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해선 (1)
퍼석! 빠각! 파직!
뚫고 들어간 군선 안은 어지러웠다. 육지에 난파되어 버린 배 안은, 좁고 기울어진 데다 이끼가 끼어 미끄러웠다.
끼이이이--!
“조심해!”
그래서 일행은 움직임이 불편했다. 산 사람이야 넘어지고 부딪히면 아프다. 하지만, 이미 죽은 것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죽은 언데드들은 넘어지고 구르고 하면서도 잘도 달려 들어왔다.
우루루루! 다각다각!
퍽! 퍼석!
뼈가 튀고, 파편이 튄다. 배 안은 좁았다. 오래된 군선 전체는 분명 크고 거대했지만, 온갖 벽과 기둥으로 가득했기에, 일행은 난전으로 말려들었다.
왜 해군이 커틀러스라는 짧고 굽어진 외날 검을 쓰는 지 실감이 팍팍 들었다. 좁아 터진 객잔에서 삼류 왈패들이 마구잡이 싸움을 벌이는 양상이었으니까.
빠각! 가가각!
“에라, 썅!”
이리저리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짜증난 천마가 크게 후려갈겼다.
쿠구구궁!
단 일격에 십여 마리의 해골이 박살 나고, 그 여파가 벽을 무너뜨리며 뒤이어 줄지어 오던 몬스터들이 통째로 으깨져 버린다.
“하하핫! 잡것들이!”
“이한! 힘 조절 해!”
우르릉! 쿠르릉!
하지만 덕분에 배 전체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으아! 배 다 무너지겠어!”
아마 수백 년 동안 반쯤 썩어서 너덜거리는 선박은, 좀 더 충격이 가면 통째로 우르르 무너질 태세였다. 거기다가 군선의 언데드들도 골치였다.
빠각! 빠각! 빠직!
“아니! 이 새끼들,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거야!”
이놈들은 자꾸 되살아났다. 바깥에서는 일단 골통을 부숴 버리면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는데, 이 부식된 배의 해골들은 달랐다.
달각. 달각. 끼르르르!
부숴도, 부숴도, 깨진 조각들이 도로 맞춰지며 다시 일어선다. 힘도 위력도 대단치는 않은 잡졸 수준이었지만, 아무리 때려도 영 죽지 않으니, 거슬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부스슥. 우드드득.
“어어?”
“배, 배가? 저절로 수리되고 있어요!”
이상한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조금 전 천마가 후려갈겨 무너뜨린 벽. 박살 나고 부서진 선실 벽이 차각차각 되맞춰지며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기막힌 일이다. 해골도 부숴도 도로 살아나고, 배도 부숴도 다시 복구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주인이시여, 이 배 전체가 문제입니다. 이곳은 강력한 음의 마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천마에게 속삭이는 음성이 있었다. 그림자의 정령, 페이탈리스트였다.
“그래? 뭐 어떻게 되는 건데?”
부우웅!
다시금 일격을 날리며 묻는 천마.
-강력한 사기, 죽음의 기운이 이 배가 죽인 이들에게서 뿜어나와 배 전체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원한과 죽음을 근원으로 한 이 배는 일종의 성역입니다.
페이탈리스트가 설명을 이었다.
말하자면 이 군선의 해군들은 한때 어마어마한 인명을 학살했고, 그로 인한 희생자들이 남긴 원망, 원한을 에너지로 삼아 말 그대로 죽음의 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죽음의 공간이 되어 있기에, 이 배의 언데드들은 아무리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고.
“뭔 씨발, 그런 게 다 있어?”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이 배와 이 언데드들은 이미 공생관계다. 배를 다 부수지 않는 이상, 언데드들은 무한히 살아난다.
“이한? 무슨 일이야?”
“이 배 전체가 마경, 아니, 마물이래! 공간 자체가 몬스터란다!”
“이런 젠장!”
“아미타불…….”
천마의 말을 서문영은 바로 알아듣고 욕을 했다.
방윤도 기가 막힌지 염불을 외웠다. 그리고 그 염불에, 뭔가를 퍼뜩 떠올린 이가 있었다. 당무련이었다.
“방윤! 그거 한 방 갈겨!”
“어? 뭐?”
“소림의 사자후!”
“아……!”
