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롤플레잉
“던전은 사선이다. 갈랫길 가득한 미궁 속에서, 적과의 교전 중에서, 파티원 한 명의 실수가 파티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천무학관은 2학년 과정에서 여러 교양과목을 수강할 수 있었다. 서문영이 자원해서 듣던 패스 파인더 양성 수업 중에는, 역할 수행형 수업이라는 것이 있었다.
“상황 발생. 파티원 한 명이 실수가 잦다. 그는 던전의 초입에서부터 기관을 건드렸고, 이번에는 몬스터의 이목을 끌어 버려, 난전이 일어났다.”
교관이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을 제시하고, 학관생은 그에 대한 대처를 빠르게, 명료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문제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학관생의 상상력과 논리력, 임기응변과 민첩함을 있는 대로 다 짜내야 하는 수업이다.
“지형, 습하고 미끄러운 동굴 속. 적, 강화형 리저드맨 7체. 파티는 검방(검과 방패) 전사 둘, 마법사 하나, 궁사 둘. 여기에 본인 포함.”
“……!”
학관생들은 즉각 눈을 감고 교관의 말대로 상황을 상상했다.
어둡고 빛이 흐린,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반면 덮쳐 오는 몬스터는 습지에서 활동하는 리저드맨.
시야는 나쁘고, 소리는 울릴 것이다. 지형은 나쁘고 아군은 혼란 중이다.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조합 중 하나.
“서문영?”
“마법사, 라이트를.”
상대는 교관이지만, 지시 형태로 말한다. 실전 상황일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페일(Fail). 실수한 파티원이 마법사였다. 놀라고 당황하여 시야는 암흑이다.”
제길, 하고 속으로 욕이 나왔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마법사가 함정 카드라니.
“궁사 1, 마법사를 부축해 벽에 붙어. 검방 1, 2, 앞으로 붙으며 시간을 끌어. 궁사 2, 나와 함께 허리를 이루며 보조한다.”
서문영은 빠르게 상황을 다시 상상하고 지시를 수정했다.
“검방 1, 2가 리저드맨 3체 차단. 하나 1체가 돌입에 성공. 마법사를 노린다. 하나 궁수가 경상을 입으며 보호에 성공.”
교관이 판정하고 진행한다.
다행히 마법사를 목표할 것이라는 예상이 들어맞았다.
역할극에서 전황이나 돌발 상황은 얼마든지 악화될 수도 있다. 빠르게 결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초적인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싸움이 난전으로 이어진다. 서문영?”
“전원, 발아래 미끄럼 주의.”
몇 가지 추가 상황이 더 발생하고, 서문영이 최대한 들어 온 수업 내용을 뇌리에서 쥐어짜 대답했다.
“미끄럼 발생. 하나 시의적절한 주의로 무효 판정. 전방에서는 리저드맨들이 뭉치고 있다.”
“검방 신속히 뒤로 후퇴. 궁수 연속 사격.”
“검방 후퇴, 궁수 사격. 좋다. 돌격해 오던 리저드맨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진다.”
교관은 여러 군데 생각도 못 한 곳에 함정을 파 두었으나, 서문영의 대비가 치밀했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모두 의심하며, 어떻게든 파티를 이끌었다.
얼마 후, 다행히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퇴치 완료. 경상자 3명. 중사상자 없음.”
“후우…….”
됐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문영. 그런데 교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위기는 면했으나, 파티의 불만이 높다. 실수가 잦은 마법사에게 처벌을 하자는 원망이 몰린다. 서문영, 처우는?”
“음…….”
추가 시험인가? 아니면 이게 본문제인가?
서문영은 다시 눈을 감고 상황을 상상했다.
사방에 널려 있는 몬스터의 사체. 피가 낭자하고 바닥은 미끄럽다.
장비를 잘 갖춘 검방들이지만, 쏟아지는 공격을 막느라 자잘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팔 하나를 다친 궁사가 화낸 얼굴을 하고 있고…….’
미리 지시한 게 있어 마법사를 구해 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바람에 본인이 부상을 입었다.
하나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 경상이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터.
‘하지만 던전에서 마법사는 파티의 필수 인원인데…….’
이게 고민이었다.
궁사의 항의는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이후 진행은 포기해야 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파티에서 단순히 전투력의 상승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두운 곳에서는 빛을, 굴곡진 미로에서는 방향감각을 유지하게 해 준다.
문제는 이번에는 그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서문영, 처우는?”
“…파티원 전원의 의견을 모아, 표결을 가립니다.”
교관이 채근하자 서문영은 고민 끝에 판단을 미루었다.
이후에 어떤 함정을 더 두었는지 모르니, 우선은 다수결. 묻어 가기에 좋은 술수다.
