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01화 (202/310)

201화. 그가 기연이다 (4)

파삭. 파삭. 철퍽.

미지의 습지대는 질퍽거렸다. 이제까지의 물웅덩이가 장난이었다는 듯.

쑤욱!

“으억!”

“어허, 조심해, 조심…….”

지척이 늪이었다. 고운 뻘에서는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올라 경공을 써도 자칫하면 푹 빠져 들어갈 판이었다.

“쯧쯧, 고생한다. 참…….”

“미, 미안…….”

일행 중 경신법을 쓰지 못하는 소진은, 수시로 빠져들어서 허벅지까지 시커멓게 뻘로 옷이 더러워져 있었다. 게다가 땅만 일행을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휘이이이…….

자욱한 안개까지 시야를 방해했다. 심지어 청각까지.

우르릉. 우르르릉.

안개 속에서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동시에 금방 사라진다. 주변을 알아차리기에는 최악의 상황. 몬스터가 잠복해 있다가 덮쳐 오기라도 하면 크게 낭패를 볼 터였다.

“전방 시야 양호.”

하지만 서문영은 차분했다. 그는 지나치지도 않게,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만큼의 긴장을 유지하며 일행을 이끌고 나갔다.

“이한, 후방은?”

“문제 없-으.”

피식.

천마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웃었다. 어린 것들이 진지하게 전황을 살피며 나아가는 모습이 귀여웠던 것이다.

특히, 나름 가볍게 생각했던 저놈. 자존심덩어리 귀한 집 도련님인 줄만 알았던 놈이, 의외로 집요하고 열심인 구석을 보일 때마다 은연중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었다.

‘고놈 참 똘똘한 놈이로고.’

서문영은 체구가 좋다. 현대의 학관 체계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근접 전사-딜러이거나, 전위 방어-탱커를 맡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패스파인더-길잡이의 수련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다. 혹은 그냥 취미 삼아 재미로 배우는 거라 생각했었다.

한데, 녀석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왜 패스파인더를 하냐고?

물어본 적 있었다. 기본적으로 탄탄한 몸. 거기에 두텁고 무거운 중갑으로 무장한 서문영. 어떻게 보아도 날렵한 레인저보다는 우직한 기사나 전사가 어울렸으니까.

-글쎄. 뭐. 가장 앞이니까. 또. 어느 파티에서도 중요한 직책이니까. 혼자서도 뭐든 할 수 있는 직종이니까. 이래저래 이유는 많아.

듣고 보니 나름 납득은 갔다. 딱 하나에만 특화되는 역할보다 두루두루 여러 방면에서 활약이 가능한, 그런 쪽을 선호하는 거라면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근데 사실은 그냥… 뭐, 간단해. 나는 ‘보는 것’만은 자신 있거든.

조금 망설이다가 머쓱해하며 대답한 서문영.

그때의 녀석의 눈에서 천마는 묘한 기류를 읽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가끔 그런 놈이 있었다. 손이 유달리 빠르다거나, 다쳐도 이상하게 회복이 빠른 것처럼 눈이 기가 막히게 예민한 녀석이.

‘마안… 아니, 정파에서는 신안이라 하던가.’

이름처럼 엄청나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다. 하지만 조심성이랄까, 혹은 본능이랄까, 위험이나 인위적인 함정의 조짐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눈을 가진 녀석.

“오른쪽 조심해. 뻘이 심상치 않아.”

“오른쪽 조심, 전달.”

“오른쪽 조심, 전달.”

지금처럼.

다른 사람은 보고도 그냥 지나칠, 그저 그런 지면을 서문영은 한번 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위기를 감지한다. 이건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타고나야 하는 거다.

‘캬…….’

천마는 서문영이 말한 지점까지 가서 일부러 슬쩍 밟아 보고는 감탄했다.

폭. 파삭!

‘기포잖아?’

늪 아래의 썩은 침전물들이, 보글보글 공기 방울을 모아 모아 만들어 낸 공기 덩어리.

“어우, 냄새…….”

그 자체도 제법 독성이 있지만, 이 덩어리가 끈적한 뻘 지면 바로 아래에 굳어버린 바람에 치명적인 천혜의 함정으로 돌변한 거다.

푸석. 후드득.

