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왕가의 위엄 (1)
“리커버리. 스트렝스.”
이경의 보조 마법, 활력 회복과 근력 상승을 걸고 파티는 선박의 최하층을 향했다.
저벅. 저벅.
유령선은 이미 한참 전부터 고요함 그 자체였다. 대신 아홉 명이 걷는 걸음 소리가 여기저기 벽에 부딪혀 기묘한 울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짜… 모험을 하는 기분인데.”
“그러게.”
누군가가 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기 때문일까, 실전의 긴장감보다 그동안 학관에서 배웠던 것을 현장에서 실제로 겪는다는 기대감과 흥분이 더 컸다.
“이 밑에 뭐가 있을까? 괴물? 아까 나왔던 해골 녀석들?”
“모르지. 어… 해골이라? 하긴 낭설 중에는 그런 이야기도 있어. 해적선의 악독한 선장들이, 두개골을 모아서 배 최하단에 쌓는다고. 선원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
터벅. 터벅.
이런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알은체를 하는 소진이었다.
“두개골? 해골을? 진짜로?”
“어, 그럼 이제까지 나왔던 해골들이 사실은…….”
“아니, 하지만 그건 그냥 낭설이야. 사람의 두개골은 바닥짐으로 쓰기에는 너무 가볍거든. 속도 비어 있고.”
“아…….”
척!
“조심, 함정이야.”
서문영이 잡담을 끊었다. 선내 통로의 함정을 발견한 것이다.
달칵. 찰칵.
그는 조심스레 격발장치를 해체하고 안심 반, 뿌듯함 반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수업 시간에 배운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원래 함정 같은 것에 표준이란 없는 법.
규격과 다른 것들을 배우면서, 직업 기술은 더 숙련되는 법이다.
“해체 완료. 가자.”
“잠깐 있어 봐.”
스윽.
당무련이 제지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서문영이 패스파인더로 함정 해체를 전문으로 한다면, 그녀는 당문의 후예, 함정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가문의 사람이다.
“기관을 설치하기 좋은 장소야… 그런데…….”
“그런데?”
“음… 애매하네. 뭔가 좀 이상한데 정확히 말하기가 어려워…….”
인상을 찌푸리는 당무련.
분명 뭔가가 떠오르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를 콕 집어 말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복도를, 벽을 잔뜩 찌푸린 눈으로 보던 그녀는, 어? 하고 얼마 후에 무언가 생각난 얼굴이 되었다.
“하백운, 여기 빛 좀 비춰 줄래?”
“…얘는 마법사를 무슨 휴대용 등잔으로 알고 있냐.”
하백운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일단 빛을 밝혀 주었다.
“라이트.”
사앗.
작은 광구가 떠올라 너울너울 허공에 정지한다.
그러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선내 통로.
검게 변색된 나무벽들에 짙은 갈색빛 얼룩이 드러났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곰팡이와 이끼가 잔뜩 슬어 마구잡이로 무언가를 토해낸 듯한 기괴한 벽화 같았다.
“으… 메슥거려.”
“흐음… 이거, 그거네. 경고.”
소진이 속이 안 좋다는 얼굴을 하고, 당무련은 그제야 샐쭉하고 웃음을 지었다.
“경고라고?”
“그래. 시간이 제법 지나서 색이 변했지만… 이건 원래는 붉은색 염료였을 거야. 그리고 여기에 등불이 있었다면… 아마 복도 전체가 시뻘건 핏빛이었을걸?”
당무련이 가리킨 선내 복도의 툭 튀어나온 부위. 확실히 저기 등잔이나 횃불이 있었다면 이 복도 전체가 다 빛을 받아서 환하게 드러나 보였으리라.
“…그렇겠네.”
운소령이 잠시 상상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경고라니 무슨 경고?”
서문영이 다시금 턱을 쓸었다.
눈이 좋은 그는 이미 복도 전체에 그려진 기이한 그림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걸 해석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걸 당무련이 해석했다. 기관진법가의 시각으로.
“뻔하지 뭐. 이 붉은 해골, 칼 모양, 진입자사. 라고나 할까? 이 아래로 들어갈 생각 하지 마라. 죽여 버린다. 하는 그런 경고의 표식이지.”
사천당문은 기관진식의 대가이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목숨을 해하지는 않는다.
당가타 같은, 당문이 외부인을 받는 지역에는 반드시 미로나 절진으로 쉽게 진입이 힘들게 만들어 둔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섰을때나 적으로 간주하고, 진짜 기관진식을 쓴 함정이 발동하는 것이다.
