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새로운 게이트 (1)
“당 소저의 상태를 좀 봐야겠어요.”
상황이 대충 진정되자 필리아가 나섰다.
그녀는 이제껏 큰 정령술을 쓰지 않은 예비전력. 감응을 통해 적 전력 탐색 같은 것에만 힘을 쓰던 처지라, 다른 학관생들에 비해 여력이 남아 있었다.
“뭘 어떻게 하려고?”
“정령술로 치료가 가능해?”
“확답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턱. 턱. 쓰윽.
그녀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당무련의 얼굴을 닦고, 그 기색을 살폈다. 그러고는 한참 눈을 감고 무언가에 집중하더니 입을 열었다.
으오옴. 수르르르…….
나지막하게 깔리는 이상한 언어.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 소리는 이상하게 귀에 파고 들어왔다. 아마도 저게 정령어나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꾸욱. 툭.
소진은 여전히 기절한 채로도 당무련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조금 안타까운 것이었지만, 필리아의 집중을 위해 조심스레 떼어 냈다.
무언가 웅얼웅얼, 뜻 모를 주문 같은 걸 외던 필리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 소저, 들리나요.”
“…….”
“…….”
아이들은 조용히 했다. 다들 숨소리마저 죽이며 필리아가 하는 무언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정령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딱 보면 지금이 뭔가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스스로를 또렷히 하세요.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나요? 그래요… 자신의 몸을 인식하세요. 그리고 천천히 돌아와요. 어렵지 않아요.”
“…….”
“…….”
당무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에도 필리아는 대화가 통하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드드드득. 꾸직!
“어우, 깜짝이야…….”
그러는 가운데, 유령선이 삐걱대며 무너지고 있었다.
불경한 마법으로 수백 년을 비껴 지나갔던 세월의 무게가 다시 돌아왔다. 유령선장의 힘으로 새것 같아졌던 배는 삽시간에 수백 년은 삭은 나뭇더미가 되어 갔다.
파스슥. 파스스슥!
배 여기저기 베어 먹힌 사과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 걸 보고 아이들은 새삼 한숨을 쉬었다.
아마 여기가 물 위였다면, 진즉에 가라앉았을 터.
“와… 이건…….”
“죽어 가는 중인 건가? 아니지. 이미 죽었으니까. 엄… 살아나… 는 것도 아니고.”
페이탈리스트는 말했다. 이 유령선과 유령선에 거하는 언데드는 한 몸이라고. 유령선 그 자체가 일종의 성역처럼 되어 있다고.
그르르륵. 그르르륵.
하지만 그 말은 곧, 성역인 유령선을 부수면 유령선장이 죽고, 유령선장이 죽으면 성역인 유령선도 무너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유령선이 천천히 부서져 가는 가운데, 갑판에 널브러진 유령선장은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나 이제 죽소, 하고.
“저기… 이한……?”
“끝났어. 남은 사기가 거의 없어. 껍데기만 남은 모양… 단전이 폐해진 무인 같은 처지야.”
“아.”
천마의 말에 아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대가 언데드라 암만 그래도 혹시…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천마가 하는 말은 그런 걱정까지 날려 버렸다.
-그르륵. 그르르륵.
실제로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만 흘리는 유령선장은, 이미 싸울 의지고 능력이고 뭐고 없어 보였다.
반은 백골이고 반은 시체인 그 모습이, 아까는 끔찍했으나 지금은 그냥 처참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방윤이 한 손에 방편산 조각을 들고 딱, 딱, 두드리며 가까이 갔다.
“마하반야바라밀다. 관자재보살…….”
끄어억… 끄륵……!
유령선장이 즉각 반응했다. 방윤이 염불을 외자, 파들파들 가늘게 떨며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방윤… 뭐 해?”
“그의 고통을 이제 그만 덜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
똑똑또르르르… 똑똑또르르르…….
대체 무슨 재주인지, 방윤은 쇠로 된 삽날을 두드리면서도 목어(목탁)를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엄숙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염불을 계속 외웠다.
그에 유령선장은 꿈틀꿈틀, 이미 죽은 몸에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마치 ‘죽… 여… 줘……’를 외치는 듯하다.
“고통… 스러운 거 같은데?”
“아미타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공(空)이로다. 아까의 말로 보아 그는 살아생전에 가진 신념, 자신의 나라와 여왕 폐하에게 충성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 그는 이미 죽은 몸이며, 그가 살아 했던 일은 살육이니.”
똑똑또르르르… 똑똑또르르르…….
“선함의 너울을 씌워 스스로를 집착으로 밀어 넣는 것은 그저 고통일 뿐… 이제 죽음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을 놓으리오. 끊어진 것에 계속 집착하는 것은 한낱 망집일 뿐이라…….”
묘하게도 갑자기 고승 대덕이나 할 소리를 읊어대는 방윤. 지금 그는 얘가 왜 소림의 진전을 이은 소림승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니 경전에 이르기를.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길에서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형제를 만나면 형제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끄으으어어어어… 허르르르…….
“…….”
“…….”
아이들은 그 모습에 기분이 괴이했다.
분명 방윤의 말은 틀린 곳이 없고, 죽어서도 흉흉했던 언데드는 성불(?)시켜야 함이 맞았으나.
사정 모르고 옆에서 볼 때는, 그냥 다 죽어 가는 몬스터를 마지막까지 괴롭히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고문하는 거 같은데…….”
“…동감이야.”
웃자니 뭐 잘못하는 것 같고, 찌푸리자니 뭘 모르는 무식한 놈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오로지 단 한 사람은 기묘한 표정으로 방윤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고……?”
바로 천마였다.
그는 조금 전 격렬하게 치솟았던 생경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겨우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오자마자 바로 들은 것이 방윤의 저 말. 그건 묘하게도 자신의 전생을 겨냥하는 것처럼 들렸다.
