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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06화 (207/310)

206화. 왕가의 위엄 (3)

견고한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다. 굳건하게 지탱되던 균형은, 딱 한 줌의 힘이 더해지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차아!”

퍼억!

방윤의 가세는 그 마지막 한 줌이었다. 희미한 기운이 서린 삽이 황금의 기둥에 푸욱 박혔다. 그 상태로 방윤은 몸을 뒤틀며 강하게 발을 박찼다.

두웅--!

진각이었다. 강한 반발력이 소림승의 다리를 타고, 허리를 지나 강건한 어깨까지 전달되었다.

우드득!

내력이 잔뜩 담긴 상태로, 자칫 놓칠 수도 있는 끔찍한 무게를 외가기공으로 단련된 소림승의 손은 버텨 냈다.

그그극! 쩌억!

압력과 반발력. 지렛대의 힘으로 한 삽이 기어코 떨어져 나갔다. 머리통만 한 황금 덩어리. 이제껏 일행이 입힐 수 있었던 피해 중에서 가장 큰 대미지였다.

“우와아아! 방윤!”

“읏차!”

“하! 질 수 없지!”

콰드드득!

일행의 기세가 돌변했다. 이제껏 저걸 어떻게 상대하냐 하던 마음가짐이 저걸 어떻게 하면 빨리 부수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승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전사들은 무섭게 타오르는 법이다. 서문영은 이제 아낌없이 힘을 실은 강격을 날렸고, 운소령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검기를 끌어냈다.

챙! 카캉! 카드득!

불꽃이 튀고, 사방으로 금빛이 날았다. 이제껏 전위 역할을 해 왔던 전사들은, 슬슬 상대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우우우! 콰드득!

황금의 골렘. 처음에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던 무식한 놈이, 점차로 밀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행동이 느려지고 어지러워졌다. 특히나 녀석이 경계하는 것은, 가벼운 몸을 이용해서 머리 위를 찔러대는 운소령이었다.

부우우웅!

“하!”

갑자기 날아드는 주먹을, 운소령은 벽을 박차며 피해 냈다. 이제껏 좁기만 해서 움직임에 방해가 되었던 선내 공간이, 익숙해지자 오히려 나쁘지 않은 싸움터가 되었다.

팟! 팟! 팟!

벽을 차서 뛰어오르고, 천장을 걷어차 쑤셔 박고, 바닥을 박차 다시 치솟는다. 탄력이 좋은 공처럼, 그녀는 빠른 몸놀림으로 종횡무진 선벽을 걷어차며 날았다.

콰드득!

“박혔다!”

“지금이야!”

그러다가 골렘의 주먹이 두터운 선벽에 박히면, 사정없이 등짝을, 다리를 후려갈겼다. 검기와 마법이 폭격이라도 하듯 쏟아졌다.

퍼버벙! 콰가강! 구오오오!

검기와 황금빛이 사방으로 뿌려진다. 있는 힘을 다해 강대한 적을 물어뜯는 일행들. 그런 그들을 부러워하며 이를 가는 이가 있었다.

“아! 정말! 답답해 죽겠네! 야! 소진!”

“왜…….”

당무련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린 금화나, 던질 만한 것들을 주워 모아 마구 뿌려댔다. 요란한 금속성과 금빛이 그녀의 손에서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저 답답해서 뭐라도 하는 것일 뿐, 그게 실제로 피해 주는 것은 전무하다는 건, 그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뭐 할 수 있는 거 없어? 사내자식이 이런 때 멍때리고 있으면 어떡해! 방법 좀 찾아 봐! 좀!”

“…방법을 찾으라고 해도.”

소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몸이라 해도, 자칫 골렘의 일격에 한 번만 걸리면 즉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다.

“일루전! 미러 이미지!”

“헤이스트! 리커버리!”

그리고 마법사들은 어떤가. 그들의 역할이야말로 이 싸움의 핵심이었다. 마법의 도움을 받은 전사들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다.

