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새로운 게이트 (3)
차원 간 게이트, 세칭 굴혈(掘穴).
그건 대격변의 날쯤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멀쩡하던 대지가 갑자기 푹 꺼져서 바닥을 헤아리기 힘든 깊은 구덩이를 만든다든가.
혹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일렁이는 ‘문’이 나타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다든가 하는 그런 현상.
구우우웅! 두우우웅!
그리고 지금 천마 일행 앞에 나타난 것은 후자였다. 시커먼 어둠이 둥근 구를 만들고 있었고, 그 내부에는 무언가가 잔뜩 거칠게 움직이며 기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퐁…….
문득, 그런 소리가 들린 듯했다.
실제로 소리가 난 것이 아니라, 울림이었다. 검은 구체가 커다란 비눗방울처럼 일부분이 자라나 작은 분열을 일으키고, 그게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파지직! 파각! 쏴아아악!
터졌다. 터지는 순간 그 안에 있던 것이 맹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
어마어마한 양의 물. 아마도 바닷물일 터. 그 바닷물은 기이하게도, 땅에 쏟아지기가 무섭게 끓어올랐다.
푸와악! 쿠와아악!
삽시간에 증발하며 떠오른 무시무시한 양의 수증기. 허연 구름을 피워 올린 바닷물. 그건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 위로 한 잔의 물을 부은 것 같았다.
“이한! 저게 뭐야!”
“나도 몰라! 균열이니 게이트니 하던데!”
서문영과 천마는 서로 고함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콰아아아! 쿠와아아아!
바닷물이 맹렬히 끓어오르며 일어나는 거대한 소음.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중요한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운소령이었다.
“균열……? 차원 간 게이트?”
중원제일지(中原第一智).
무림인들은 제갈세가를 일컬어 그렇게 불러 왔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식을 모으던 학자의 가문. 그들은 대격변의 날 이후, 끊임없이 정보를 축척해 왔다.
무림맹의 존재가 학관 연합체로 바뀌고, 구파일방 대신 학관 이사장들로 권한의 주체가 바뀌었어도, 그들의 행로는 변함이 없었다.
제갈세가는 언제나 참모였고, 참모의 역할은 지도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정보와 소문을 모으고, 그것을 구분하고 분석하는 것. 언제고 대격변의 날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다시는 그렇게 피해 입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대격변을 겪은 제갈세가의 다짐이었다.
“도… 도망쳐야 돼! 주변이 전부 쑥대밭이 될 거야!”
그래서 운소령은 즉각 알아차렸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굴혈-게이트가 발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외워 온 그녀다. 특히나 불완전한 차원 간 게이트에 균열이 일어날 때 어떤 참극이 벌어지는지, 그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다.
“뭐……? 아니, 왜? 어째서…….”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타닥! 파밧!
운소령의 앙칼진 고함 소리에 다들 급히 발을 박찼다.
“뭐, 뭐가 일어나는 거야! 대체!”
난데없고 당황스럽지만, 그들은 일단 뛰었다.
평소에 항상 조용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운소령. 그런 그녀가 저렇게 급박하게 소리 지른다면, 분명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게 확실했으니까.
“으윽! 무거워! 야! 소진!”
“하백운! 인마! 정신 좀 차려 봐!”
달리는 가운데, 파티원들은 의식을 잃은 소진, 그리고 하백운의 뺨을 두들겼다. 급박한 상황에서 뻗어 널브러진 이들은 짐 덩이 그 자체다.
“으아아앗! 꺄아아악!”
특히 감각이 폭주 중인 당무련은, 옮겨지느라 몸이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죽는다고 깩깩 비명을 질러댔다.
짝짝! 짜악!
“으윽… 뭐야…….”
“아, 아파… 무슨…….”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기자, 하백운과 소진이 눈을 떴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운소령이 다급히 소리쳤다.
“뛰어! 어서! 위험해!”
“어? 어……? 아니… 뭔…….”
허둥지둥 사정도 모르고 일단 따라 달리는 아이들. 그들을 뒤에서 지키며, 천마는 갸웃, 하고 돌아보았다.
“이게 뭐… 우와.”
슈르르르르…….
해무처럼 무럭무럭 피어나던 엄청난 양의 수증기는, 곧 두터운 구름으로 변했다. 그 구름은 한순간에 짙은 먹구름으로 변했고, 비를 뿌려댔다.
