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천마가 가지지 못한 것 (1)
“…해서. 그런 수업이 있었어.”
“흐음…….”
갑판 바로 아래층에서 파티는 잠시 휴식을 가졌다. 이동 중에 갑자기 전 수업 때의 가르침을 떠올린 서문영. 그가 꺼낸 이야기가 은근히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욕심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것도 저열한 본능. 그래서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눌러 놓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용수철과 같다. 그렇게 눌러 둔 욕심은, 언제고 원래보다 더 크게 튀어 오른다. 억누른 만큼 더욱 반발하게 된다.
-그러니 억지로 대인배인 양 하지 마라. 욕심이나 서운함이 생기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다.
“흐음…….”
“음…….”
나름 똑똑한 이들-운소령과 마법사 둘도 서문영의 이야기를 깊이 곱씹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여운이 깊이 남는다.
“이를테면, 능력과 성실의 맹점이라는 거였어.”
본시 이 두 가지는 파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소득을 얻었을 때, 배분에 가장 기본이 되는 척도이다.
하지만 그 척도가 항상 올바르게 적용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당장 밸러스트 선창에서의 소진이 그랬다.
황금의 골렘을 상대로, 전사와 마법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뒤에서 멀뚱멀뚱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능력이고, 불성실이다.
하지만 싸움의 최후에, 소진은 그 모든 평가와 결과를 뒤집어 버렸다. 일행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정지 명령’을 찾아내어 골렘의 작동을 멈추게 한 것이다.
그건 능력이고 성실이었다. 다들 알지 못했지만, 소진은 소진 나름대로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유능하고 성실하다고 평가받는 다른 이들이 오히려 모르고 있었다.
“부족한 건 우리였어. 내 월녀검은, 치명타를 주지 못하고 골렘의 화만 돋우었지. 서문영은 유효타를 주었지만, 오히려 골렘의 위험성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운소령이 하나하나 짚으면서 복기한다.
“방윤은 맨몸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방편산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주긴 했어.”
다소 박한 그녀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방윤이 씁쓸하게 조각난 무기의 부품을 들어 보였다.
“뭐, 그조차 파괴되면서 다시 손도 발도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음…….”
“후…….”
특히 하백운과 이경은 나름 활약을 했지만, 운소령의 말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숨을 쉬며 수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파티 전력의 핵심이 되기도 하지만, 그 일을 해내지 못하는 순간 최악의 짐 덩이가 되어 버린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라니. 웃기는 말장난 같지만 던전에서 마법사는 수시로 그런 불량(?)을 일으킨다. 그래서 소진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있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항상 노력은 하지만 기여도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아슬아슬할 때 공을 세워 겨우 돌아보게 되는, 그리고 그제야 그간의 고달픔을 인정받는.
그런 마법사들은 널리고 널렸다. 소진이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그가 한 일은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아… 뭐야, 분위기 진짜. 야, 이러면 나만 아주 쓸모없고 모지리 같은 게 되잖아!”
“하하…….”
심각하고 묘하게 우울한 공기가 지속되자, 당무련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덕분에 분위기가 일신된다.
“그 교관 누구라고? 좀 짜증 나는 교관인데……? 나 그 사람 수업 안 들을래.”
“…아미타불. 하나 현기가 어린 말씀이다. 하아, 과연 교관이시라는 건가…….”
당무련이 쫑알대고 방윤은 염불을 외웠다. 누가 소림승 아니랄까 봐.
“여튼…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거야. 소진은 정말 용감했어. 문장을 뜯어내서 골렘 앞에 뛰어들어 통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정지 명령을 외친 것은, 나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훌륭했어. 소진.”
서문영은 다시금 소진의 활약을 치하했다. 그 말에 소진은 다소 복잡한 얼굴이 되어,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더 대단한 거야. 서문영.”
“뭐가?”
“아니, 그냥… 여러모로.”
소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내가 너라면, 지금 같은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못 할 거 같은데. 아마.’
그는 상단의 자제였고, 그래서 여러 번 상단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던전 공략과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상행 일정 역시 적지 않은 위기를 겪는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욕심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익을 바라고, 애초에 상단은 그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었다. 때문에 상단의 행수는 반드시, 자신의 업적이나 위업을 요란하게 떠든다.
‘이게 무인과 상인의 차이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서문영은 미친 듯이 대단했다. 사실 자신이 욕심이 났었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그릇의 바닥을 온전히 드러내 보였다. 그러고는 소진을 칭찬했다.
자신이라면 절대 저러지 못 할 것이다. 상단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는, 휘하 상인들이 만만하게 보고 반심을 품게 될지도 모를, 위험한 발언. 저걸 어떻게 할까.
‘그릇이 다르네. 역시 파티 리더야…….’
소진은 그렇게 동경하며 서문영을 보았다. 반면 그 시선을 받는 서문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천마를 보고 있었다.
‘내가 과연 파티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 후 서문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한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말이 파티 리더지, 지금 실제로 이 파티를 조율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었다.
무력이든 장악력이든 뭐든, 지금 이 파티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지닌 것은 바로 천마였으니까.
그는 그냥 강했다. 파티가 황금의 매혹에 빠졌을 때, 천마는 가장 먼저 그걸 털어 냈다. 그리고 다들 미적거리고 있을 때, 간단한 투덜거림으로 모두를 일깨웠다.
‘분명 동급생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지.’
서문영은 분명 뛰어났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그가 천마의 그릇(?)에 새삼 부러워하고 있을 때.
“서문영, 가장 강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건 아냐.”
“…어?”
운소령이 조용히 그를 보며 말했다.
“힘은 빌릴 수 있고, 지혜는 도움받을 수 있지. 하지만 이끌고 판단하는 일은 리더만 가능해.”