묘안이었다. 배와 언데드가 연결되어 있고, 이 배가 사기와 원기로 덩어리진 곳이라면, 그 기운을 통째로 흩뜨려 버리면 된다.
마치 독지에 대량의 해독약을 풀어 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소림의 사자후신공은 파사현정의 기운을 가진 이런 언데드를 상대로 상극의 효과를 낸다.
“흐읍… 흐읍……!”
“다들 보호해! 지켜!”
방윤이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일행은 각자 방향을 잡고 방어에 힘을 썼다. 온몸의 기운을 모아 단전으로 끌어들이는 방윤. 반개한 그의 눈에서는 미미한 서기가 서려 있었고, 희미한 빛은 배 안의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났다.
캬아아! 크와아아!
그에 반응한 언데드, 아니, 이제 유령선이라 불러야 할 군선 전체가 격한 경계를 일으켰다. 해골들은 뛰다 못해 기고, 날아들며 몸을 부딪혀 왔다.
콰드득! 파각! 우지지직!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안에 수백의 언데드를 간직한 채 묵어 버린 유령선. 저주받은 사체의 사기가 잔뜩 농축된 군선은 마치 의지가 있는 생물처럼 반응했다.
쩌억. 쩌어억.
“이건 뭐……!”
분명 단단하고 두텁던 벽이, 저절로 쩍쩍 벌어지며 원래 없던 통로를 열어 내었다. 처음에는 앞뒤만 막아 내면 되던 싸움터가 이제는 사방팔방, 심지어 천장과 바닥에까지 구멍이 열려 온통 허연 뼈 무더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끝이 없어! 뭐든 해 봐!”
“드라이어드 루트……! 앗, 꺄아악!”
필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급한 김에 나무의 정령을 불러 통로를 막으려 했지만, 소환된 그녀의 정령은 현계되자 마자 바로 이 군선, 유령선의 지독한 사기에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믿고 있던 정령사가 무너져서 지켜야 할 사람이 둘, 아니, 소진까지 셋이 되자 당무련은 이를 박박 갈았다.
“아악! 미치겠어! 방윤! 빨리!”
오옴---!
그래도 그럭저럭 시간은 지났다. 뼛가루 가득한 선실에서 일행이 악전고투를 벌이는 사이, 방윤은 점점 집중도를 높였다.
신성력은 아니지만, 오랜 수양으로 쌓은 소림의 파사신공은 성직자의 턴 언데드에 필적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의 입이 벌리고, 원래 범어였을 진언을 토해 내려는 순간.
그---드드득!
“무너진다!”
“피해! 아니… 막아!”
분명 두터운 갑판을 지탱하고 있었을 유령선의 단단한 격벽이 통째로 기울어지며 일행을 덮쳐 왔다. 마치 작은 날벌레를 두터운 책으로 찍어 터뜨려 죽이려는 듯!
“이, 이거…….”
“으아아악!”
“방윤 데리고 피해!”
“아니! 막을 수 있어! 이경!”
혼란 중에 도박 수를 던진 것은 하백운, 마법사였다. 그의 손에 희뿌연 섬광이 서리고, 뒤에 있던 보조 마법사 이경이 즉각 캐스팅을 했다.
“더블 캐스트! 스펠 부스트! 마나 차지!”
쏴아아악!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시전 속도 상승의 버프를, 그리고 다량의 마나를 주입했다.
쿨럭!
통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양의 마나가 억지로 잔뜩 들이부어지자, 그릇이라 할 수 있는 하백운은 격한 충전에 피 섞인 기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양손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더블 캐스트! 에어리얼 실드! 라이트 웨이팅!”
쏴아아악! 두웅!
기묘한 소리가 났다. 방윤을 에워싼 일행의 앞으로 반투명한 두터운 힘의 장막이 생겨나더니 주변의 모든 것을 강제로 밀어냈다.
구르르르…….
그리고 희미한 푸른 빛, 중량을 가볍게 만드는 경량화 마법이 발동했다. 두텁고 무거운 무게로 일행을 눌러 죽이려 다가오던 나무 벽이, 갑자기 잘게 흔들리며 다가오는 속도가 늦춰졌다.
“오라 플레어! 오라 플레어!”
퍼엉! 퍼엉! 퍼엉!
하백운은 확실히 2학년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미 더블 캐스팅을 하고 난 후에도, 그의 손에서는 하얀 섬광이 뿜어져 나갔다.