“기관진식이라는 게, 되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야. 만들기도 어렵고, 정비하기도 귀찮지. 괜히 시체라도 끼게 되면 싹 꺼내서 갈거나, 여차하면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하거든?”
기관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습격자가 명백한 적의 경우라면, 기관은 분명히 좋은 방어 시설이 된다.
하지만 적이 아닌 사람, 어찌어찌 길을 잘못 들어 온 양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골치 아프게 당문의 이름에 호승심으로 도전하는 유력 가문의 후기지수 같은 경우는.
뒷일이 피곤하다.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 당문 입장에서는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한다.
때문에 웃기게도, 함정이 있는 앞에 ‘여기 함정 있으니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표시를 하는 일이 생긴다.
“제일 좋은 건, 기관을 사용할 일이 없는 거야. 돈 들고 힘들고 골치 아프니까. 그래서 기관 설치자의 입장에서 경고문은 필수야.”
“흐음…….”
모처럼 전문 분야가 나오자, 당무련은 콧대를 세우며 지식을 자랑했다.
“어, 그런데… 시점이 이상해.”
“시점?”
소진이 조심스레 손가락을 들어, 이리저리 사람이 오가는 동선이 움직이는 모양을 추측했다.
“당 소저 말대로 이 문양들이 경고문의 성격이라면, 글쎄, 들어갈 때보다 나갈 때 더 위압적일 거 같은데?”
“…어?”
“통로, 시야. 저쪽에 빛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원래 그림이 어… 입을 벌린 무서운 마귀? 그런 모양이라고 할 때, 봐봐. 복도 전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들어갈 때는 별 위압감을 느끼지 못할 거야. 들어왔다가 나갈 때 느끼겠지?”
소진의 손가락이 주욱 움직였다.
지금까지와 같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보자 확실히 무언가 다른 모양이 보였다.
여전히 덕지덕지, 곰팡이와 이끼가 끼어 너저분해지긴 했으나,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흉악한 것이 입을 벌리고 덮쳐 오는, 그런 형상이 희미하게 보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걸 트릭 아트라고 했던 거 같아.”
“…뭔 소린데. 그게.”
“응… 음영? 색채와 빛? 그런 걸로 그림을 입체감 있고 실감 나게 그린 그런 그림. 확실한 건, 이 벽화는 외부인이 아닌 내부인이 보라고 그린 그림이라는 거지.”
“아니, 그런데 그걸 왜…….”
소진의 말에, 일행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건 당황을 넘어 황당할 지경이다. 일반적으로 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밖에 그리는 경고의 표식을, 거꾸로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린다?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눈앞에 있었다. 당연히 괴상할 수밖에.
“무슨 의도지?”
“글쎄… 바닥짐을 함부로 들고 나가지 마라. 다시 생각해라. 이런 의미?”
“고작해야 바닥짐을?”
“…그러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상했다.
소진의 말에 따르면 이 서역의 전열함은 전형적인 침저선, 배 단면이 삼각을 띠는 선박이다.
주로 서역에서 유행하는 것으로, 중원의 선박은 평저선, 바닥이 평평한 배를 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원의 유구한 역사에서 침저선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바닥짐은 배를 안정화시키는 무게 추의 역할. 선박에 있어서, 이게 어떤 걸로 쓰이는가 정도는 학관생들도 알고도 남았다.
“오, 알겠어. 바닥짐이 금은보화인 거야. 그러니까 삼엄한 그림을 그려 놓은 거지. 어때?”
…천마만 빼고.
“으휴…….”
“휴우…….”
“하아…….”
다들 그냥 한숨을 쉬었다.
밸러스트는 무게 추다. 돌이나 모래주머니 같은 그런 무게가 잔뜩 나가는 짐으로, 언제든지 내버릴 수 있는 흔하게 쓰는 물건으로 채운다.
그런데 금은보화? 참으로 재기발랄한 상상력에 할 말도 없어졌다.
“반응들이 왜 그래?”
“어… 가자.”
서문영이 설명할 의욕도 없이 앞서 나갔다. 하백운이 히죽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 큰 배를 지탱할 바닥짐이라면, 아주 황금의 산이 필요하겠지만.”
엉뚱하다 못해 발랄한 천마의 상상을, 마법사는 무시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에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상상력, 닫혀 있지 않은 새로운 시야이니까.
투둥. 투둥. 콰직!
“어두운데…….”
“불을 밝혀볼게. 라이트.”
그래서 배의 선창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어두컴컴한 큰 선실의 문을 열었을 때.
번쩍. 샤르릉.
“…….”
“…….”
온통, 눈부신 누런 주괴가 가득한 것을 보고 파티의 일행 모두는 입이 막혔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봐, 맞잖아. 금은보화. 내가 뭐랬어?”