깊이는 대략 반 장. 생각 없이 발을 디뎠다간, 바닥이 바로 꺼지고 함정에 빠진 이는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을 거다. 그러고는 오래 묵은 시독을 들이켜고 바로 중독.

“왼쪽 주의. 전달.”

“이번엔 왼쪽 주의. 전달.”

그런 위험을, 서문영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녀석은 제 말대로 눈이 좋았다. 그게 육감인지, 직감인지, 어쨌든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녀석이었다.

“…정지. 잠깐 다들 멈춰 봐.”

그렇게 한참을 조심스레 지도를 채우며 걷다 말고, 천마 일행은 발견했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거대한 것을.

“저게 뭐야…….”

“…성? 아니, 배인가?”

처음에는 목재로 지어진 성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여기가 물기 있는 습지대라고는 하지만 가까운 바다가 최소 천 리는 되는데, 육지에 있을 리가 없는 거대한 배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반절로 뚝 부러진 배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어지간한 강에서는 엎어져 버릴 만큼.

“…소진?”

“아, 응. 잠깐만.”

서문영이 묻자, 소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했다. 이제껏 파티의 애물단지였던 그가 간만에 활약을 할 때가 온 것이다.

휙. 휘익.

손장난처럼 빈손으로 허공에다 뭔가를 열었다 펼쳤다 하는 소진. 그걸 한참이나 반복하고 있으려니 당무련이 고개를 갸웃했다.

“…쟤 뭐 해?”

“음, 심상의 서관이네. 기억법의 한 종류야.”

운소령이 끄덕이며 설명했다.

방계라곤 해도 그녀 역시 제갈세가의 여식.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압축해서 머리에 저장하는, 이른바 초기억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제갈세가에서 한층 더 강화하고 진화시킨 심상의 서관. 하나 그 원류는 소진이 쓰는 기억의 궁전과 뿌리가 같다.

“읽었던 서책의 내용이나 예전에 겪은 경험 같은 게 많을 때, 평소에는 쓰지 않고 머리 한구석에 몰아넣어 두는거야.”

“아니, 왜?”

“아니, 뭐… 아무리 오성이 뛰어나도 평소에 머리를 항상 다 쓰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니까. 봐, 당 소저도 싸울 때는 심력을 손과 눈에 더 쓰잖아?”

하백운이 추가로 설명했다.

“안력? 감각? 그런 거? 평소에 항상 쓰기엔 부담스럽지. 뭐, 소진은 머리를 쓰니까 뇌력? 이라고 해야겠지만.”

“아, 그런 건가. 이해했어.”

당무련이 끄덕였다.

“찾았다.”

마침 그때 저장해 둔 기억을 떠올렸는지 소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살짝 초점이 멀어진 눈으로, 마치 서적을 읽듯이 중얼거렸다.

“형태는… 초기형 전열함. 서역에서 포격전을 벌일 때 쓰는 전선. 영길리나 화란에서 많이 만들어졌고, 배수량은 천 톤가량. 승선 인원 최소 100에서 최대 500까지…….”

휘청!

“소진, 괜찮냐?”

힘겹게 말하다 말고 뒤로 넘어가는 소진. 다행히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 있어서 넘어지진 않았다.

“아아… 괜찮아. 너무 어릴 때 본 책이라서 찾는 데 오래 걸리… 어어?”

핏발이 잔뜩 선 눈을 꿈벅꿈벅하며 고개 젓는 소진. 그를 받쳐 준 것은 의외의 사내, 마법사 이경이었다.

“고생했다. 지식의 무게는 잴 수 없기에 가장 무겁지.”

툭툭.

“어… 고마워.”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소진은 끄덕였다.

왠지, 마법사는 이런 걸 인정해 주는구나. 참 기쁘다.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찰칵. 스르륵.

“서역의 군선이라… 그러고 보니 이거, 전부터 많이 봤었지?”

서문영이 땅에서 휘어진 작대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

시커멓게 녹이 너무 슬어서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소진의 말을 듣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건.

커틀러스였다.

“수업할 때 배웠지. 서역의 해군들이 쓰는 검이라고.”

“커틀러스. 길이가 짧고 날이 두터워 살짝 굽어져 있는 외날 검으로 휘둘러서 베어 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선상이라는 좁은 전장에서 쓰기 편하도록 발달된…….”

