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천마가 가지지 못한 것 (5)
중원에 공포라는 이름의 씨앗이 심어졌다. 구대 문파의 사람들은 마교라는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만큼 마교의 피해도 컸다.
한때 십만에 달하던 신도들 중 절반이 사라졌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이들, 젊은 남자들이 죽어 나갔다.
남은 것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들.
마교는 그들로 다시 꾸려 나가야 했다. 없는 남자 대신 여자가 밭을 갈고 길쌈을 했다. 기력 없는 노인들은 덜 자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증오를.
-기억할지어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였는지. 새겨 둘지어다. 본 교가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를.
과거를 잊는 자는 불행을 다시 겪는다. 나이 든 마교인들은 옛 참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바래지 않는 기억을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일렀다.
평생을 쫓겨 다니다 죽은 선대 교인들의 이야기를. 그들을 내몰았던 중원에 피의 복수를 한, 영광스러운 무용담을.
아이들은 노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쫓기며 죽어 가던 끔찍한 일들을 말할 때면, 두려워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통쾌한 복수를 이야기할 때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뭐, 다를 거 없잖아.
하나, 그중 한 소년은 시큰둥했다.
노인들이 흥분하며 떠들어댈 때, 그는 시시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화나거나 기쁘거나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마음이 들기는커녕, 솔직히…….
좀 한심해 보였다.
-그러니까,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저 그렇게만 들렸다.
없으면 당하고, 있으면 되갚아 줄 수 있다. 혹은 있으면 당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바로 힘.
-힘.
감정이 이입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 간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나이가 차기도 전부터 무예를 배우려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드디어 하나가 될지니.
마교는 통합되고 있었다. 배교와 혈교의 사법을, 백련교의 전통 무예에 융합시켰다. 가려 뽑은 아이들로 혈검대라는 새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훈련은 혹독했다.
다들 힘들다고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재미있게도,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던 아이들부터 이러다가 죽겠다며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소년은 버텼고,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 인원의 칠 할이 어린애들로 구성된 혈검대는, 처음으로 새외의 중소 문파와 싸움을 벌였다.
첫 전투에서 소년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세 명을 죽였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정들에게 칼을 꽂아 넣었고, 기력이 모자라 헐떡였을 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죽임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다.
당연히 그 모습은 돋보였다. 노인들은 소년에게 귀한 영약을 구해다 먹이고, 많은 일을 시켰다.
전투, 폐관수련, 무예 감수, 때로는 조교나 교관.
부르는 이름도, 대우도 바뀌었다. 혈검대원에서 대주로. 향주에서 단주로.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중년이 되었다.
휘두를 수 있는 수하가 많아졌고, 눈에 들고 싶어하는 여인들도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추구하고 관심을 가진 분야는.
-힘.
오직 힘뿐.
사람을 만나고 친분을 쌓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게 만드는 권력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한결같이 힘만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마침내 찾아왔다. 수련과 훈련으로 기를 수 있는 힘의 한계, 이른바 벽이라 부르는 시기가. 그러니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대가 필요했다.
-싸울 놈은 어디에 있지?
마교의 무공 중에는 검증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수없는 실전이 필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싸움은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마교에 적대적인 문파는 중원에 차고도 넘쳤으니까.
그는 무던히도 싸웠고, 어디에서도 싸웠다. 마교를 핍박하는 자들과 싸웠고, 그러지 않더라도 강한 자를 찾아 싸웠다. 그런 위맹함에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불렸다.
-천마신교의 수호자. 호교사자.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강의 전력. 신교의 소망과 마교의 원망을 모두 알고, 그를 지키는 자.
그렇게 칭송을 받아도 당사자는 기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계속해서 싸우고 싸워 나갔다. 그러기를 수십 년.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다.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경지에.
-이것이…….
정파 무인들이 말하는 화경. 그에 필적하는 전인미답의 깨달음. 마침내 마를 넘어서서 극복하는 그 단계.
그에 올라 이를 ‘극마’라 불렀다.
말 그대로 만마가 복종하는, 초대 천마의 탄생이었다.
* * *
“이한!”
푸아악!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섬뜩한 예기가 몰아쳐 왔다.
“……!”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천마는, 어마어마한 솜털 뭉치 같은 것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즉각 반응했다.
“염화공!”
화르륵! 푸와악!
양손에서 극양의 화염이 일어났다. 처음에 붉게 일어났던 불은 뒤이어 새파랗게 색이 변했다.
부우우욱!
연기처럼 쏟아지는 열기. 거대한 솜털 뭉치에 즉각 불이 번지고, 활활 전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이한! 괜찮아?”
“…괜찮아. 얼마나 지났지?”
“뭐……?”
다급하게 묻던 소진이 갸웃했다. 그에 천마는 알 수 있었다.
“흠, 얼마 아니군.”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파티가 궤멸하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뭐 한 거냐든가 하는 질문이 나왔을 터였다. 하나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껏해야 찰나.
하지만 조금 전 천마는,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느꼈다. 그건 환각도 착각도 아니었다.
마교의 역사. 그 수많은 전승. 그중 일부를 눈으로 본 듯, 혹은 인생을 직접 겪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
‘슬슬 가까워지는 건가.’