‘집착… 집착이 오히려 눈을 흐린다는 말인가.’
부처의 길을 따른다는 승려가,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죽이라는 말을 한다. 아마도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 말하면 그때부터 도가 아니게 된다는 말.
소림이나 무당의 무예는, 기본적으로 도리와 철학을 깨닫는 것에 있다. 사람은 작은 우주이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면 갈수록 무리에 근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방향은 마교, 천마신교의 가르침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마교 역시 그 출발은 구세(救世)와 현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세의 평온을 바라는 종교였으니까.
“…….”
“하아, 허무한데. 처음 등장할 때는 그렇게나 위풍당당하게 나오더니.”
그렇게 천마가 간질간질한 뭔가를 되씹는 동안, 서문영이 뭔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르륵. 그르르륵.
방윤이 염불하는 가운데, 점점 고통스럽다는 반응도 줄어드는 유령선장. 아무래도 이참에 영원히 잠들 것 같은 그 모습을 보고.
“결국 제 공격에 제가 맞아 죽은 거 아냐? 어이없네. 이렇게 쉬울 줄은.”
“그러게.”
“…그러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주.”
천마는 그 말에 혀를 찼다.
그는 이 중에서 그 ‘공격’을 가장 가까이서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로는 저 대포의 일제사격은, 최소 화경의 고수가 전력으로 뿌린 검격하고 맞먹는 거였다.
“이것들아. 아까 그거, 이놈도 딴에는 회심의 일격이었어. 검강급 공격을 날렸는데 그걸 되돌려서 처맞았으니 박살 난 거지. 그런데 뭐? 허무해?”
“검강급…….”
“그… 정도였다고?”
“안 믿기면 말든가. 믿든 말든. 알아서 해.”
불신하는 아이들에게 천마는 툭, 내쏘았다.
솔직히 천마 자신도 겪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작(?)해야 대포 공격이, 그렇게나 강력할 수 있는 줄은 그도 처음 알았으니까.
‘그때 그 화승총, 한번 맞아 보기나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나.’
그랬다면 대포가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극한으로 발달된 서역의 화기는 천마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 데몬즈 루인 던전에서 청명 진인이 날린 마법, ‘영육분리’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했다. 맞으면 무예의 경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죽는 마법이라니.
경험해 보지 못한 공격은, 아무리 그라 해도 한 번은 당할 수밖에 없다. 좀 분하지만,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울 게… 많군. 정말.”
천마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새삼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걸, 그리고 세상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점점 실감했다.
한때 인세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그였지만, 그런 그도 모르는 것이 세상에 많았다. 마법에 이어 서역의 대포. 그리고…….
그의 눈이 힐끗, 십 대, 혹은 이십 대 초반일 뿐인 아이들을 향했다.
“…나는 이한의 말이 맞는 거 같아. 물리학 시간에 배웠지 않아? 날아드는 물체의 충격량은 무게와 속도의 제곱. 그렇게 계산해 보면…….”
“어우. 맙소사… 소름 돋는데.”
“그걸 튕겨 낼 수가 있는 거구나. 새삼 대단한데… 마법이라는 거.”
“…….”
운소령과 함께 아까의 일제 포격을 복기하는 아이들.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강점을 공유해서, 자신들보다 더 강한 자를 상대로 이기는 조직의 힘.
전에는 무시했었지만, 이 또한 엄연히 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
천마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자존심이 세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눈으로 보고도 현실을 부정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믿었던 것과 달리.
‘무예가 다가 아니다…‥.’
그리고 약간 알 것 같았다. 전생에 그토록 매달렸던 신마경에 왜 끝까지 다다르지 못했는지도.
전생의 천마는 오로지 무예에만 매달렸다. 궁극의 무. 그것만 보고 모든 걸 내버렸다.
그래서 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고작(?)해야 불경에서도 저런 말을 한다. 지나치게 집착하면 결국 빗나간다고. 스스로 생각한 틀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틀림없다. 이것이 무의 극한에 닿는 길이다.
전생의 천마는 탈마의 어느 지점에서 신마경으로 향하는 실마리를 잡았다. 아마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안 맞는 방향도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지? 왜? 왜 안 되는 거지?
그래서 더욱 매달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람을 멀리하고, 그가 생각한 신마경의 방향으로만 계속 나아갔다. 그게 악순환이 되었다.
누구도 그에게 관점을 달리해 보라고 충고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게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힘이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천마였으니까. 강호에서 짝을 찾을 수 없는 최강자였으니까.
그래서‥ 결국 닿지 못한 것이다. 눈에는 보이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지개처럼. 선입견. 스스로 생각한 것에 갇혀, 진짜 진실을 못 보고 수십 년간 쳇바퀴만 돌았다.
‘이미 까마득한 예전에 깨달았던 것인데.’
이런 깨달음을 왜 자신에게 대입할 생각을 못 했을까. 심히 허탈했지만 천마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지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하아‥ 하하.”
몰랐을 때는 모르지만, 알게 된 이상 새로 길을 찾아 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에 한해서는, 천마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노력가였다.
“오‥ 오오?”
“으음‥‥.”
“우와! 깼어! 당 소저가 정신을 차렸어!”
한편, 천마가 자신의 심상을 갈무리하는 동안, 필리아가 뭔 조화를 부렸는지 당무련이 몸을 일으켰다.
깜박깜박.
눈에 계속 물을 부으며 깜박이는 게, 아마도 눈꺼풀 안에 남은 피떡을 씻어 내는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반짝.
그리고 그렇게 당무련이 완전히 눈을 떴을 때.
“‥벽을 넘었군.”
천마는 중얼거렸다. 당무련의 눈 안에, 희미하게 빛나는 진녹색 섬광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