거기에다 하백운은 재치 있게 골렘의 눈앞에 환상을 만들어 내어, 더 많은 공격 기회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내가 뭘 해…….’

그래서 스스로 비교당하고 우울해하는 중이었다. 무력이나 전력에서, 소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껏 특제 석궁으로 특제 백린탄을 날려 화력 지원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이미 다 써 버렸다. 있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쓸 수도 없을 테지만.

좁은 선내에서 화염이 번지는 백린탄을 쏜다? 도움은커녕 동료들을 방해할 뿐이었다. 아니, 방해는 고사하고 위기로 몰아넣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 진짜 말 못 알아먹네! 뭐든 하란 말야! 뭐든! 너 힘 없는 거 알아! 하지만 머리 좋잖아! 그 머리라도 써 봐!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얼마나 창피한지 몰라?”

당무련은 바락바락 악을 썼다. 소진은 그제야 음, 하고 침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정말 아무 도움이 안 될 뿐이었다. 그건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뭐든… 그래, 뭐든. 그게 뭐든 간에…….”

예전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소한, 아주 사소한 계기가 그를 바꿨다. 비록 기물에 의존했었다지만, 그는 카르삭 왕릉에서 한 사람의 몫을 분명히 했었다.

그때의 기쁨, 인정받는 느낌은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그걸 포기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라면…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을 정도였다.

‘싸움이… 상대는 마나 메탈의 골렘. 일단은 백중세이고…….’

소진은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뜨고, 전황을 살폈다.

채챙! 카캉! 파즈즉!

방윤의 가세 후로 싸움은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흐름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쪽은 인간, 상대는 골렘이다.

인간은 힘을 쓰고 나면 지치지만, 골렘은 피로를 모른다. 계속해서 싸움이 길어지면 결국 내공과 마나가 바닥나게 될 테고, 그랬다간 이쪽이 필패.

‘물론 패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만…….’

소진은 힐끗, 팔짱을 끼고 있는 이한을 한 번 보았다. 사실상 이 파티의 최대의 전력이라 할 그는 아직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

이대로 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묘한 것은, 지금 싸움에 임하고 있는 파티의 어느 누구도, 이한더러 나서 달라고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가 나서면 그냥 끝이니까.

‘내 힘으로, 아니, 우리 힘으로 뭔가를 해내야 해.’

이한의 전력은 지난번 검은 데스나이트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보았다. 격차는 뼈가 저릴 정도로 실감했다.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된다.

위기 때마다 도움받아 버리면, 나중에는 그냥 아무것도 못 하고 이한에게 빌붙기만 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뭐가 있지? 어떤 게 있지?’

확!

머리가 열리는 소리가 난 듯했다. 소진은 눈과 귀를 모두 집중해서 파티의 싸움을 살폈다. 치열한 교전. 좁은 선창. 두터운 선저 바닥. 그리고 쌓여 있는 수많은 황금…….

‘그리고 들어올 때의 복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삼음절맥 특유의 기억력이 최고조의 집중 속에서 본 것, 들은 것, 그리고 느낀 것들을 꾸역꾸역 토해 냈다.

지금 이 배의 규격은 초기형 전열함. 서역에서 군선으로 쓰이는 배. 선저 바닥의 밸러스트 층까지 내려오며 마주친, 수백에 달하는 스켈레톤들.

‘트릭 아트.’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보게 되었을 복도의 그림. 소진은 상상했다. 자신이 이 배의 선원이었다면, 어떤 때 그 그림을 보게 되었을지.

유령선은 특이하게도, 바닥짐을 황금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에 그려진 정밀한 마귀 그림. 그건 함부로 황금을 들고 나가는 자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들고 나간다? 황금을?’

거기서 찌릿하게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주받은 유령선이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갔었던 부분. 수많은 원한을 받게 되어 배도 사람도 언데드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이곳.

