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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08화 (209/310)

208화. 왕가의 위엄 (5)

“그렇지! 맞아! 키퍼(Keeper)가 기물이면! 판단력이 없으면! 정지 코드가 있는 게 당연한 건데!”

“다시 봤다, 소진. 너 정말 똑똑한… 아니, 전에는 멍청하게 봤다는 건 아니고.”

딱! 딱! 딱!

하백운은 제 이마를 사정없이 후려쳤고, 이경은 건조한 얼굴로 말을 하다 말고 버벅거렸다.

“하하, 뭘…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덕분에 소진은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저런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하게 마련이었으니까. 가뜩이나 학관에서 자존감이 낮아진 소진은, 이런 종류의 칭찬에 면역이 없었다.

“응~~ 저기 말야. 초 치려는 게 아닌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아, 분명 대단하긴 한데 말이지.”

당무련이 살짝, 한 손을 들며 물었다.

덕분에 주변의 기후가 살짝 서늘해졌다.

“…….”

“…….”

“어, 왜?”

“…참, 너는 지식이 없어서 편하겠다.”

“뭐!!!”

이경이 대놓고 ‘이런 무식한 것’ 하는 얼굴로 말했고, 당무련이 당연히 발칵했다.

“야야, 잠깐. 이경? 상대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감안 좀 해라. 그리고 당무련, 이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다행히 하백운, 아는 척 좋아하는 녀석이 끼어들어서 그나마 이유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마법은 말야. 기본적으로 언어를 타고 움직여. 그리고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 관습, 사고방식이 다 섞인다고.”

그래서 어렵고 지난하다, 라고 하백운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쉬운 외국어라 해도, 정확한 교재나 교사 없이 배우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린다.

그런데 외국어. 그것도 글자조차 알 수 없는 이계어. 이걸 처음 보는 사람이 2각(30분)도 안 되어서, 일부나마 해독해 냈다? 그것도 딱 필요한 부분을?

이건 룬어나 기타 고대어를 다루는 마법사들이 보기에는 그냥 말도 안 되는 업적이었다.

“그렇구나…….”

거기까지 듣고서야 당무련은 조금 끄덕였다.

하지만 설명한 하백운은 물론이고, 이경은 오히려 더 답답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 보니까 어떤 의미인지 반도 못 알아먹은 거 같은데… 이게 얼마나 힘든 건지 방윤은 좀 알려나.”

“응? 나? 내가 왜?”

갑자기 자신이 언급되자 방윤은 툭툭, 바스라져 버린 방편산 조각을 들며 갸웃했다. 그는 이제 겨우 무기라고 꺼낸 것이 허망하게 조각나 버린 것에 많이 허탈해하던 참이었다.

“너, 경전 많이 읽지? 그럼 법문 내용을 안다고 해서, 범어(梵語)를 그 자리에서 읽어서 발음할 수 있겠어?”

“…못 하지. 그건.”

마법사의 질문에 방윤은 그저 침음할 뿐이었다.

실제로 소림사 장경각에는, 천축국에서 넘어온 옛 불경이 제법 많았다.

애초에 많이들 착각하는데, 소림사는 무예만 익히는 무문이 아니라 불경을 읽고 불법을 닦는 것이 본분인 사찰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소림의 무예는 불법의 심오막측한 법리를 깨달은, 법력이 높은 선승들만이 깊이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당연히 범어 그 자체에 대한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뚫어 낸 이들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졌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과연, 방장께서 하신 그 말씀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구나…….”

방윤이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마 그의 손에 염주가 있었다면 분명 염주 알을 굴리는 모습이었으리라.

“뭐라고 하셨는데?”

“부처님을 향한 노래는 한어로 쓰면 그저 뜻만 남을 뿐, 원래의 아름다움은 가져오지 못한다고… 항상 아쉬워하셨었거든.”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고는 새삼 소진을 보며 찬탄의 눈길을 보내는 방윤.

그러자 당무련이 두 손을 모아 보이며, 예를 갖췄다.

“방윤 스님, 우둔한 이 당가의 여식에게도 그 뜻을 좀 나누어 주시려오?”

“…….”

“…….”

그리고 일순 다시금 싸늘해진 분위기.

“아, 씨! 왜? 뭔 농담도 못 하게 해!”

