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천마가 가지지 못한 것 (10)
천무학관에는 화경급 고수가 여럿 있다. 그들을 보고 리그웨더는 이렇게 부르곤 했다.
오롯이 검을 지배하는 자(Sword Master)라고.
검의 극한에 이르면 어검술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이기어검의 경지에 이르면 거리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길이 고작 세 척의 검이, 십 장 이상의 거리를 날아 적의 목을 벨 수 있다. 화경 이상의 고수라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들은 단순한 검사가 아닌, 전략병기 취급을 받는 것이다.
당문에서 심독의 경지에 오른 이가 나타난다면 그는 독왕, 혹은 독주(Poison Master)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 당문의 독술은 그 특성상 대성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까마득한 옛날, 대격변이 일어나기 몇 대 전의 선조 가운데는 그리 불린 이가 있었다고 한다. 맞바람을 거슬러 독기를 뿌려 내는 고수가.
하지만 그 후로 당문은 그런 고수를 다시는 배출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심독은 어디까지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경지. 무엇보다 당무련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으윽……!”
화아아악! 파라라락!
맹렬하게 불어오는 바람. 당무련은 자신의 독무가 산산히 흩어지려는 것이 느껴졌다. 내력을 있는 대로 다 끌어모아 버티고는 있지만,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대로는 독이 통제를 잃는다. 그건 검사가 검을 잃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앙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독술사로서, 최후의 각오를 할 수밖에.
“…이렇게 된 이상…….”
당무련은 청각과 촉각. 두 감각마저 폐쇄할 준비를 했다. 아직 기감에 독무의 존재는 걸려 있다. 차마 바람을 거슬러 적을 공격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받겠어!!!”
전력을 다해 독무를 끌어당기면, 그녀 혼자 뒤집어쓰고 마는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당무련은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기경팔맥에 진기를 퍼뜨렸다.
“그럴 필요 없다. 당가 계집애야.”
“청각 폐… 어?”
툭툭.
그 순간. 어깨를 두드려 집중을 깨뜨리는 손길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평소라면 짜증 나던 목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이한……?”
“바람은 저놈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네 친구가 깼다.”
굉장히 든든한 울림이 있었다. 그게 무슨……? 하고 당무련이 입을 열려던 순간.
-으아아아아!
콰아아아악!
무시무시한 돌풍이 등에서 앞으로 밀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는.
“하… 백운?”
갑자기 실력이 급상승해 버린, 마법사의 것이었다.
* * *
반짝…….
“아…….”
깨달음은 짧았다. 잠시 지고의 황홀경에 빠져 있던 하백운은 시야에 가득하던 빛이 점차 사그러들며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 죽음과 삶의 경계. 그걸 깨우치게 된 수련자에게, 이면의 법칙(魔法)은 잠시나마 손을 뻗어 주었다.
그 손길은 너무도… 아니,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이었다. 뭐랄까. 흡사 세계 그 자체와 자신이 합일이 된 것 같은 전능감.
“하아… 이렇게… 이런…….”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꿈이라도, 깨어나지 않는 꿈은 없는 법.
잠시 수련자에게 뻗어진 법칙의 손길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원래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로.
“…세피로트.”
까닥, 하고 이별의 손길을 보내는 지혜의 나무. 세상의 법칙. 하백운은 그 존재가 떠나감에 지독한 슬픔과, 동시에 생경한 충만함을 함께 느꼈다.
우우우웅.
“이것이… 마나……?”
심장 어림에서 세차게 회전하는, 눈부신 빛.
그건 하백운 자신의 마나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빛이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온통 무지개빛이었다. 발을 들여놓은 이는 예전과 다른 눈으로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었다.
“금색. 하얀색. 푸른색. 그리고…….”
앞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는 방윤에게선, 금불상에서나 비칠 듯한 서기가.
몸을 부풀리며 검기를 쏘아 내는 서문영에게선, 벼락이 그러하듯 새하얀 빛이.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운소령에게선, 호수처럼 푸르른 빛이…….