오라 플레어. 근접전에서 마법사가 물리 공격을 파훼할 수 있는 강력한 파괴 마법. 거의 무영창으로 쏟아진 하얀 섬광이, 무게를 잃은 나무 벽을 후려갈겼다.
“지금이야! 다 달려들어! 부숴!”
“으아아아!”
쉬익! 쉬익! 퍼엉! 파가각!
섬광이 일고, 검기와 검풍이 집중포화처럼 쏟아졌다. 넘어져 오던 두텁고 거대한 벽은, 일행의 총력을 다한 공격에 두 조각, 네 조각, 나중에는 수십 조각이 되어 파편으로 흩어졌다.
파가각! 퍽! 퍽! 퍽! 퍽!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났다. 뾰족하게 조각난 파편들이 일행을 덮쳤지만, 마법사는 대비하는 자다.
콰드득! 콰곽! 가가가각!
“으아아아…….”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질린 소리를 냈다.
천만다행으로 이미 하백운이 전력을 다해 펼친 에어리얼 실드,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걸 시간이 없어 지역을 통째로 감싸 버린 광역 방어에 날아들던 파편들은 날아든 속도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오오오옴---! 못지 사바하!”
그리고, 드디어 이제까지 일행이 기다렸던 방윤의 사자후가 시기적절하게 터졌다.
커어어어엉!
우르릉! 우르르릉!
충격이 일었다. 배 전체가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은 듯 크게 진동했다. 단단히 준비했었던가, 예전에 토해 냈던 사자후와 달리 이번에 방윤이 펼친 사자후 신공은 시전하는 순간 미미한 황금빛 서기까지 서려 있었다.
샤아아아…….
퍼석, 퍼서석.
반응은 즉각이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해골들은, 소리와 서기를 맞은 순간, 허연 뼛조각과 뼛가루로 변해 녹아내리듯이 무너졌다. 사기의 상극이라 할, 정순한 파사신공에 직격당한 결과였다.
“크으윽, 어우…….”
천마도 인상을 썼다. 기운 자체가 사악인 언데드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근원의 힘은 마공.
아무리 자연지기에서 비롯되었다지만, 마공은 속성 자체가 혼돈이다. 정순한 질서의 법을 따르는 독실한 승려가 뿜어내는 기운에는 제법 타격을 받는다.
-주, 주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쿨럭. 그럭저럭. 너는?”
페이탈리스트도 반쯤 죽어 가는 소리로 물어 왔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그림자의 정령인 그도, 조금 전 방윤의 사자후에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텐데.
-조금… 쉬어야 할 듯합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어, 그래. 걱정 말고.”
천마는 패앵! 코를 풀어 내고 눈을 닦았다.
하여간, 탈마에 이르러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눈, 코, 귀, 입.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 죄다 찐한 소금물을 부어 넣는, 찌릿찌릿하고 따가운 그런 감각.
-갑판 위의 선장실과… 선창 아래… 밸러스트를 주의…….
“밸러스트? 그게 뭐… 야? 어이?”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더 하다 말고 침묵하는 페이탈리스트. 천마가 물어 보았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허억… 허억…….”
“이한… 누구랑 대화하는 거야?”
어쨌든, 일단 위기는 넘겼다. 짧은 순간 총력을 쏟아 낸 천마의 일행은 거의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 부하가 있어. 정령이야. 그림자 계열.”
“페… 쿨럭! 페이탈리스트? 진짜?”
기침을 하며 대뜸 물어 오는 소진. 반쯤 죽다 살아났음에도, 녀석의 호기심은 아직 여전한 모양이었다.
“일단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거 아무래도…….”
부스슥. 부스스슥.
허연 먼지가 사방에서 피어났다. 뼛가루, 곰팡이,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다 못해 급격하게 바스러져 쏟아지는 선박의 잔해들.
마치 이제껏 버티고 있었던 수백 년의 세월을, 지금 단 한순간을 맞아 일시에 마모되는 듯한 광경이었다.
우르르릉!
“다 무너지게 생겼으니까.”
펄럭! 파악.
기 막으로 먼지와 곰팡이를 밀어내며 천마가 앞장을 섰다. 어지간한 그도, 이번에는 좀 놀랐다.
‘진짜… 혼자서 다는 못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