“2:2로 찬반이 동수다.”
“…….”
하지만 애초부터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교관이 묻어 가려는 그를 바로 끄집어냈다.
“나머지 한 표. 서문영 네 의사로 결정된다. 처우는?”
“으…….”
그놈의 ‘처우는?’ 이 지긋지긋하다.
‘이번 시간은 이런 부류의 인성 시험 같은 건가?’
서문영은 고민 끝에 마르는 입술을 적시며 입을 열었다.
“…처벌에 찬성하되, 파티를 입구로 후퇴시킵니다.”
“이유는?”
“마법사 없이는 던전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반반으로 마음이 갈린 파티는, 전력을 집중하기 힘듭니다.”
패스 파인더의 기본 자세는, 무리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찾는 것.
소득이 없더라도 안전이 우선이다. 특히나 파티 리더의 입장에서는 이런 점이 더욱 필요하다.
교관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다. 서문영의 결정으로 확정. 한데 마법사의 돌발 발언. 자신은 귀족이라고, 이런 걸로 처벌받을 수 없다고, 더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 조금 더 들어가자고 고성을 지른다.”
“어……?”
이걸 또 이렇게?
서문영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거기에 교관이 이어 붙이는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돌발 상황 추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 마법사가 단신으로 내부로 돌입했다. 파티원 둘은 친분이 있는지 그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하고, 화가 난 둘은 그냥 죽든 말든 내버리고 나가자고 한다.”
“…….”
“자, 서문영. 결정은?”
“하아…….”
서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너무 인위적이었다.
이쯤 되면 저 마법사를 죽이라는 교관의 악의가 팍팍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 실수를 연발한 데다 제 몫도 하지 못하고, 파티 리더의 명령에도 불복했다.
이 정도면 그놈의 결정, 하고도 남았다.
“파티는 입구로 철수합니다.”
“마법사는?”
“…알 바 아닙니다. 이미.”
“그는 귀족이라고 했다. 이렇게 그가 사망할 경우, 자네들 파티에게 귀족 살해 혐의가 걸릴 수 있다.”
“거짓말일 수도 있죠.”
거기서 서문영이 눈을 차갑게 번득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라 신빙성을 검증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법사 한 사람 때문에 파티 전체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진짜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흠?”
“잘못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고, 실력을 검증받은 후 다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다,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번복할 기회를 주겠다. 정말 그를 버리겠나?”
“…….”
서문영의 얼굴이 복잡하게 찌푸려졌다.
교관이 이렇게까지 정말? 정말? 하고 되묻는다는 것은, 어쩌면 저 마법사가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문영도 머리를 굴려 보았다.
‘원칙으로는…….’
이럴 경우 원래 어떻게 하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되지 않았다. 서문영은 자신의 판단과 그 과정을 재확인하고, 그리고 확신했다.
“버립니다.”
그는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은 저 마법사였다. 규칙도 지켰으며 최선도 다했다.
“결정했군. 좋다. 판정은.”
교관은 끄덕이고 바로 이어 말했다.
“실패다. 마법사는 던전에서 몬스터들에게 몰린 끝에 사망. 나머지 서문영 포함 5명은… 귀족 살해 모의로 몰려 처형당했다. 전원 사망. 안타까운 일이군.”
“…….”
한숨이 나오는 판정이었다.
안타까워? 이 교관이 사람을 놀리는 건지, 대체 무슨 설정이 이따위인지, 서문영은 머리에서 김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역할극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교훈은 개뿔. 그냥 교관이 엿 먹어 보라고 장난친 걸로 여겨질 뿐이었다.
펄럭펄럭.
한데 거기서 교관은 한 뭉치의 종이를 품에서 꺼내 들어 넘겼다. 그 표지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2학년 4반 서문영. 최종 평점 결과…….
꿀꺽.
서문영의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조금 전의 황망했던 짜증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긴장한 그의 앞에서 교관이 자신의 수업 평가를 들고 소리 내어 읽었다.
“명가의 자제. 능력 출중. 눈이 밝음. 참을성이 좋다. 태생적으로 리더이며 패스 파인더의 소질까지…….”
“……!”
서문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나하나 좋은 덕목이다. 이제껏 성실하게 자신이 패스 파인더 수업을 받은 결과가 매우 우수하다는 찬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당혹감에 빠졌다.
“참, 위험한 놈이군. 이거 아주 위험한 건 골고루 다 갖추고 있어. 끌끌…….”
“…네?”
서문영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명가의 자제, 뛰어난 능력, 좋은 눈, 인내심, 소질까지.
하나같이 나쁠 수가 없는 구성 요건이, 위험한 거라니? 그리고 그걸 다 갖추고 있다니?