덕분에 당무련은 다시금 버럭 해야 했다.

“농담이었냐…….”

“뭔가 가시가 잔뜩 돋은 말인 줄 알았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출신이 사천당가라서 그런지, 평소에 그녀는 누가 찬사를 받으면 ‘그게 뭐 대단한 건데?’라고 시큰둥하게 되묻곤 했다. 그저 면박을 주거나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이런 경우에 오해를 산 것이다.

“아니, 나 이번에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 거거든? 너희들 같은-말하면서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자존심 강한 애들이, 이렇게나 누군가를 –이번에는 소진을 가리켰다- 열렬하게 칭찬하는 건 처음 보니까.”

당무련이 억울하다는 듯 탕탕 가슴을 두드리며 항변하자, 그제야 마법사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야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지.”

“소진이 마법의 재능이 없는 게 안타까워. 저 머리에, 저 언어 능력이면… 어쩌면 대마법사도 될 수 있었을걸.”

“헤에……?”

당무련은 그에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비뚜름하게 한참 시선을 소진에게 주더니 척척 걸어가서 슥슥, 머리를 쓸어 주었다.

“어… 어?”

“친하게 지내자.”

“…어?”

당연히 소진은 당황했지만, 당무련은 그냥 그뿐. 주위를 돌아보며 한마디로 주위를 환기했다.

“그래서, 이것들 다 어떻게 해야 해?”

조금 전에 골렘을 정지시켜, 다시 주르륵 쌓여 있는 수많은 황금들을 보며.

“어…….”

“이건……?”

그리고 그건 묘하게도, 이제껏 생각도 못 해 본 부담이었다.

선실을 가득 메운 황금.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말하는데. 나는 안 든다.”

천마가 슬금슬금 모여드는 시선에 딱 잘라 말했다.

황금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금의 무게는 무겁다. 이 선창 가득한 황금을 들고 가기도 어렵지만, 수십 톤을 우습게 넘길 짐이라니?

아무리 그라도 그건 무리였다. 아니, 애초에 그가 이런 걸(?) 왜 지어야 하나?

“아니, 그럼…….”

“이걸 어째…….”

서문영과 운소령마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원래 사냥 중에 발생한 부가 소득은 당사자, 혹은 파티원의 짐꾼이 드는 법이다. 그런데 마침, 천마의 명목상의 위치가 바로 짐꾼이었다.

천마가 싫다는데, 그에게 억지로 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파티의 누구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조금씩 나눠 들까?”

“하지만 그러면 남는 것들이…….”

“두고 가야지. 뭐.”

소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대의 유령선에서 얻은 황금들. 심지어 정지시켰지만 황금으로 이루어진 골렘까지.

이것의 가치를 상단의 자제인 소진보다 잘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 소진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

“무슨 소리야! 소진!”

“그럼 어쩌게? 들고 가려고? 누가?”

아이들의 항의에 소진이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되물었다.

“하, 하지만…….”

“야야, 너희들, 잊은 게 있는데.”

다급해진 아이들에게 천마가 짝, 손뼉을 쳐 보이며 물었다.

“골렘이 갑자기 두르륵 일어서면 어쩌게?”

“……!”

대경하던 아이들은 그 말에 딱 입을 다물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거 키퍼도 있었지…….”

“탐색해 볼게. 서치!”

우웅!

하백운과 이경이 마법으로 뭔가를 탐색했다. 그러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당연한 건가. 이 금을 배 바깥으로 옮기려 하면 뭔가 일어날 거야.”

“뭔가라니. 그게 뭔데?”

“함정 발동은 내 전공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뭐든 좋을 게 없지. 최소가 아까 그 골렘… 최악은 그런 놈이 여러 마리?”

“으으…….”

하백운의 풀 죽은 말에 다들 진저리를 쳤다.

소진이 아까 긴급 정지시키긴 했지만, 황금 골렘은 정말 위협적인 놈이었다.

그런 놈이 여러 마리?

어차피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니고,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지금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미타불.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 는 것 같다.”

“그래, 두고… 가자. 던전 탐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물에… 홀리지 않는 거라고 했어.”

서문영이 이를 악물고 느릿하게 말했다.