“…….”
“당장 우리 파티의 파티장 이름이 네 이름이라는 걸 기억해. 신뢰, 그간의 성과와 노력. 그것도 분명 힘이야.”
“…고마워.”
서문영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고맙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했다. 생각한 걸 너무 쉽게 읽히다니, 자신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운소령은 제갈세가의 일원이었다.
‘정말 기묘하게 잘 맞는 균형이야.’
제갈세가는 대대로 몸이 약했고 무력도 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를 갈고닦아 참모나 책사의 위치를 가졌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았다.
때로는 혼자 강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폭주하는 맹주를, 때로는 약해서 아랫사람에게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지도자를.
‘힘은 최강이나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 이한, 그리고 그걸 알기에 존중하면서도 자기 일을 하는 서문영.’
그녀 역시 저 황금의 마수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천마 덕분임을 알고 있었다.
밸러스트 선창에서 천마가 저 황금에 대한 욕심을 가졌다면, 다른 파티원들을 죄다 두들겨 잡고 그걸 혼자 가질 수도 있었다. 서문영이 욕심을 털어 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기도 했다.
‘간단하지만 쉽지 않지.’
그냥 힘이 없어서 사람이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수월하게 흘러갈까. 하지만 욕심은 끈질기고, 멀쩡하던 사람마저 비틀어 버린다.
무력이 모자란 우두머리가, 강한 수하를 보다가 질투로 자격지심에 비뚤어지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제갈세가는 대대로 많은 책사를 배출했고, 그래서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잘 아는 가문이었다.
“슬슬 가지. 왠지…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스륵.
방윤이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전신에 내력을 돌렸다.
“그러게.”
스물스물.
갑판 바로 아래층. 이제껏 거리를 두고 있었던 선장실. 거기서 기분 나쁘고 끈끈한 사기가 흘러오고 있었다.
유령선의 선장. 나름 작은 던전의 보스라 할 수 있는 존재가 기다리다 짜증이라도 난 것일까.
“가자, 보스 잡으러.”
“그래.”
“좋아.”
턱. 터덕.
나름 상념의 시간을 가진 파티원들이 차곡차곡 전의를 다듬기 시작했다. 기묘하게도 그들의 눈빛은, 아까 쉬기 전보다 더욱 진중하고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제법이야. 이 녀석들.’
천마만이 씁쓸한,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나보다 나을지도. 신교에 이놈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떠올리며.
* * *
그르르륵. 그르르륵.
선장실은 갑판에 반쯤 드러나 있었다. 가는 길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난 아닌데?”
“휘유…….”
배 전체가 무슨 괴물의 배 속처럼, 온갖 기물과 장치들이 일렁이며 파티의 일행을 조준하고 있었다. 뾰족하고 길쭉한 온갖 장치들. 그걸 보며 하, 하고 당무련이 탄식했다.
“내가 서역 배는 잘 모르지만,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에 손목 건다. 소진?”
“…그거 사천 당문식 농담이야?”
소진은 픽 웃었다.
독과 암기를 무기로 쓰는 이가, 손목을 건다는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주변을 파악했다.
“…당연히 정상 아니야. 본래 전열함 구조상, 선장실은 피격당하지 않게 보호되긴 하지만.”
그르르륵. 구오오오.
“마스트가 선장실 옆에 세 개가 들어선 배라니.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온다.”
찰칵.
서문영이 짧게 말하고 검을 들었다. 동시에 방윤이 방패를, 운소령이 검을,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했다.
그우우우우!
거대한 나무 기둥. 서역의 배에서 마스트라 불리는, 거대한 돛을 치렁치렁 휘감은 기둥이 촉수 생물처럼 구불텅거리며 일행을 향해 움직여 왔다.
“하! 이거 정말이지!”
크기나 무게로 보아, 정말로 압도적인 기물. 선창 바닥의 황금 골렘보다 더 거대한 물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당무련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지 뭐야! 밥값 하는 게!”
쉬쉬쉬쉬쉭!
그녀의 손에서 십여 개의 회선표가 빛살처럼 날았다.
타닥! 탁! 피싯!
섬광처럼 날아간 회선표가, 거대한 마스트에 감긴 로프를 끊어 버렸다.
휘이이잉! 파밧. 팟!
그러고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그걸 날린 투척자의 손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챙겨 오길 잘했다! 과거의 나!”
찹. 찹. 찹.
싱글싱글 웃으며 암기를 회수하는 당가 계집애.
대체 뭘 한 건가 싶었는데 결과는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그드드득. 키이이이이!
서역의 선박. 그중에서도 범선은, 수많은 목재와 줄의 조합이다. 마스트라 불리는 나무 기둥은 배를 지탱하는 일부이기도 하며, 수많은 로프로 지탱된다.
그런 마스트에 매달린 로프를 회선표로 끊어 버리면.
휘이이잉! 빠각! 빡!
계속 응축되어 있던 탄력이, 바로 폭발하는 것이다. 일행을 노리고 휘어져 오던 거대한 나무 기둥이, 휘영청 돌아가서 다른 마스트를 후려갈겼다.
우드득! 뻐벅!
“와…….”
천마는 새삼 암기 투척 한정으로는 당가 계집애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애로만 보이던 파티 애들이 나름 제법이라는 것도.
타닥!
당무련의 화려한 첫 타에 이어, 서문영, 운소령, 방윤이 화살처럼 날아 각 마스트를 감은 로프를 끊어 내기 시작했다.
“조금 늦었지만-! 파티 전원!”
서문세가의 젊은 놈이 호쾌하게 호통을 내지른다.
“전투- 개시!”
패애액!
내두른 그의 검에는 진한 뇌기가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