히죽.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의 것은 흔히 주마등. 생사의 위기 가운데 겪는, 이제껏 살아온 생애가 한순간에 지나간다는 현상이다. 직접 겪어 보지 못한다면 그저 낭설로 치부해 버릴 현상.
하나 이를 천마신교에서는 신령하게 여겨 그리 부른다.
-천마지혼.
다른 어떤 종파와도 달리, 천마신교는 그 뿌리가 탄압과 핍박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그간 죽고 살았던 교인들의 삶과 경험, 혹은 원한 등이 깊게 배어 혈해를 이룬다.
소림의 승려들이 불법에 깊이 심취하며 무공이 상승하는 것처럼, 마교의 후예는 천마지혼을 통해 옛 마교 무인들의 경험을 전승받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묘한 것은… 조금 전의 천마는 딱히 주마등을 겪을 위기도, 위험에도 처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다르군. 이번에는.”
“어, 뭐가?”
“아니, 그냥 혼잣말이다.”
그 또한 생각해 보면 짐작 가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전생의 구옥경. 그때의 천마는 정말 무던히도 싸웠다. 그래서 발현된 천마지혼도 주로 싸움이나 투쟁의 경험 같은 거였다.
하지만 이번에 발현된 천마지혼은 뜨거운 투쟁심이 아니라 뭔가 서늘한 집념 같은 거였다. 지금 몸의 원주인이 구옥경이 아니라 이한이기 때문일까?
“하긴,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이긴 하지…….”
흔히 경지에 오르는 것을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정상에 가기까지 오르는 길은 수없이 많다.
어떤 이는 외공으로, 어떤 이는 내공으로. 먼저는 자신의 장기를 대성하여 온전한 일가를 이루고, 그 극에 다다른 다음에 벽을 만나, 부족함을 채워 나간다.
한번 지나가 본 길이기에, 지금의 천마는 극마의 벽을 넘어 탈마에 오르기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올라왔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또 동시에 난감하기도 했다.
‘신마경.’
정파에서 신화경이라 부르는, 탈마 다음의 경지. 이제부터 채워야 할 것들은, 전생에서 겪어 보거나 해결한 적 없는 것들일 테니까.
“이하안-!”
“아, 그래그래… 하이고…….”
확실히 이런 경험은 별로 없었지. 주변의 애새끼들이 빽빽대는 것에 천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뒤로 물… 아니, 유동적으로 진퇴하면서… 대치 상황을 유지해!”
다들 뒤로 물리고, 전면에 나서려던 천마는 생각을 바꿨다. 분명 적이 위협적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가 나서서 다 쓸어버려서야 지난 생과 다를 바가 없다.
천마가 구옥경이었을 때, 그는 걸리적거리는 일이 생기면 전부 자신이 나서서 부수고 해결했다. 괜히 약해 빠진 애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천마신교는 점차.
약해졌다.
“필리아? 느껴지는 건 어때?”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요. 처음에 비해 3분지 2 정도…….”
“좋아, 그럼…….”
좋은 적수는 좋은 친구만큼이나 필요한 존재다. 그걸 천마는 지난번 검은 기사와의 싸움에서 다시금 실감했다.
전생의 구옥경이었을 때, 그는 적수라는 적수는 다 찾아다녔다. 수많은 경험을 잡아먹었다. 그래서 천마는 강해졌지만, 그의 수하들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교주님, 제게 삼개전단을 주시면 중원을 바치겠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어쩌면 그놈들이 주구장창 와서 중원 정벌이니 무림 일통이니 하는 소리를 했던 것도, 나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천마의 실책이었다.
녀석들도 먹고 자랄 것이 있었어야 했는데. 수하들의 몫을 챙겨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굶은 바람에 이치왕인지 리치킹인지 하는 놈에게 본단이 소멸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들 잘 들어! 나는 가급적이면 나서지 않는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해!”
“……?!”
“어어……? 그게 무슨!”
“그렇다고 죽든 말든 상관 않는다는 게 아냐! 다들 뽑아내라! 너희의 잠재력이든! 실력이든! 지금 가진 것 이상을 뽑아내! 그래야 성장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다르게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제껏 녀석들은 나름 잘 싸웠다. 무인에게 개인의 무력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인간에게는 개인 이상의 힘도 있었다.
바로 무리의 힘.
파티를 짜서 서로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고, 강한 부분만 드러내서 적을 쓰러뜨리는 힘.
생각해 보면 전생에 신마경에 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오롯이 강했으므로. 굳이 무리 짓지 않아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알았어! 이한! 다들- 보이는 대로 때려 부셔!”
이번에는 무리 짓는 힘을 봐 볼 생각이었다. 예전과 다른 방향으로, 약한 자들이 강한 자와 싸우는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봐야 했다.
우웅! 치잉!
“적은 이 배 그 자체! 부수는 만큼 적은 약해진다! 몰아붙이다 보면 결국 진면목을 보일 수밖에 없는 거야!”
“……!”
“좋았어!”
와아아아!
서문영의 호령에, 파티 전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검기가 날고, 마법이 날고, 암기와 투사체가 날았다.
펑! 펑! 파지직! 콰각!
소환되는 몬스터를 피하며, 파티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크르르륵! 캬아아아!
유령선의 선장이 노호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