하지만 언데드는 죽음(Dead)을 겪기 전에는 원래 살아 있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을 두렵게 만들어야 할 필요, 황금에 대한 물욕을 경계할 이유.

-기관을 설치할 때는 반드시 경고를 해.

소진은 당무련의 말을 기억했다. 침입자의 입장이 아닌, 관리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볼 때 기관진식이란 소모품은 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던 말을.

그렇다면 지금 이 배에서의 기관진식은 무엇일까? 어지간해서는 발동하고 싶지 않은 함정으로, 일종의 최후 방어선. 쓰지 않는 것이 좋았을 기관 역할을 하는 있는 것은?

“황금의 골렘…….”

카캉! 카가강!

바로 저놈이었다. 파티 전체가 전력을 다해서 겨우 백중세를 이루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 기물. 그 힘은 너무 과했다. 지나치게 강했다.

소진은 서문영과 운소령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천무학관 2학년의 수석과 차석. 거기에 소림승 방윤. 그러고도 모자라 중위급 마법사 둘의 조력까지 붙는다.

“…안 맞아.”

그런데 과연, 이 배의 선장이 살아생전에, 지금의 이 파티가 밸러스트 층까지 내려올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럴 리 없었다. 상리에 맞지 않았다.

지금 소진이 몸담은 파티는, 그 자신 외에는 하나같이 규격 외의 강자들이었다. 자신이 이 배의 선장이었다면, 저런 적을 상대할 바에야 차라리 항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황금의 골렘, 이 괴물은 과잉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마법 기물은, 팽팽하게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선장은, 이 황금을 수송하는 일의 책임자는, 무엇을 두려워해서 벽화를 그렸을까?

밸러스트 층의 복도에, 트릭 아트 같은 고급의 그림을 그린 이유? 지금 소진이 몸담은 파티 같은, 규격 외의 전력을 걱정해서? 아니다. 그런 가능성 낮은 일보다는…….

“…도둑질.”

훨씬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그것을 걱정한 것이다. 황금. 비싸고 무겁지만 그만큼 부피가 적은 것. 단 한 줌만 손에 쥐어도 10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재화.

그리고 왕실, 혹은 황실의 운영비, 그게 흘러나갈까 봐 걱정했다는 것은. 저 황금의 골렘처럼 대단한 키퍼(Keeper)를 두고도 저런 벽화로 경고까지 했다는 것은.

“골렘은… 마법 기물. 조종할 수 있어… 최소한…….”

너무나도 간단한 전제를 두고 있었다. 선원들이 슬쩍 금 한 줌을 들고 나가도, 골렘이 공격하지 않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

타닥!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진은 벽으로 향했다.

아까 전 봤었지만, 도무지 읽을 수 없었던 벽화. 왕관과 칼과 사자가 그려진 그림. 그리고 그 아래에 있었던, 읽을 수 없는, 처음 보는 외국의 언어들…….

“여기에… 분명, 뭔가가……!”

그의 눈이 빠르게 문장을 훑었다. 알 수 없는 언어. 처음 보는 글자. 하지만 아무리 읽을 수 없는 글이라 해도, 그것이 언어인 이상은 규칙성을 지니는 법.

차르르륵!

소진의 품에서 작은 종이 뭉치와 펜이 나왔다. 그는 벽에 상감된 괴이한 문자열을 따라 적으며 통일성, 규칙, 반복된 단어를 찾았다.

사사삭. 사각사각.

다행히, 이 기원을 모를 언어는 내용이 충분히 길었다. 손과 함께 소진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따라서 쓰고 그리며, 암호 해독을 하듯 그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건…….”

그리고 연속된 글자들 사이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번 강조된 단어를 보고 한어로 뜻을 추측해 보았다.

사각사각!

필사한 글이 종이 위에 여러 번 덧그려졌다. 그 끝에 겨우겨우, 단 두 개의 단어를 식별할 수 있었다.

-경고.

-주의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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