩌렁한 신성 속성의 음공이, 습지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무덤에서 해골들이 벌떡벌떡 일어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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