“아니… 잠깐? 뭐?”
거기서 하백운은 확, 하고 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아아아! 캬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한참 전투 중이지 않았던가? 난 왜 이리 멀쩡하지? 저 유령 선장놈은 뭐 하는 거고?
푸드덕! 푸드덕!
앞을 보니 가관이었다. 높이가 수십 미터는 되는 서역 범선의 돛대, 마스트라 불리는 나무 기둥이 휘영청 휘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퍼드드등---! 퍼드드등!
그건 마치 거대한 부채질. 서유기 전설의 파초선처럼, 배 갑판 위에 있는 하백운의 동료들을 날려 버리려는 듯 무시무시한 바람을 부쳐대고 있었다. 그리고.
“…익?! 으악! 으아아아아!!!”
하백운은 좀 더 앞을 보자마자,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못 하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당무련이 피범벅이 되어 두 손을 쫙 내밀고 있고, 그 손 방향에는 불그스름한 불길한 연무가 덩어리져 있다. 그리고 그 연무를 향해 미친 듯이 펄럭이는 유령선의 돛!!!
콰르르릉! 솨아아악!
“거스트 오브 윈드!”
딱 보니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왔다! 하백운은 즉각 마법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부르르릇…….
그러자 불어오는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있던 연무. 아마도 당무련이 내기를 써서 덩어리지게 만든 걸로 보이는 독의 구름이.
팍. 솨솨솨솨솩!
완전히 흩어져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유령선 전체에 뿌려져 지글지글 타올랐다.
치이이이익!
-크아아아아!
전방위로 지독한 연기가, 그리고 독무를 뒤집어쓴 유령선이 고통스레 꿈틀거린다.
“후… 세상에…….”
하백운은 그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걸 우리가 맞았었으면……? 하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하백운?! 정신 차렸어?!”
“어어! 덕분에!”
타닥! 파박!
하백운은 다소 과장스럽게, 펄쩍 뛰어올랐다가 한쪽 무릎을 콰쾅! 갑판에 박으며 착지했다.
아무래도 전투 중에 잠시 멍~때리고 있었던 것 같으니, 이렇게 멋있게 등장하는 것이 우선!
“당무련은 왜 저래? 독은 왜 썼고?”
“이 배 전열함! 대포 64문!”
“미친!”
이경의 짧은 말을 하백운은 바로 알아들었다. 과연.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해가 되었다.
크르르륵! 까드드드득!
계단처럼 차곡차곡 자리를 잡고 앉아 이쪽을 겨냥하는 육십여 문의 대포들. 그걸 보고 있자니 무섭다기보다 좀… 기괴하고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무리 유령선이라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하백운이 알기로 저런 대포들은 갑판 아래에, 배의 좌우현에 배치되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들이다. 통짜로 쇳덩이인 대포는 어마무시하게 무거우니까.
갑판 위에 올린 수십문의 철포? 당장 무게만으로도 배가 휘청할 지경이다. 여기가 바다였으면 진작에 한쪽으로 넘어갔을지도.
캬아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얼굴이 반쯤 녹은 해골병들이 대포 안에다 뭔 자루를 던져 넣었다. 뒤이어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구를 꾹꾹 밀어 넣는다.
치이이익!
그러고는 꽁무니에다 화승을 대고 있는데, 뭘 하려는 건지는 딱 봐도 알 만했다. 포격 개시겠지 뭐.
“이경! 엠파워! 리차지!”
“…너? 뭘 하려고?”
버프를 요구하자, 이경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에 하백운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좀 대단한 거.”
진심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대마법급의 마법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막 세계의 축복을 받은 직후라 그런가, 머리는 선명하게 맑고, 마나가 서클을 이룬 심장은 활력이 넘쳤다.
“엠파워! 마나---차지!”
이경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하백운에게 마력 강화의 버프를 걸고, 다음으로 자신이 가진 마나를 있는 힘껏 밀어 넣었다.
우우웅! 짜릿짜릿!
“크---아! 이 느낌 좋아! 온다!”