그가 학관에서 받은 수업은 패스 파인더 직업 위주. 던전의 함정을 해체하며, 보물이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주의 깊게 내려지는 주의 사항이 바로 ‘욕심’에 관한 것이다.

“이미 골렘이라는 적을 상대해 봤잖아. 자칫 알지 못할 저주, 혹은 사소취대, 소탐대실… 여기서 욕심내다가 자칫… 돈보다 더 귀한 걸 잃을 수 있으니.”

“아…….”

결국 결론이 났다. 방윤과 서문영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말하자, 다들 힘겹게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 금이 있는데! 이걸 두고 가야 하다니!

번쩍번쩍.

마법사들이 띄워 둔 빛의 공이 여전히 사방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 * *

자박. 자박.

계단을 오르며 나는 소리가 유독 둔하다. 짐 하나 지지 않은 몸임에도, 파티원들은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분명 대단한 승리(?)를 얻은 후인데도 다들 말이 없었다.

“저거 불안해…….”

“그러게…….”

가끔 누군가 중얼거리면 그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뿐.

그렇게 축- 처진 분위기가 계속되자 천마는 혀를 찼다.

“다들 정신 나갔냐, 응? 아니, 이것들아. 지금 돈 보고 눈들이 돌았냐? 돈~ 에 돌아 버린 돈~ 놈들이야?”

“…재미없어. 이한.”

말하다 말고 재미 들린 듯 운율을 붙이자, 소진이 속 쓰린 한숨을 내쉬었다.

고대의 유령선에서 발견한 황금. 심지어 정지시켰지만 황금으로 움직이는 골렘까지 포함한 황금.

아마도 파티에서 이것의 가치를 상단의 자제인 소진보다 잘 아는 이는 없으리라.

“오? 너, 많이 컸다?”

“아, 왜 그래…….”

“음, 어쩌면 이게 진짜 함정일 수 있겠어. 우리는 거기에 이미 걸린 건지도.”

천마가 소진과 말로 투덕이는 가운데, 운소령이 조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름 주의를 환기하려는 걸까.

“함정?”

“황금의 마력. 다들 아까부터 저 아래를 생각하고 있잖아. 아냐?”

“…….”

“…….”

다들 다시금 입이 다물렸다. 거기서 운소령이 한 번 더 언급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이 배의 선장실… 보스 몬스터? 가 있어서, 그걸 처리했을 때 저 금이 우리 게 된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어쩌긴?”

“대박이지! 완전 좋지!”

“그럼 반대로, 혹 그 몬스터를 잡았을 때, 이 배와 배 아래의 황금이 사라진다면? 신기루처럼?”

“…….”

“……!”

우르륵 들끓었던 심정이, 삽시간에 싸~ 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아니, 그건…….”

“어, 어떻게 해야 하지…….”

‘호오.’

그리고 그 식견에 천마는 내심 감탄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애들이 방방 떴다가 가라앉았다 해서 이걸 어쩌나 싶었는데, 과연 제갈세가의 여식이랄까.

“서문영?”

“…가능성 있는 걸. 운소령의 말이 맞아. 어쩌면 저 황금 자체가 확실히 함정일지도.”

잠시 숙고하던 서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배, 정산… 모험가들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라지.”

금은보화나 신병 이기.

그걸 획득한 후, 누구에게 소유권을 줄 것인가.

이는 던전학과, 그리고 모험가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어려운 난제였다. 때문에 패스 파인더들에게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주입해서 교육한다.

“나쁘게 듣지 말아 줘. 솔직히 말해서… 나, 저걸 혼자서 다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

“크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다들 비슷한 기분일 거야. 다행히 우리 파티는 딱히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말끝에 힐끗, 천마를 쳐다보고 서문영은 길게 한숨 쉬었다.

“누가 내 몫을 빼앗지는 않을까. 혹은 파티의 누가… 죽으면 내 몫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된다고. 그게 가장 위험하다고… 들었어.”

-욕심이 생긴다면, 먼저 솔직히 말하라.

-서로서로, 누군가 사라져서 분배 몫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파티는 절대 생존하지 못한다.

패스 파인더의 수업에서 가장 집중해서 가르치는 구절.

말하면서 새삼 서문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수업 때 글로만 읽었던 위기를, 몸으로 겪어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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