쏴아아아!
파가가각! 카각!
허공에서 대나무가 터지는 듯한 기이한 소음이 일었다.
쏟아지는 비가 일렁이는 검은 구에 부딪히자, 검은 구가 녹아내리듯 쪼개졌다.
투둑. 투둑. 팡! 팡!
빗물이 닿을 때마다 점차 외피가 깎여 나가더니, 마지막 남은 덩어리가 천천히 땅에 부딪히는 순간.
번쩍! 번쩍! 파짓!
어마어마한 섬광이 일었다.
“우와앗!”
“……!”
하늘도 땅도 새하얗게 백열(白熱)시키는 거대한 빛. 일순 태양이 서너 개로 늘어난 것 같은 광량(光量)이었다.
“다들! 엎드려!”
운소령이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진흙탕에 몸을 던졌다.
타닥! 철퍽! 퍼더덕!
파티원들은 반사적으로 그 말에 따랐다. 질퍽한 습지의 땅에 옷이 더러워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박았다.
천마만 빼고.
“허어……?”
천마는 내공을 잔뜩 돋워 눈을 보호했다. 자칫하면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던 탓이다.
후우우웅.
섬광 너머로 그 아래 보이는 땅은, 움푹 베어 먹힌 것처럼 파여 있었다. 그리고 잔뜩 일어나는 아지랑이.
일렁일렁.
마치 허공에 거대한 돋보기가 생기기라도 한 듯, 사위가 구불텅, 뒤틀려 보였다.
이게 대체 뭔가, 하고 천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쫘악 하고 다가오는 아지랑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콰아아아악--!
“억……!”
그리고 그게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천마는 일신의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기막을 펼쳤다.
쐐애애애액! 카가가가각!
귀청을 찌르는 기음과 함께, 사방이 터져 나갔다.
푸학! 푸학! 푸화아아악!
물기 가득한 습지는 잔뜩 흐려진 흙탕물로 변하고, 멀리멀리 둥근 파문이 쭈우욱 번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연못에다 돌을 던지면 일어나는 동그라미 같았다. 다만, 그 크기가 수천만 배로 컸다.
“끄윽… 으어억……!”
천마는 울컥하고 목에서 피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자그마치 탈마에 이른 호신강기가 뚫릴 뻔했다. 눈앞이 아찔한 게, 무슨 거대한 신장(神將)이 휘두르는 망치에 정통으로 처맞은 것 같았다.
“컥! 쿨럭! 끄윽!”
그래도 버텼다. 서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탈마 체면에 진흙탕에 어찌 뒹구냐… 하고 여차하면 몸으로 막아 볼 생각이었는데, 그러기를 잘했다.
쏴아아아악---! 그드드득!
천마가 아니었으면 아이들은 죽었을 터였다. 상상도 못 한 거대한 충격파에 내부가 진탕되어서.
쿠궁… 구구궁…….
슈르륵. 후드드득.
대지가 울고 진흙 비가 내렸다. 사방으로 비산했던 습지의 물과 흙이 뒤늦게 쏟아져 내렸다. 뜨끈한 바람이 멈추기 무섭게, 맹렬한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구르르르릉! 화아아악!
조금 전에 지나쳐 간 충격파와 폭풍의 반대로, 맹렬한 바람이 폭발이 일어난 폭심지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몰린 바람은, 수증기와 흙먼지를 끌어안고 뭉게뭉게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드르르르륵…….
구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커다란 공처럼 몰리더니, 점차 계속 위로 솟아가며 그 크기를 불렸다.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주먹을 하늘에 뻗은 듯했다.
후드득! 후드드득!
흙비가 쏟아져 내렸다. 산산조각 난 전열함의 파편도 쏟아졌다. 한참을 그렇게 쏟아붓던 미친 바람은, 점차 잦아들며 수그러들었다.
“…어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천마는 하늘을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아직도 뻑적지근한 전신에 운기를 돌려 쿨럭쿨럭 피를 뱉어 낸 다음, 반쯤 정신이 나간 애들을 흔들어 깨웠다.
“야, 괜찮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으으… 어으으으…….”
방윤은 소림승인 주제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서문영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운소령은 거의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나마 하백운은 마법사라고, 정신이 남아 있었는데.