…천마만 빼고.
혼자 자신의 선견지명을 뽐내는 그 외에는, 모두들 눈 앞의 광경에 정신이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황금. 그것도 헤아리기도 힘들 만한 양의 황금.
본래라면 돌이나 모래주머니, 그런 것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밸러스트. 선박의 가장 아래에서 무게를 잡아 주는 화물은…….
배 바닥을 가득 채운 황금이었다.
“미쳤어…….”
“아니… 무슨 배가… 바닥짐을? 돌았나?”
“여, 여기 뭔가 있어!”
다들 혼란에 빠진 가운데, 소진이 선체 내벽에 새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나마 상단의 자식이라고, 이런 어마어마한 황금 창고를 보고도 회복이 빨랐던 것이다.
“이건……?”
서문영과 운소령, 소진 다음으로 학식을 가장 많이 쌓은 두 사람이 함께 벽의 문양을 들여다보았다.
왕관.
칼.
그리고 사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짐승의 그림.
휘황하게 금박과 은박으로 아로새겨진 거대한 문양은,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하게 만드는 화려함과 위엄이 있었다.
“소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서문영이 물었다.
그림 아래에는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구불구불하고 이상한 형태였지만, 줄을 맞춰 가지런히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떤 나라의 언어인 것 같았다.
“…본 적 없는 문자야. 내용은 모르겠어.”
소진이 한참 그 글자와 선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력이 약해서 구멍 취급을 받긴 하지만, 삼음절맥의 학식 하나는 진짜였다. 소진이 모르는 언어라면, 천무학관의 교두나 교관이라 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뭐, 나름 소득은 있네. 일단 이 배는 완전히 다른, 이상한 곳에서 날아온 배라는 거? 이 문장만 떼어 들고 가도 확실한 증거가 되잖아.”
방윤이 나름 긍정적으로 쾌활하게 웃었다.
“야, 그거야 뭐, 이미 시작부터 알고 있었는걸?”
당무련이 틱틱거리며 투덜댔다.
“아니, 그런데…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거… 대충 무슨 분위기인지는 알 것 같아.”
계속해서 문장을 들여다보던 소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뭐?”
다시금 집중되는 시선.
소진은 문양 아래의 규칙적인 글자들, 그중 반복되는 문자들, 그리고 화려하게 새겨진 거대한 문장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조금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황실? 혹은 왕가의 위엄…….”
툭. 툭. 툭.
글씨체는 화려했다. 크고 굵게 새겨진 것이 무언가를 잔뜩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사자, 왕관, 칼. 주로 서역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상징이야. 고귀한 것, 강력한 것. 여기 아래 봐 봐.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고 있지?”
문양 아래를 가리키는 소진.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정말로 개미만 하게, 작게, 하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 같은 것들이 잔뜩 엎드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조하고, 우러러보라고, 허튼 생각 하지 말도록, 마음에서부터 숙이라고 하는… 왕권이 강한 나라에서 주로 쓰는 그림이야. 그러면…….”
“그러면?”
“이, 이거… 그러니까, 진상품인 거 같은데? 아니면 공물? 황실에 올리는 막대한 금은보화. 아마 그래서 전열함 같은 강력한 무장을 갖춘 배에 실었나 봐.”
“아……!”
소진의 추측에 모두들 감탄했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최소 왕가, 혹은 황가에 올라가는 공물.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도, 과할 정도로 큰 선박의 크기도 이해가 되었다.
황실에 올려야 하는 공물이 실려 있는 것이니까.
“이야… 그럼 뭐야? 이 황금이 전부 다…….”
“와… 이게 다 얼마야? 천무학관을 사 버리고도 남겠는데?”
“조. 조금만 떼어서 따로 챙기면 안 될까? 얘들아, 이거 너무 많아서 학관에서 다 알지도 못할…….”
다들 들떴다. 삽시간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눈앞에 황금 더미를 잔뜩 두고 와글와글 떠들고 있을 때.
“…다들 조심해! 정령이야!”
드드드득!
필리아의 경호성과 함께, 황금 무더기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경계를 갖추는 파티원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애초에 위험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금은보화가 가득 쌓인 곳이니 경계병 역할의 몬스터도 있을 법하다.
그르르르륵…….
“이…….”
“뭔……?”
하지만, 정작 눈앞에 일어난 것들을 보고, 일행은 또 한 번 기가 막혀야 했다.
거대하게 사람의 형체를 애매하게 닮은, 싯누런 금속의 인형에.
“…골든 골렘?”
그워어어어!
누군가가 흘린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금덩어리 괴물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