의아함을 넘어서 자신이 교관에게 뭔가 잘못 보였나, 혹시 자신을 싫어하나 하고 고민할 때.
“학관생 서문영, 너는 뛰어나다. 그래서 네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들이 모자란다고 판단할 거다. 그건 아주 치명적이야.”
하지만 교관은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지하게 서문영의 장점이 야기할 수 있는 그늘을 보고 있었다.
매우 뛰어난 인재지만, 지나치게 뛰어나서 보통 사람들을 한 수 아래로 보게 되는, 독선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을.
“네가 할 수 있으니까. 그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못하는 건 게으르거나 평소 단련이 부족해서라고, 파티원들을 깔보게 되지. 그런 파티가 오래갈 수 있겠나?”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교관님, 저는 함부로 그런 편견 가지지 않습니다. 저희 서문세가는…….”
“아니, 너는 반드시 그런 편견을 가지게 될 거다. 왜냐하면 그 서문세가이거든.”
“……?”
도통 이해 못 할 말이었다. 어찌 그리 단정 지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단정의 근거가 서문세가라니.
쿠욱.
그 순간 교관은 서문영의 미간을 찔렀다.
“지금 네 얼굴, 어떤지 느껴지나? 감히 교관에게, 학관생이 인상을 쓰고 있군. 미쳤나?”
“……!”
서문영은 그 순간만큼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정말로 저도 모르게, 교관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해야 2학년 학관생이!
“죄, 죄송합니다! 수양이 부족하여…….”
“되었다. 일부러 건드린 것이니까.”
교관은 손을 털며,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교관인 내게 이 정도인데, 파티를 이룬 파티원 하나가 무슨 일로 자네를, 혹은 서문세가를 모욕할 경우. 자네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참겠습니다.”
“아니, 무리야. 지금 느꼈겠지만, 어릴 때부터 받아 온 오랜 학습은, 본능에 가깝게 자리 잡는다. 자부심, 혹은 명예. 명가 출신은 그걸 자극받으면 튀어 오르지.”
“네…….”
서문영은 수긍했다. 방금 자신이 보인 실태가 아니었다면 어찌 마음으로라도 반발했겠지만…….
아무리 의도하고 건드린 것이라 해도, 뻔한 수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이니까.
“이번 수업 시간은, 이제 감을 잡았겠지. 서문영 학관생, 자네의 기질과 성향을 파악하는 시간이었다.”
“기질… 성향…….”
교관의 말을 서문영이 따라 했다.
“자네는 꽤 유능한 패스 파인더가 될 거야. 대의를 위해서. 가문의 이름을 위해서. 자네는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노력할 사람이지. 장담해.”
“호평에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말게. 이제부터 본론이니. 자네와 파티를 이루는 사람이 전부 학년 수석일 수 있을까? 아니지. 분명 자네보다 떨어져.”
툭툭.
교관이 서문영의 평가지를 두들겼다. 그의 손가락이 짚는 항목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매우 우수. 매우 우수. 매우 우수.
“그러니 참겠지. 다른 파티원들의 부족함, 실수를. 자네는 인내심이 좋으니까. 하나 겉으로 관대하지만 이해가 안 될 거야. 왜 멍청하게 저럴까. 왜 저렇게 미친 짓을 할까. 이번 시간에 죽은 마법사처럼.”
“…….”
“그런데 말이지, 그게 아주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네. 그저 위기에 처해서 바닥이 드러났을 뿐이지. 그는 사실 귀족이 맞았고, 유능한 마법사였으나, 그날따라 저주에 걸렸거나, 적대 가문의 독을 마셨거나 했었을 수 있지.”
“…….”
“누구나 다 자신만의 사연이 있을 수 있는데. 자네는 그걸 보지 못 한 거야. 유능과 무능. 성실과 불성실. 자네는 사람을 너무 그렇게만 보고 있어. 상식과 기본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니, 거기 매몰되어 있지. 하지만 세상은 넓어. 언제고 그걸 벗어나는 사태를 만나면…….”
절레절레.
교관은 뒷말을 흐렸다. 서문영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식과 기본을 지켰기에 놓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 그렇다고 상식과 기본을 버리라는 말인가?
매사에 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고민하란 말인가? 그건 우유부단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고 말고가 없네.”
“…네?”
“그냥 알아나 두란 거야. 자네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걸. 이번 수업은 그게 화두일세. 언제고…….”
펄럭펄럭. 휘이휘이.
교관은 채점을 마치고 손을 내저어 서문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연이 닿으면 그때 그냥 알게 될 테니.”
“…….”
꾸벅.
서문영은 그렇게 나갔다.
학기 시작 전. 겨울의 보충 수업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