“어… 이거 그거 아냐? 물질이 겹치게 되면, 그 공간에 있는 사물이 에너지로 변해 버린다고…….”
턱을 따다닥 부딪히는 게, 잔뜩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그 충격량은 부피에… 질량의 제곱… 세상에, 나 살아 있는 거 맞냐? 여기 저승이야? 아니지……?”
“아니. 왜들 이래?”
천마는 어이없어했지만, 하백운은 조금 전 일어난 대폭발이 어떤 건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법사로서 별의별 지식을 다 머리에 넣어 놓는 그는, 조금 전 끔찍한 재앙에 휘말릴 뻔한 것을 안 것이다.
뭉게뭉게.
폭심지의 전열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있던 자리의 상공에는, 점차 허연 구름이 뚜렷하게 부풀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버섯구름…….”
“엉?”
천마는 돌아보았다. 과연, 하백운의 말처럼 피어오르는 그 구름은 거대한 버섯의 모양이었다.
***
일행이 정신을 차리는 데는 이각가량이 걸렸다. 운소령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때까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설명했다.
“공간 침식이야. 게이트의 성질이 불안정해서 균열을 일으켰어. 그래서 공간에 간섭이 일어났고.”
차원 간 게이트. 그건 이름 그대로 두 개의 차원이 연결되는 일종의 문이다. 애초에 중원에 존재하지도 않던 몬스터나 이종족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 문이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차원은 그 자체가 방벽.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배척한다.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동일 공간에 겹쳐지는 순간, 한쪽의 존재가 사라지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만다.
무공이고 마법이고 아무 소용 없는, 끔찍한 폭발이.
“…현경의 고수도 거기서는 무사하지 못한다고 했어. 그런데…….”
말하다 말고 운소령이 고개를 갸웃한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이지만, 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 하고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크기가 좀 작았나 보지. 아니면 에너지화가 덜 되었거나…….”
하백운이 멍한 얼굴로 고개 저었다.
달달달.
그는 아직도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음… 근데 그렇게 보면 이거 그거 아냐? 대격변의 날, 그 이전의 전조.”
소진이 멀리서 폭심지를 보며 물었다. 그는 충격파가 지나간 순간, 기절해 버린 당무련을 보살피는 데 바빴다가, 이제야 한숨 돌린 참이었다.
“전조라니. 뭐?”
“깊이 수백 장의 거대한 굴혈. 기록상에는 대격변 전에 나타났다고 했던 것 같은데.”
“굴혈……?”
“어, 그러네.”
전열함이 있던 자리는 이제 깊이 파인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깊고 커다란 구멍이다.
“음…….”
운소령이 생각에 잠겼다.
대격변의 날. 그건 리치왕이 중원에 넘어오며 벌어진, 거대한 참사를 일컫는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괴물이, 수천만 단위로 쏟아져 나와 중원을 휩쓸어 버린 몬스터 웨이브.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이 학살당한 대사건.
하지만 소진의 말대로, 리치왕과 몬스터 무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중원 곳곳에서 영문 모를 거대한 싱크 홀, 깊은 굴혈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럴지도. 게이트의 안정화는 바로 되는 게 아냐. 아무리 리치왕이 마법의 극에 달했다 한들.”
“시행착오가 있었겠군. 아까 같은 큰 폭발이 일어났었고, 그게 구덩이를 만들었고.”
“그리고 같은 자리에 다시 틈새를 열어, 차원 게이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지.”
하백운에 이어 이경이 뒤를 받아 말한다.
차원의 틈을 열어 오롯한 연결 통로를 만든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분명 몇 번의 연습 아닌 연습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140년 전 그날에는, 게이트가 열리는 그 순간을 본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본 사람이 살아남지는 못했겠지만.
“이한, 네 생각은 어때?”
“…….”
“이한?”
“어, 아아.”
한편, 천마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보고 있었다.
‘리치왕.’
하지만 그가 떠올리는 건, 그 까마득한 옛날 자신을 패퇴시켰던 존재, 녀석의 힘이었다. 그리고.
‘차원의 힘……. 차원을 겹치는 순간 발생하는 힘…….’
그걸 어떻게 하면 자신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탈마의 전력을 다한 호신강기도 뚫는 힘. 그것이야말로.
‘신마경…….’
천마가 갈구해 왔던, 차원이 다른 힘이었으니까.