눈앞에 번쩍번쩍 별이 튀는 가운데, 사방에서 불꽃이 파바박! 일어나고 있었다. 화승이 타들어 가는 불꽃이다.
-^%#[email protected]$#@#!!!
반은 사람, 반은 해골인 유령선장이 커틀러스를 휘두르며 고함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대포가 날아올 거야!”
“제기랄! 어디로! 어디로 피해야 하는데!”
파티원들이 우왕좌왕한다. 총 64문의 대포. 그 아가리의 크기가 사람을 넣고 쏴도 될 정도다.
저게 쏘아 내는 포탄. 쇳덩어리가 어느 정도 물리력을 가졌을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뭐.”
사실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맞을지도.
하백운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파티원들이 배 갑판을 뒹굴며 엄폐물을 찾아 아우성을 치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다들 참, 뭘 저런 걸로 쫄고 앉아 있어? 여기 이 하백운님이 계신데!
“트리플 스펠.”
드드등!
마법사에게 엠파워는, 전사에게 스트렝스와 같다.
근력 향상의 버프를 받은 전사가, 평소라면 들지도 못할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마력 효율이 잔뜩 올라간 마법사는 평소라면 쓰기 힘든 고난이도의 마법도 쓸 수 있게 된다.
“에어리얼 실드. 프로텍션- 프롬 시즈 미사일. 리플렉션-레디.”
우우웅!
하백운이 캐스팅하자, 파티원들 전면에 투명한 벽이 생겼다. 일렁일렁거리는 그 벽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반짝반짝!
그리고 그 앞에는 은빛의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 달라붙고, 뒤에는 아예 반투명한 원형의 막이 생겼다.
“이건……? 하백운! 너……! 설마!”
“하하.”
경악으로 비명을 지르는 이경. 그 모습에 하백운은 턱을 쓰윽 거만하게 들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법을 부렸는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마법사가 하나뿐이라니.
아마도 지금 이거 마법학 교관이 보면, 졸업까지 전액 장학금일 텐데.
-^%#[email protected]$#@#!!!
“쏜다! 엎드렷!”
유령선의 선장이 커틀러스를 휘두르며 고함 질렀다. 소진이 머리를 감싸며 갑판에 납죽 엎드린 순간.
뽜우우웅!
둔한 폭음 수십 개가 일제히 겹치며, 거대한 전열함이 휘청, 통째로 요동했다. 주르륵 계단을 지어 배치된 수십문의 함포가 시뻘건 불을 토해 냈고.
꽈-----다다다다당!
끔찍한 쇳소리를 내며 수십 발의 철환이 하백운이 걸어둔 마법의 벽을 타격하더니.
빠바바박! 빠바바박! 빠박! 빠박!
무언가 휘청! 하는 울림과 함께 격렬하고 기묘한 충격음이 연이어 울리고.
꽝! 꽈광! 꽈가가강! 쾅!
포환을 쏴 댔던 대포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이게 뭔……?!!”
꽈앙! 꽈앙! 쿠콰광! 빠강!
“으아악!”
뭐라 말을 하려던 파티원들은, 귀를 싸매며 뒹굴었다. 먹먹해진 귀에서는 삐---! 하는 이명이 일었다. 귀를 막아도 몸으로 울릴 정도다.
“뭐야! 이건……!”
“유폭이야……! 대포 뒤에 있던 화약이…….”
드드드득! 드드드득! 콰르르르릉!
폭발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포가 쩡쩡 터지는 쇳소리. 그리고 후방에 있던 화약이 터지는 소리. 무엇보다 유령선이 격렬하게 고통스럽게 지르는 비명 소리에.
-캬아아아아!
퍼걱! 퍼걱! 펑! 펑!
“으아악! 우리 죽나 봐!”
파티원들은 그저 엎드려서 죽는 소리만 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씨잉! 씨잉! 채챙! 챙강!
사방으로 파편이 날았다. 깨어지고 비틀린 쇠가 선박 곳곳에 폭우처럼 쑤셔 박혔다. 그러고는 또 폭발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