“알았어. 알았어. 적당히 좀 해.”

소진이 또 멍한 눈으로 줄줄 읊으려는 것을, 당무련이 핀잔을 주며 말렸다. 모를 때는 비실비실한 책벌레인 줄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엄청난 지식을 쌓아 올린, 성실한 학생이었음을 실감하며.

스윽.

서문영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며 정리했다.

“그러니까… 어떤 공간의 틈? 구멍? 그런 걸 통해서 아예 배 한 척이, 수백 명의 해군과 함께 넘어온 거라는 거지?”

“음, 이건…….”

짧게 정리한 말에 일행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굴혈… 게이트? 여기에?”

대격변의 날.

기록상으로나 존재하던, 외차원의 존재들이 넘어오는 곳. 천만뜻밖에도, 고룡 쉐이크의 레어라 할 수 있는 어둠나무 지대에 외차원으로 연결된 통로가 발견된 것이다.

“이건 진짜 중대 보고인데. 저 괴상한 데스나이트하고는 비교도 안 돼.”

꿀꺽.

하백운이 침을 삼켰다.

“운소령, 지도는?”

“다 됐어. 여기가 마지막이야.”

“좋아. 결정할 시간이군.”

그 말에 서문영이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는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쩔까. 더 진입해? 아니면 이대로 물러서나?”

파티는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아니, 그 이상을 했다. 지역 정찰을 마무리 지었고, 위험해 보이는 건축물… 길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서역의 선박을 발견했다.

이 정도면 기말고사 최고득점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물러가도 손해는 없다. 반면, 안으로 들어서면 이제껏 보지 못한 어떤 위험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음…….”

“흠…….”

다들 침음하며 심각하게 얼굴이 굳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뭘 묻고 있어? 당연히 진입해야지.”

“이한…….”

그건 당연히 천마였다. 그는 잔뜩 들뜬 얼굴로, 얼마 전에 건진 칠흑의 검, 듀랜달을 부웅, 붕 휘두르며 말했다.

“야, 모르겠어? 딱 봐도 이거 그거잖아. 보물선!”

“보물…….”

“보물선이라고? 이게?”

확, 하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껏 걱정과 위기감으로 주눅이 들어 있던 2학년 파티의 눈에, 욕심과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이 솟아 올랐다.

“그래! 보물선! 이걸 그냥 두고 가려고? 야, 소진. 이 배 멀쩡했으면 가격이 얼마였겠어?”

“어… 이게……. 멀쩡했다면…….”

천마의 말에, 소진이 눈을 껌벅껌벅했다.

그는 기억을 되짚었다. 서역의 군선. 값비싼 화포를 장비하고, 비싸기가 이를 데 없는 화약을 펑펑 쓰는 전열함.

서너 척만 만들어도, 서역의 작은 국가는 나라 재정이 휘청할 정도의 물건이다. 그러니.

“최소… 금자 천 냥… 아니, 만 냥? 그 정도…….”

“그렇지? 그럼 그런 비싼 배를 타고 다니는 우두머리, 선장은 뭘 가지고 있었을까? 그놈이 죽은 다음에, 선장 실에는 뭐가 남았을까?”

“……!!!”

“워억!”

떠올랐던 호기심과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소진의 보증. 금자 만 냥에 달하는 값비싼 배. 그런 물건을 운용하는 선장이라면, 당연히 귀중품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서역의 법률상, 한 배의 선장은 배라고 하는 작은 영토의 영주나 다름없으니까. 돈도 많았을 테고.

그러니 보물선이다. 보물선이 뭐 별거던가? 안에서 금은보화를 건져 낼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보물선이지.

“그런데도 안 보고 갈래? 이걸 그냥 넘기게? 뭐~ 쫄리면 늬들은 돌아들 가라. 나는 들어가련다.”

휘릭. 철썩.

천마가 지고 있던 등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일장을 후려갈겼다.

휘이잉! 콰앙!

두텁지만 오래 묵어 약해진, 배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와 함께.

키이이익!

시퍼런 귀화를 눈에 담은, 삭았지만 분명 해군의 복색을 한 해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에.

“다 내놔! 새끼들아!”

천마는 유쾌하게 웃으며 벼락을 후려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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